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인가, 사명인가? 고전9:13~18 09.02.01.설교스크랩
▲드라마 <대장금> 전반부를 보니까
비록 음식이라는 소재를 썼긴 해도, 결국 요약하면 그것은 ‘사명의 문제’였습니다.
그 드라마에는 장금이와 그의 스승격인 한상궁이 한쪽 편에 서 있고,
그 반대편에 온갖 음모와 술수로 권력을 획책하는 최상궁 일파가 서 있습니다.
한 쪽은 물 한 사발에도 의미를 둬서 정성을 기울이는 순수함이 있고,
다른 한 쪽은 모든 행동이 권력의 쟁취로 귀결되는 사악함이 숨어 있습니다.
인생의 모습은 다양해 보여도 사실
알고 보면,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2가지 모습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즉 사명으로인가, 또는 단지 생존경쟁하기 위한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드라마 <대장금>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거기에 예수와 십자가가 없다 뿐이지.. 바로 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 문제에 대해서
본문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선을 그어 주고 있는데요...
◑1. 사명으로 사는 삶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또는 누구에게 헌신하고 계십니까?
헌신의 대상이 무엇입니까?
그걸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게 바로 여러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야 복음에 헌신했으므로, 그의 사명은 복음 전하는 일입니다.
즉 ‘바울의 사명은 복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나 야구에 헌신합니다.
그런 사람의 사명은 축구나 야구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음악을 공부하고 있고 헌신의 대상이 음악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사명은 음악입니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보면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명이 무엇인지 묻기도 어렵다는 겁니다.
아예 헌신의 대상이 없습니다.
사명이 뭐냐 물어보면 그냥 웃기만 합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종종 엉뚱한데 헌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에 헌신하고, 어떤 사람은 도박에 헌신하고,
어떤 사람은 투기에 헌신하고, 어떤 사람은 자녀라는 우상에 헌신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사명은 쾌락이요, 도박이요, 투기요, 우상숭배인 겁니다.
사명은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이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명은 잘못된 사명이요, 잘못된 헌신입니다.
▲지금 이런 현상을 비유한 예화가 있습니다.
한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운동장을 뛰라고 시켰습니다.
해서 학생들이 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좀 뛰다가, 똑똑한 학생 하나가 교장선생님에게 와서 묻습니다.
“왜 우리가 뛰어야 하지요?”
그러자 교장 선생님이 “기왕 뛰는 것 남들보다는 앞장 서야 되지 않겠니?
그러니 힘껏 뛰어” 그럽니다.
학생들이 한참 뛰다 보니까, 또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다시 와서 교장 선생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뛰어야 하지요?”
그러자 교장 선생님 대답, “죽을 때까지!”
이게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 뛰었고, 계속해서 달리기는 하는데
그 정확한 이유를 나도 모르는 겁니다.
지금 어른이 되신 지체들은 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왔을 겁니다.
중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셨지요?
그런데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선생님들께 들은 바가 없습니다.
물어보면 대답은 안하고 “기왕 공부 하는 것 남보다는 잘 해야 되지 않겠니?”
그리고 언제까지 그렇게 경쟁해야 되냐 물어보면 “죽을 때까지!” 그럽니다.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을 쓴 빅터 프랭클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모를수록 사람은 가속을 낸다”
정말 그렇지요?
바쁜 사람들을 보세요.
생각이 없고 헌신의 대상이 누군지 모르니까
허둥대기만 하지 사실은 아무 내용이 없습니다.
헌신의 대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뭘 해야 될 줄을 알기 때문에,
집중할 것과 버려야 될 게 뭔지 압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차분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해서 모르는 사람은 더 바쁩니다.
공부 잘 하는 사람은 시험 때가 오면 오히려 차분해집니다.
그런데 공부 못 하는 사람은 굉장히 바쁩니다.
책을 앞 페이지부터 뒷 페이지까지 막 정신없이 넘깁니다.
공부 잘 하는 사람은, 자기가 못 하는 페이지만 봅니다.
그렇듯이 인생의 목적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가속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이 없으니까 이리 몰리고 저리 몰려서 바쁜 것입니다.
