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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자의 내려놓음 2397

LNCK 2010. 4. 11. 19:46

◈사역자의 내려놓음                신4:25~28                  -블로그 스크랩, 출처보기-

 

 

 

지난겨울 연말을 맞아서 며칠 휴가를 내서 가족이 북경을 찾았다.

북경 한인교회(21세기 교회)에서 금요일과 주일 예배

그리고 송구영신 예배 때 연속으로 설교를 했다.

주제는 <내려놓음, 그리고 그 이후>에 관한 것이었다.

 

 

내 설교 후에 담임 목사인 박태윤 목사님이 교인들 앞에서 고백했다.

당신은 북경에서 교회를 개척하셔서, 그 지역에서 가장 큰 한인 교회를 일구시고 난 후,

어디 간들 이런 큰 교회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을 하셨단다.

다른 곳에서는 현재의 대접을 받을 수도,

지금 같은 영향력을 미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곳(북경)에서 오래도록 목회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 해, 목회에 어려움이라고 느껴지는 상황을 처음 맞게 되면서

교회를 떠나는 부분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심각하게) 생각해 보셨다고 한다.

 

아내나 첫째 그리고 둘째 아이를 봐서는 다 내려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지금 잘 먹어대는 막내 아이를 보면

현재의 자리를 놓고 떠나는 것을 상상하기가 너무나 어려워 보였다고 한다.

 

비록 특유의 유머를 가지고 말씀하셨지만, 목사님 눈가에 물기가 묻어 나왔다.

목사님은 말씀을 이었다.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 담배 한 번, 술 한 번 입에 대기 전에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을 서원했고,

순결한 상태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축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 한 번의 결단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테레사 수녀가 인도로 헌신해서 들어갔지만

어느 날 높은 수도원의 벽을 넘어서 거리로 나아가

거리의 부랑자들과 삶을 같이 하기로 재 헌신을 했습니다.

저도 <헌신 속의 재헌신>으로 나아가기로 결단합니다.”

 

목사님께서는 편안한 목회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언제든 하나님이 싸인을 주시면, 떠날 수 있다는 다짐을 그 날 교인들과 나누었다.

 

<헌신 속의 재 헌신>

이 말은 어찌 보면, 더 내려놓는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겨울 하나님께서는 내게 몇 번에 걸쳐,

“내려놓아라, 더 내려놓아라, 다 내려놓아라. 내가 너의 상급이 될 것이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 무렵부터 다음 책에 대한 마음을 주셨다.

그래서 그 후부터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계속해서 내려놓아야 할 부분에 대해서 묵상하기 시작했다.

 

요단강을 건널 수 없었던 모세

 

신명기4:25~28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 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하고 그를 담대케 하며 그를 강경케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개척자로 부르신 자들을 개척 이후

그 과실을 누리며 지키는 자로도 사용하지 않으시는 경우를 성경 도처에서 본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부패한 심성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그 한계와 선을 지키게 하신다.

한 사명으로 부르시고, 다른 자를 불러 그것을 뒤이어 가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사역 초기부터, 다음에 물려줄 자를 찾고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부르심 받은 사명이, 내 사역인지 아니면 주님의 사역인지는

내가 떠나는 모습과 그 떠난 자리를 보면 알 수 있다.

 

모세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에 백성들과 함께 입성하는 것은 40년간의 숙원이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광야에서의 온갖 고난을 감수해 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를 이유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미 아론도 그 말씀에 따라 광야에서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새 지도자로 하는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셨고

그들을 사용하셔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도록 계획하셨다.

 

이제 목전에 가나안 입성을 앞둔 상황에서 모세는 한 번 더 하나님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한다.

그러나 모세의 또 한 번의 요청에,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신다.

“그 일로는 더 이상 구하지 말아라.”

 

모세가 훌륭했던 점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순종했다.

하나님의 생각이 자신의 것보다 더 크고 완벽함을 신뢰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에 대해서도 떼를 쓰며 기도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좋은 기도라고 생각하고 또 권장하기도 했었다.

