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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2406

LNCK 2010. 4. 16. 11:31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눅24:13~35                10.04.04.인터넷설교 스크랩

                     


▲부활 신앙을 믿으면서도, 일상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현실..

‘부활’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초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을 믿는데, 그것은 바로 부활신앙에 기초한 것입니다.

예수 믿은 사람들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취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도 가끔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승리해야 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예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바로 그런 우리들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옆에서 동행해 주시는데도,

그 분이 예수님인줄 모르고 가는 겁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 16절에 나오고 있는데 한 번 같이 읽어 볼까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24:16

눈이 가리어져서.. 부활의 주님을 못 알아봤다는 겁니다.


해서 오늘 말씀은 먼저 그들의 눈이 뭐에 가려졌는지를 살펴보고,

그 다음은 그런 제자들을 어떻게 주님이 눈뜨게 해 주셨는지를

간단하게 살려보려고 합니다.


말씀 드린 대로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고

그것을 따라 가다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올 것입니다



첫째로, 그들의 눈이 가리어진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가 아니라, 죽은 예수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사실에 너무나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25리 정도 떨어진 엠마오를 향해서 걷고 있었습니다.

거기가 자기 고향이었던가 보지요. 


그런데 중간에 예수님이 끼어드셨어요.

3년 동안이나 그 분의 설교를 듣고, 3년 동안이나 그 분과 함께 지냈다면

금방 알아봐야 되잖아요? 그런데 전혀 못 알아 본 겁니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이미 그들의 마음이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다시 사신 예수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죽은 예수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7절에 보니까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었더라’ 하는 얘기가 나오지요?

지금 그들은 실망의 포로가 되어 있고, 슬픔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이젠 나도 죽을지 몰라!”  공포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 것에 가려지니까 바로 옆에 예수님이 동행하는데도 못 알아 본 겁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예수님이 함께 가고 있는데도

눈이 가려져서 바로 옆에 계신 예수님을 못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를 오래 믿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예배를 드렸고, 얼마나 많은 찬송을 불렀으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드렸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을 못 본다면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것은.. 산 예수가 아니라, 죽은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내 힘이 되어야 하는데, 전혀 힘이 되지 못하고

그냥 불안하고 좌절감만 생긴다면

그건 살아계신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얘기 속의 예수나 역사 속의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힘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 역시 사도 바울이 말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될 뿐입니다. 

오늘 이 부활절에 다시 사시고, 영원히 사실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주님이 우리 곁에 늘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내 속에 거주하십니다.

    다만 간절히 기도하고, 간절히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을 목마르게 찾는 사람만,

    그 주님의 실재를.. 자기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이런 영적인 삶이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꾸준히 자기 pace를 올려 나가야 합니다. 영적인 성숙, 경건의 훈련을 쌓을 때,

    비로소 ‘부활의 주님을 오늘 내 현실에서 매일 만나는’ 단계에 오를 것입니다.


◑둘째로, 눈이 가리워진 이유는 메시야관이 잘못되어 있어서입니다.


오늘 이 두 제자가 하는 얘기를 들어 보세요.

21절에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러지요?


예수님은 인류의 메시야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해방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그 말씀을 계속 하셨고,

또 그들이 구약 선지자들의 얘기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였다면

예수님을 그렇게 좁은 이스라엘 안에 가둬두질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영토는 이 세계에서 가장 작은 영토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 조그만 나라 안에서 자기들만을 위하고,

자기 나라만을 해방시키는 메시야가 되기를 바랐던 겁니다.

바로 그 욕심이 그들의 눈을 가린 겁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다들 나름대로 야심이 있었다는 것 잘 아시지요? 

다들 예수 왕국을 생각했고,

거기에 따라오는 성취와 행복의 조건들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생각/성경적 생각과는 완전히 빗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으시니까 “이젠 모든 게 끝났어!” 결론 내린 겁니다.

예수님이 보일 리 없지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오로지 <나와 내 가족>이 잘 되기 위해서,

또는 조금 넓혀서.. <내 교회와 내 나라>만 잘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건 잘못된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그런 식의, 나만을 위한 예수님으로 묶어둔다면

신앙은 독선이 되고, 아집이 됩니다.

자신에게도 전혀 힘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나의 예수님’만이 아니라 ‘너의 예수님’, ‘우리의 예수님’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내 시각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돌려지고,

내 삶의 지평이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서 보다 광대해 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그저 내가 원하는 복이나 내려주시는 분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절대 교제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불편해 합니다.

     ‘예수님, 그냥 죽은 듯이 계시다가, 제가 원할 때 도와만 주세요!’ 합니다.

