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2~2003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2400

LNCK 2010. 4. 13. 13:06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119:65~72            02.03.17.설교스크랩/축약/편집



▲도입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수많은 파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 파도 중에는 피해야 될 파도가 있는가 하면, 맞닥뜨려야 할 파도가 있습니다.

‘죄의 유혹’이라는 파도는 피해야 하지만, 고난이라는 파도는 당당하게 맞서야 합니다.


<빠삐용>이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여러 번 감옥을 탈출하다가 잡혀서

한 섬에 갇히게 되는데, 거기서 파도의 흐름을 파악하고, 또 탈출을 감행합니다.

밀려오는 파도 가운데 어떤 법칙을 발견한 거지요.


고난에도 어떤 일정한 법칙이 있습니다. 이 법칙만 알면,

우리는 고난이 와도 거기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다 통과한 후에는, 오늘의 말씀처럼,

고난이 우리를 잘못되게 하거나, 깊은 나락으로 빠뜨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1. 고난의 첫 번째 원칙은,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주시되.. 거기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 고등부를 다닐 때 한 할머니 권사님의 성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쓰셨는지 성경이 다 낡았더라고요.

그리고 물에 한 번 빠진 것처럼 종이가 다 쭈글쭈글해졌더라구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었어요.

그 권사님 손자가 제 친구였는데 그 친구 얘기가

자기 할머니는 성경을 읽으시면서 그렇게 우신답니다.


그래서 "할머니 왜 우세요?" 여쭈어 보면,

우선은 성경의 주인공들이 고통을 당하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우시고,

둘째는 그 고난가운데서 함께 신음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감격해서 우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읽으시면서 페이지마다 눈물을 쏟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물에 빠졌다가 말린 것처럼

그렇게 쭈글쭈글 해 졌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 "참! 그 할머니 별종이네!" 그렇게 웃고 넘어갔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권사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본받고 싶어지는 겁니다.


사실, 아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그것을 즐거워 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도 벌을 주면서 아버지가 더 고통스러울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성경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본다면

우리도 그 할머니 권사님처럼은 아니더라도, 눈물 흘리며 감격할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매 장마다 우리들의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눈물이 배어있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어쩔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팔려갈 때는.. 그와 함께 밧줄에 묶이셨고,

모세가 광야로 나갈 때는.. 그와 함께 모래바람을 맞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만들었을 때는 그 배반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의 타락 때문에 우셨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아둘람 동굴에 있을 때는

그 동굴에서 다윗과 함께 추위에 떠셨고,

배신한 압살롬이 죽었을 때는 다윗과 함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부르면서 통곡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해서 바벨론으로 유배를 당할 때, 하나님은 함께 유랑 길에 나서셨고,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는, 함께 그곳까지 가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스데반, 사도바울, 야고보, 마태,

어떻게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가스실에 들어가면서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침묵하실 작정이십니까?"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이미 그들과 함께 가스실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이런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예는, 끝없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난이라는 책을 펴보세요.

매 페이지마다, 하나님의 눈물로 얼룩진 사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고난, 거기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이 휘감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능함 가운데 함께 해 주는’ 위로>   (펀 글)

원목 신부로 있을 때 환자들을 만나기 위해 병실을 돌아다니다 보면

저도 모르게 우울해지고 무기력한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병을 앓아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이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그들이 겪는 아픔과 처지를

헤아리고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골다공증이 심해 제대로 걷지 못하는 할머니 한 분이 입원했습니다.

저는 그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나으실 거라고,

좋아지실 거라고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할머니의 다리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원목자는 병을 치유하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병자와 함께 아파해 주고, 그 무능을 나누어지는 사람임을 체험했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참 무능한 분이시지요.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어주는 것이 위로가 되듯,

아픈 사람과 함께 아파해 주는 십자가 위의 그분이.. 우리의 위로가 되어주십니다. <수>



◑2. 고난의 두 번째 원칙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고난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궁극적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좀 더 야무지게 성장시키시려는 뜻이 거기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고난이 와서 그걸 감당 못하고 그 고난에 파묻히고 만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 자신의 실패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고난은 절대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고전10: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부모가 초등학교 3학년짜리에게 쌀 한 가마를 지우겠습니까?

어느 선생이 초등학교 6학년에게 고등학교 3학년 시험문제를 내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고난은 충분히 감당할 만한 고난일 겁니다.


도저히 감당할 만한 게 못되십니까? 혹시 그렇다면 주변을 살펴보세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피할 길(피난처)가 있을 것입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젠 끝이야. 길이 없어!" 그렇게 말씀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특별히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아멘.


일본 최북단 아오모리 현은, 일본 최대의 사과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지난 1991년 태풍이 덮쳐

수확을 앞두고 있던 사과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입니다.

90%의 사과가 떨어졌고, 그래서 전체 사과 수확량의 10%만이 남게 된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망연자실해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농부만이 오히려 웃으면서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농부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저히 웃을 수가 없는 상황인데도 괜찮다며 웃으니까요.

이 농부는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사과가 10%나 남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었습니다.


남은 사과들이 강력한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은데 착안을 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합격사과’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브랜드화해서 일반 사과의 10배에 가까운 가격으로

수험생들에게 판매를 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0배나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아오모리 현은 전국적인 관광지로도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단 한 명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농부 덕분에

절망의 상황을 희망의 상황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겨우 10%만 남은 사과는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었지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받아 들이냐는 것이었습니다.



◑3. 고난의 세 번째 원칙은,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오는 고난에는 반드시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둔해서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세월이 흘러서 당시를 회고해 보면

거기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프기만 하고 괜히 당하는 것 같지만.. 고난 속에는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한 뒤에야 그 고난의 의미를 터득하게 되지요.