▲‘부재(不在)의 능력’이란 말, 들어보셨나요?
즉 없을 때 더 힘을 느끼는 그런 힘,
없음으로 해서 더 크게 얘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 했던 목사님들을 보면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사참배를 하고 감옥에 안 들어가는 목사님이 있었고,
하나는 신사참배를 안 하고 감옥에 들어가신 분이 있었습니다.
감옥에 안 들어가신 분은 설교도 할 수 있고 양떼들을 잘 돌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일강단을 지키면서 교회는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옥에 들어가셔서
주일에 설교를 못 하는 게.. 더 강력한 설교가 아니겠어요?
‘부재(不在)의 능력’이지요.
우상숭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목숨 걸고 신사참배 안 하고,
잡혀 들어가서 주일 날 텅 빈 강단을 보여주는 것,
그게 더 절절한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있어서 말하는 사람이 있고,
없음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안 계셔 봐야 어머니의 힘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고,
아버지가 없어져봐야 아버지의 힘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 가치 있는 인생은, ‘없어도 말하는 법’입니다.
심지어는 ‘죽어서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 죽어서 온 천지에 굉음을 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주1)
그렇게 진짜 사명자는 ‘부재의 능력’이 있습니다.
▲은사와 사명은 직결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별개의 사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즉 여러분의 사명은, 여러분의 은사대로 사는 것입니다.
해서 은사를 사명으로 여기고, 그 결대로 살아가면
여러분의 인생은 억지로 살지 않고, 쉽게 살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살아야만 여러분 안에서 감각이 살아나고, 베스트가 나오며,
행동은 자연스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인생은 최상의 삶이 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생존의 목적으로 살려고 하면,
즉 좀 더 잘 먹고, 좀 더 잘 입고, 좀 더 편하게 살자.. 하고 돈돈 하면
여러분은 은사든, 감각이든, 베스트든, 행동이든
그 어떤 것도 나올 수 없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 생존을 위해 사는 삶 ↔사명으로 사는 삶
▲사명으로 사는 것이, 차라리 쉽습니다. 사명 없이 사는 것이 더 힘듭니다.
먼저 ‘사명’은 ‘사랑’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건 무슨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지요?
‘잊으려고 했더니 잊혀졌다!’ .. 그러면 그건 사랑 아닙니다.
‘헤어지고 나니까 시원했다!’ .. 그건 사랑이 아니지요.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뭔가 나도 모르게 하는 것,
그래서 절대로 거기서 손을 못 놓는 것.., 그게 사랑과 사명의 공통점입니다.
해서 적어도 사명이라면,
거기엔 어떤 방해나 난관이나 몰이해가 있더라도.. 뚫고 나갑니다.
그것도 뭘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는 게 차라리 쉽습니다.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게.. 주위의 박해가 없어서 쉬울 것 같지만.. 사실은 더 어렵습니다.
벌이, 힘들어도 육각형 모양의 벌집을 짓고,
철새가, 힘들어도 때가 되면 먼 길을 떠나야지..
만약에 그게 힘들다고 하지 않으면.. 벌이나 철새가 편안할까요?
아닙니다. 더 어렵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내게 심어 주신 뭔가가 반드시 있다는 겁니다.
은혜를 받으면, 지각이 생겨서, 바로 그것을 쉽게 찾아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땅에서 제일 능력 있게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의 결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이것보다 강력한 인생은 없습니다.
사명을 깨닫는 것은 너무나 소중하고 시급한 일입니다.
해서 어떤 한 사람에게 사명을 빨리 깨닫게 하려면
그 주변 사람들이 좀 방해를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요,
오래 전에 제 후배 중에 이런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전혀 아닌데.. 자기가 신학교를 가겠다는 거예요.
어릴 때 자기 어머니가 서원을 하셨다는 겁니다.
해서 자기는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야 할 운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보니까 교회 잘 안 나가는 것은 둘째 치고,
그 친구가 있는 곳엔 언제나 분열이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하여간 성격이 여간 모난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한 친구 몇 명이 그 후배를 막 몰아부쳤습니다.
“너는 신학교 가면 금방 짤려, 가지마!