   


◑셋째로 그들의 눈이 가리워진 것은

평소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였습니다.


눅24:22에 어떤 여자들이 예수가 다시 살아 나셨다는 소문을 퍼뜨린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평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부활하실 거라는 말씀을 계속 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소문이 돌 때, 그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떠올렸어야 되잖아요?

그 말씀을 믿었다면, 지금 그들이 왜 엠마오로 갑니까?

예루살렘에 그냥 기다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평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을 불신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책망하시잖아요?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여!” 눅24:25  


그들은 이 소문이 반가워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말씀대로 부활하셨구나!” 그러면서 무덤으로 뛰어갔어야 됩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한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에 말씀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찾지도 않고

오히려 그 소문에 자기들까지 죽지 않을까 떨면서 낙향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제자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믿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겁니다.

천사들도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뇨?” 그러잖아요?


▲예수님은 그 미련한 제자들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2가지 일을 하십니다. 


①먼저는 성경을 풀어서 설교를 하십니다. 아주 긴 설교를 하시지요?

27절에 보니까 “이에 모세와 및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설명하시니라.”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31절 “저희의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그랬습니다.

가리웠던 눈이.. 말씀을 듣고 밝아진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로고스’ 즉 ‘말씀’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계셨으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니라.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자세히 풀어 설명을 들으면,

우리는 당장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 분의 임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제 경우도, 제가 언제 예수를 만났나 봤더니

말씀이 내 가슴을 때리고, 그 말씀이 내 영혼을 뜨겁게 달궜을 때였던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 역시 부활의 주님을 느낀 때는

길에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부터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모세의) 계시의 시대도 아니고, 바다가 갈라지는 류의 기적의 시대도 아닙니다.

고대사회야 사정이 열악했기 때문에

주님의 살아계심은 이적들에 많이 의존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기적은, 또한 거짓선지자들도 얼마든지 비슷하게 행할 수 있다는 데서

어떤 위험성이 있습니다. 확실한 믿음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가장 빨리 만나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을 통한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물론 주님은 다른 방법으로도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하지만 말씀으로 만나는 것보다 더 든든한 것은 없습니다.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은 곧 예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정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그 말씀의 검에 내가 날마다 쪼개지면서,

내가 날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②또 하나, 예수님이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데, 30절 말씀 보니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랬습니다.

함께 성찬을 하시고 축복기도를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복 기도라는 것을 절대 소홀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복이 됩니다.


예수님의 축사로 제자들의 눈은 떠졌습니다.

이 축사, 축복 이런 게 필요 없는 거라면

예수님이 왜 그것을 하셨으며,

왜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 끊임없이 그게 내려오겠습니까?


그래서 예배에서 여러분을 위한 가장 좋은 시간은 축복기도 시간입니다.

봉헌시간에 드리는 축복기도, 예배 끝에 드리는 축복기도,

이것은 여러분이 무조건 크게 “아멘!” 해야 합니다. 

그렇게 “아멘!” 할 때 그 믿음 때문에 주님은 실제로 그렇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축복기도에 감사하고 아멘으로 믿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 이 설교문 제목


결국 오늘 이 제자들은 눈이 떠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을 돌이켜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다른 제자들을 만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제자는, 글로바라는 사람과 다른 하나로 나와 있는데

아마 70제자 중에 속한 사람들로 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엠마오와 예루살렘을 세 번 왕복한 셈이 됩니다.


①첫 번째는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이 여행은 예수를 바라본 희망의 여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개인의 성취가 이뤄지기를 바라는 발걸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했던 것입니다.


②두 번째 여행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옵니다.

자기들의 기대는 완전히 사라지고 환멸과 공포감, 좌절과 실망의 여행길이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를 만나기 전에, 낙조를 등지고 힘없이 내려오는 그 여행이었습니다.


③세 번째 여행은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즉 올바른 메시아관을 세우고

다시 사명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명을 져버리고 엠마오에 머무는 게 아니라

힘들고 어렵더라도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두 제자들은 실패한 채로 왔다가

다시 일어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짐해야 될 것도 그것입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부활을 못 믿고, 세상에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을 못 보고, 그래서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늘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늘 우리 곁에서, 세상의 이런 저런 것들에 팔려서 눈이 가리워진 우리들을

말씀으로 동행하시고, 또 성찬으로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그 주님을 이 부활절 아침에 다시 만나고

그 분과 함께 다시금 즐거운 여행을 계속하십시다!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사명의 길을 떠납시다!

그게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진정한 부활의 의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