흔히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로 많이 사용했던 것이

불의한 재판장에게 강청하여 소원을 이룬 과부의 비유였다 (눅18:1~8).

 

이 비유에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이 비유의 초점이 과부 강청함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의 핵심적 가르침은 ‘불의한 재판장도 과부의 뜻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이시겠는가’라는 데 있다.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뜻을 돌이킨 예로, 히스기야의 기도를 많이 언급한다.

히스기야가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을 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간구해서 15년 생명을 연장 받았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병을 낫게 하신다는 확증으로 히스기야의 요청에 따라

해시계에서 해의 그림자를 십도 물러가게 하는 기적을 보이셨다. 왕하20:1~11

 

 

하지만 그 후 히스기야는 바벨론에서 온 사신에게

자신의 무기고를 믿고 자랑하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하여 비록 히스기야 때에는 유보되었지만,

궁극에 가서는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게 하는 단초를 열었다.

 

더군다나 그의 생명 연장으로 인해 아들 므낫세가 태어났다.

유다 역사상 가장 악독한 왕 중 하나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히스기야가 생명 연장은 결국 유다 백성을 55년간

악한 왕 므낫세의 통치하에 신음하게 한다. 열왕기하21장 및 역대하33:1~11

므낫세의 우상숭배로 하나님이 단단히 뿔나셔서, 바벨론 포로가 결정된다. 왕하24:3

 

어리석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것이

결코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다.

사람의 눈에 보기 좋은 것이

전지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설교에서 들은 내용인데,

     장애아를 둔 재미교포 부부가 너무 답답해서, 굉장히 결사적으로 기도해서

     그 아들의 신체장애를 기적적으로 고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들이 곧 장성해서, 하루는 길에서,

     친구들이 저지른 살인사건에, 곁에 서 있었다는 이유로 연루되어,

     공범자로 유죄 판결을 받고서, 법정에서 수 십 년 형을 언도받았다. 

     그 부모는, 다시 눈물로 기도했다고 한다.

     ‘그냥 장애아로 계속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 그것을 신뢰한 모세

위의 모세의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거절은

단순히 모세의 실수에 대한 징계의 이유만 있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모세는, 후대에 계속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큰 계획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모세의 실수만을 언급하신 이유는

아직 모세가 주님의 계획 전모와

그 모든 이유들에 대해서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하나님은 각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설명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시며

그들을 다양한 단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해 가신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몇 세대에 걸쳐 사용하시기보다는,

각 세대마다 새로운 이들을 일으키신다.

 

역사의 긴 세월 가운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각 세대에 따른 부르심은

퍼즐 조각처럼 맞추어져, 단계적으로 각 세대에 맞는 주님의 역사가 이루어져 간다.

모세의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거절은

바로 한 사역자의 쓰임 받는 시작과 끝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설명해 주시는 것이다.

 

모세는 요단 동편을 바라볼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밟고 소유하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발로 밟은 땅을 미래의 그의 후손의 소유로 하나님께 인정받았지만

아브라함은 당대에 그것을 물리적으로 소유할 수 없었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장례할 땅조차 그에게 없었다.

그래서 헷 족속에게서 막벨라 굴과 그것에 딸린 밭을 돈을 주고 사야 했다.

 

내 세대에 허락된 분량이 있는 것이다. 각자에게 맡겨진 영역에 충실하되

그 선을 넘지 않는 겸손, 하나님은 이것의 교훈을

모세의 경우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모세는 자신의 소원을 듣기를 거절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고백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신32:4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조차도

그 분의 공평하며 진실하고 정직하신 성품으로 인한 것임을 고백할 수 있었다.

 

▲모세와 세례요한의 유사점

모세는, 자신의 자리를 알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했다.

그래서 자기 뒤에 올 이를 위해 준비하는 사역이 주어졌던 것이다.

 

세례 요한도 이것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뒤에 오실 분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분명히 했다.

그 뒤에 오실 이의 신발 끈 메는 것조차

자신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공언했다.

 

사역의 후발 주자인 예수님을 세워주는 것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그런데 하필 그가 자신의 사촌 동생이었다.