신학교를 졸업한다 해도 너 같은 놈을 누가 전도사로 쓰겠냐?
네가 목사라면 너 같은 애를 쓰겠냐? 한 번 생각해봐라!”
뭐 이런 식으로 막 엄포를 놓고 너는 아니라고 그랬더니
얼마 있다 보니까 생맥주 집에 취직했더라구요.
이런 건 사명이 아니지요?
조그만 엄포와 회유에도 설득 당하면.. 그건 사명이 아닙니다.
진짜 사명이면.. 웬만한 방해가 있어도 다 뚫고 나가는 법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결혼시키고 싶으면, 주변에서 방해를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아니야, 힘들 것 같다! 불행의 씨앗이야! 쪽박 찰 상이야” 등등
온갖 말로 방해를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만나고, 하루라도 안 만나면 못 배기겠다 그러면
그건 진짜입니다.
그래서 사랑 또는 사명은
환경과 관계없이 내가 걸어갈 수밖에 없는 길을 말합니다.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
그런데 이 땅에 사는 사람이 다 사명으로 살아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명으로 사는 사람>의 반대는
<생존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먼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사람은 언제나 생존의 차원을 뛰어 넘어야, 의미를 발견하는 법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사명을 알게 되고 그래야, 그때부터 최고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존으로 사는 것은
그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머물러 있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의 작전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평생 생존에 매달려 살도록 유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얼마나 오래 동안 이 문제에 시달려 왔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이런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생존으로 살려고 한다면
이것은 교회 문을 나서자마자 당장에 우리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 문제에 있어서 분명히 못 박아 둡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생존은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절대로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게도, 생존의 책임이 내게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흔한 얘기로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야!”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먹이시고 마시우고 입히시는 것은.. 우리 일이 아니라, 하나님 소관이라는 거예요.
마6:26을 보세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시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느냐”
또 마6:28절에 보면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여러분! 백합이 얼마나 예쁩니까?
그런데 그 백합도, 자기가 수고해서 입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입히셨다는 거예요.
이렇게 새와 백합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이
우리를 굶기시고 벌거벗고 살게 하시겠습니까?
다시 말씀 드립니다.
생존은 하나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생존은 하나님의 영역이지, 우리 영역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명으로 살기 위해 통과해야할 첫 번째 관문입니다.
▲조금 방향이 다르지만 이 김에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믿음생활 하면서, 가장 부족한 면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믿음을 얻기 위한 건데
의외로 가장 취약한 부분이 믿는 일이라는 겁니다.
우리와 하나님과 믿음과의 상관관계는 히11:6에 확실히 명토박아 두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다른 설교 때도 꽤 여러 번 인용한 기억이 나는데,
믿음에 관한 가장 기본이자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또 그 분이 일하게 하는 방법은 다른 게 아니라
그저 믿는 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계시고
그래서 그 분이 내 삶을 강권적으로 이끄신다는 그 믿음만 드리면
하나님은 “ok!” 일하신다는 겁니다.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 주신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삶 속에서 그런 믿음의 시작은 바로
‘생존은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이 친히 나를 위해 일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정말 사명으로 사시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믿어야 할 것은 생존은 내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 소관이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계문제(생존)를 훌쩍 뛰어 넘읍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
우리를 더 풍성케 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무 수고도 안 했는데 다 공짜로 받은 겁니다.
그런데 그 공짜로 받은 게
우리가 수고해서 얻은 것보다 백 배 천 배 더 낫다는 겁니다.
치아(齒牙)는 아무리 금이나 백금으로 했어도
원래 하나님이 주신 이보다 좋지 않습니다.
돈 주고 산 의수나 의족보다
공짜로 주신 우리들의 손, 발이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공짜로 얻은 목숨, 공짜로 얻은 건강,
공짜로 얻은 가족, 공짜로 얻은 재능,
이런 것들이 돈 주고 산 것보다 훨씬 더 좋다니까요!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것들은 은혜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돈이 들어간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생존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의 위대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여기 앉아계신 대부분의 지체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것들은
이미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쓸 데 없이 더 추구하는 것은.. 탐욕적인 인생에 다름 아닙니다.