히12:5절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잘못하는데도 징계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잘못하는데도 벌을 주지 않으면 그 아이는 사생아지 참 아들이 아닐 것입니다.

매를 들 때에는 나쁜 버릇을 고치게 한다든지,

잘못된 고집을 꺾는다든지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훈련시키기 위함 일수도 있고, 징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무의미한 고난은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캐리라는 인도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인도 최초의 선교사였죠.

이분은 굉장히 부지런했던 분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전기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배울 수 있는 것이 이분의 부지런함이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인도의 여러 지방방언들의 활자를 만들어서

성경으로 찍어낸 분입니다.

또 중국어 활자를 제작하고 중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인도 문법책을 만들고, 산스크리스트 어로 구약을 번역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뱅갈어로 신약을 번역하고

그리고 지방마다 다른 말들의 문법책들을 정리해서 집필해냈습니다.

(그 외 여러 업적들은,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기적적인 업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1812년 3월12일, 선교 센터에 불이 났습니다. 한 순가에 잿더미가 됐습니다.

20년 동안 해놓은 일(주로 집필, 번역)이 하루아침에 다 재가 되어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잿더미에서 윌리암 캐리는 다른 선교사들과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캐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우리는 모르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한 뒤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캐리의 조국인 영국까지 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영국 젊은이들 사이에 각성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3천명이나 되는 선교사 지원자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 500명의 선교사와 전문가가 가서,

윌리엄 캐리가 20년 동안 했던 일을 단 2년 만에 다 복구를 시켜놨다는 겁니다.

그러고나서는 인도 도처에서, 이 사람들이 중심으로 일하게 됐을 때

놀라운 성령의 불길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급작스런 불행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을 기다릴 때

거기는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사야 48:10절에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고 말씀하신 것 같이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여 쓰실 사람이나 국가는

반드시 고난의 용광로,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러운 찌꺼기가 제거되고 순금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죄성은 제거되고, 교만이 녹아져 버리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에는 반드시 뜻이 있습니다. 의미 없는 고난이란 절대 없습니다.



◑4. 고난의 네 번째 원칙은, 유익이 없는 고난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실 때 고난의 보자기에 싸서 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와 복을 주실 때 반드시 고난을 겸하여 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실패나 질병이나 환란이나 무엇이나 지난 다음에 보면

다 축복이 되고 유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말씀 시119: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했고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했습니다.


모든 고난은 다 유익한 것입니다.

평안할 때 받는 은혜보다 고통 속에 받는 은혜가 더 크고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해서 "하나님이 안 계신가보다" 혹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하고 하며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이사야 49장 14-16절에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젖먹이는 엄마가 어떻게 자기 아기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잠시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와같이 "나도 너를 잊을 수가 없다. 혹 육신의 엄마는 잊을 때가 있어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는다"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설교자)는 별로 좋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소아마비로 인해서 초등학교 시절을 내내 우울하게 보냈고,

중고등학교 때는 그 후유증으로 인한 지독한 열등감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남들은 한참 꿈에 부풀어 있을 때, 저는 죽음을 생각했고

절망이나 체념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한참 열심히 살아야 할 20대를 쓸 데 없는 방황으로 세월을 다 보내고,

결혼 후에도 뭘 해야 될지 몰라서 거의 7, 8년을 이런 저런 직업으로 전전했습니다.

늘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는 직업만 찾아다녔습니다.


제가 이곳에 부임하려고 했을 때, 전임 목사님께서 저에게 한 가지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부임하더라도 절대로 저의 전력(前歷)을 밝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자랑스럽지도 못하고,

오히려 말해서 손해가 될만한 이력이었다고 생각해서였을 겁니다.


그러나 목사님께는 죄송하지만, 제가 전에 했던 일들을 밝히는데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당시는 다 고통스러웠고, 자랑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다 유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일즈맨으로서, 백과사전부터 생명보험까지 영업을 한 업종만 모두 여덟 가지나 됩니다.

하는 동안 제가 정직하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한 고객의 입장에서 팔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도 후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학교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일이 시장의 노점상이었습니다.

좌판을 깔아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의 마음이 어땠냐 하면 "어쩌다가 내가 여기까지 왔나!"하는 자괴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잊으려고 더 소리를 질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를 지나면서,

무엇보다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게 됐고,

열등감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서 그 고통스러웠던 날들이

사실은 다 하나님의 훈련프로그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말씀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고난 후에야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고난 후에야 하나님이 성실하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고난, 이것은 오히려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먹구름 뒤편에 있는 푸른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숯의 성분은 탄소입니다.

그런데 지하 깊은 곳에서 평범한 탄소가 어떤 원인에 의해서

무시무시한 뜨거운 열과 강한 압력을 받게 되면 단단한 돌이 됩니다.

그게 바로 다이아몬드입니다.


여러분에게 고난이 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찮은 숯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로 바꾸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다 속 보통 조개가 아니라, 진주조개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 속에 ‘고통’을 두셨습니다.


▲이왕 통과할 고난이라면, 당당히 맞섭시다.

이제 고난에 굴복하지 마시고 당당히 맞서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고난이 오면 "오라! 고난이여!"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만, 그릇이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낙서했던 좌절이니, 절망이니, 포기니 하는 단어들은

이제는 종이가 찢어지도록 휘갈겨 버리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감당할만한 고난만 옵니다.

고난엔 반드시 뜻이 있습니다.

고난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옵니다.

고난은 결국 유익합니다.


이 고난의 원칙을 마음에 새기시고 일생동안 활기차고 새롭게 사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