세례 요한은 어렵게 느꼈을 수 있지만 순종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사역 기반이나 제자들도 양보했다.

 

①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던 것 같이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안수했다.

 

그 때 그 안수를 통해서,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임한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신34:9

 

모세의 안수를 통해, 여호수아에게 성령이 임하신 이 장면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께 임하신 성령과 비슷하다.

성령이 그 선배 사역자라는 통로를 통해서, 후배 사역자에게로 흘러가신 것이다.

 

②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과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다.

두 이름 사이에 연결점이 있다.

 

③모세와 세례 요한에게.. 준비자 내지 개척자의 사역이 주어졌다면

여호수아와 예수님께는.. 성취자 또는 완성자의 사역이 주어졌다.

 

④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배 사역자의 겸손을 가장 귀하게 보셨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여자가 난 자 중에 그보다 큰 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모세의 경우,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신34:10

세례 요한에게 주어진 평가와 동일하다.

 

즉 내 사역의 평가는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물려주었는가라는 것이다.

 

내가 어느 시점에서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는

자신의 사역 초기부터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하는 일은, 어쩌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을지 모른다.

 

구원 역사에는 반드시 그것을 이루기에 합당한 겸손과 순종이 요구된다.

특별히 선교사는 뒤에 오실 현지인 교회 리더를 위한 준비자로 서야 한다.

자신이 사역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면, 많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

 

키르기즈스탄에서 열렸던 중앙아시아 시니어 선교사를 위한 포럼에서

카작스탄의 신 선교사님이 소금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어느 식당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커피가 너무 맛이 좋아서

주방에 들어가 커피 맛의 비결에 대해 물었단다.

 

여러 번의 설득 끝에 들은 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소금을 약간 넣었기 때문에 단 맛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소금이 약간 들어가 자기 맛을 죽이니까 커피 전체의 맛이 살아난 것이다.

음식이 맛이 있으려면 소금 맛이 강해지면 안 된다.

 

소금이 들어간 음식에서 소금이 들어간 것이 강하게 인식이 된다면

이 음식은 짜서 못 먹게 된다. 선교사가 드러나면 음식을 망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뼈아픈 질문을 던지셨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학교 사역이 과연 현지인 학생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선교사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그리고 덧붙였다.

“회개에는 내가 하는 회개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회개가 있습니다.

내가 주도하는 회개는 율법적인 회개일 뿐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 주도적으로 하는 것은 결국 율법을 쌓는 일일 뿐입니다.”

 

선교사 출신으로 홍콩에서 교회를 개척하신 목사님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개척 교회가 안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실은 목회자 자신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교인이 떠나가는 가장 큰 이유는, 인원이 적어서도, 시설이 부족해서도 아닐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개척 교회의 목사님이 그 교회의 주인으로 보일 때,

교인들이 떠나가는 경우를 봅니다.

어차피 그 교회는 교인들 자신의 교회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니까

귀속감이 생기지 않아서일 것 같네요.”

 

큰 교회를 돌보시면서도 적은 사례비로 청렴하고 가난하게 생활하시다

소천하신 목사님이 계셨다.

그 분 교회 출신의 어느 장로님께서 다른 교회로 옮기시게 되었다.

그 교회는 마침 교인들을 떼어주어서 여러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였다.

그 장로님은 그것을 보시고 이런 고백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돌아가신 그 목사님께서는 욕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참 욕심이 많은 분이셨던 것을 알았습니다.

교인에 대한 집착이 참 크셨던 분으로 기억됩니다.”

 

그 목사님과 평생의 많은 시간 동안 신앙생활을 같이 했던 장로님의 고백이

참 뼈아프게 들렸다. 사역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묶여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거룩한 일일지라도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을 잃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교인 수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본다.

교인 수가 그 교회의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물론 큰 교회가 필요하고 큰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교회가 큰 교회를 지향하며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게 주신 본연의 사명인지 아닌지에 대해 묻는 겸손이 필요하다.

자칫하면 그 교회가 정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선교에 대한 반성

(너무 길어서.. 여기까지만 정리합니다.

나머지 부분은,  -출처보기- 를 클릭해서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