해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내 사명을 빨리 깨닫고, 그 사명을 위해 뛰는 일입니다.
생존은 지금 당장이라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생존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고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그런 믿음을 가지시고
이 생존의 단계를 뛰어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본문 설명
▲내 특권이요, 내 사명이다!
원래 사도 바울은 좀처럼 자기의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분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감정이 굉장히 격앙되어 있습니다.
이유인즉, 그의 사역을 의심하고 공격하는 소리가, 점점 높아져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시다시피 원래 그는 예수님의 직계제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로는,
온통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힘을 쏟았습니다.
오늘 이 편지의 수신자는 고린도 교인들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과는 각별한 관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서든 아무리 길어도 3달 이상 머문 적이 없는데,
이 고린도 교회에서만큼은, 무려 1년 반을 체류하면서 개척하고 양육했던 겁니다.
원래 목자는, 그가 섬기는 자들로부터 생계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게 성경의 가르침이고, 구약 때부터 내려온 교회의 전통이었습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는 재정이 넉넉해서
다른 교회 지도자들을 물질적으로 돕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그 이상의 대접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재정적 부담을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더 잘 전해보고자하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령하셨던 것처럼, 고전9:14
고린도 교회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손수 천막을 짓고 팔아서,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갔던 겁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상황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로 솔직히 토로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이 모든 일에 대해서 감정이 북받쳐 올랐나 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더 이상 복음 전하는 일도 하고 싶지 않고,
물질의 어려움 당하는 것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정말 안타까운 심정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고전9:15
무슨 얘깁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단 한번이라도 물질도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고,
또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앞으로는 여러분들이 좀 도와줬으면 바라고 하는 얘기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의 자랑이고 특권인데
그 일을 어떻게 돈 또는 그 외의 다른 것 때문에 영향 받을 수 있겠나?,
나는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하겠다... 하는 말입니다. 고전9:16~18
(개정개역판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지만
과거의 개역판 성경에는 ‘죽을지언정’ 다음에 말없음표(...)가 나옵니다. :15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복음을 위해 애쓰고 있는 자기를 이해 못하고
공격하고 오해하는 데 대해서 안타까움과 억울함을 털어놓는 겁니다)
▲해서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하면,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16절, 17절처럼 고백을 하지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아멘!
너무 화가 나고 괴로워서 말씀 증거하는 것을 그만두려 했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왜요?
복음 전하는 것은 자기가 꼭 해야 될 사명이고,
만약 그 사명을 이행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있을 거라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로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즉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한 얘기는
하나님 편에서 벌을 내리실까 그게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거기에 미쳐 있고, 그게 자기의 전부이고,
그래서 특권이요 자랑인 그 일을 안 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에겐 화라는 겁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저주가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못해서 오는 몸살이라는 겁니다.
그는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꽁꽁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즐기고, 그것에 감격해 하고 있는 겁니다.
................................... 더 읽으실 분................................
주1) 부재의 능력을 보여준 본 회퍼 목사
물론 사명을 찾았다고 해도 당장에 열매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명 따라 가는 길은 험하고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요즘 한참 새롭게 조명되는 독일의 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본 회퍼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이 나치 치하에 미국에 유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있을 곳은 미국이 아니라 자기 조국인 겁니다.
해서 조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랬더니 당시 그 분이 몸담고 있던 유니온 신학교의 많은 동료들이
하나같이 말립니다.
“들어가면 당신은 분명히 죽습니다. 그러니 여기 있으면서 기회를 보십시오.”
다들 그렇게 권합니다.
그런데도 본 회퍼 목사님은 결국 자기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물론 자기라고 왜 생각을 안 했겠습니까?
자기 성향이 나치와는 합해질 수 없다는 것,
분명히 고난이 오고 핍박 당할 거라는 것, 왜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독일로 들어가서 반 나찌 활동을 벌이다
결국 1945년에 감옥에서 순교합니다.
사명자는 자기가 죽을 자리를 압니다.
자기가 죽어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뭔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순간에 그 자리에 붙어 있어야 일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 꿈, 비전,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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