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을 믿는다면 창22:1~14 09.02.15.설교스크랩
◑1. 위기는 하나님의 테스트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고, 그 씨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도록 계획 하셨습니다.
당연히 그에게는 거기에 걸맞는 믿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자신이 직접 세운 훈련 커리큘럼에 몰아 넣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대체로 그 과정을 잘 이수해 나갔습니다.
물론 중간에 실수도 있었지만
부족한 대로 하나님은 자기 계획을 진행해 나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조금씩 성장했고, 이제는 익은 벼처럼 여물고 완숙해졌습니다.
해서 이제 마지막 시험을 치룰 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알아야 될 게 바로 그것입니다.
위기의 모양으로 오는 이 시험은, 마귀가 우리를 꾀는 유혹temptation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 마련하신 테스트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쓰러뜨리기 위해 시험을 주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세우시기 위해 테스트 하십니다.
시험은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이 대부분이지만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붙이기 위한 시험이고
복 주시기 위한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창22:1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데
그 이유가 뭔지 분명히 밝혀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게 뭐냐?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시험과 시련은,
그게 불의에 빠지도록 하고 양심을 팔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모두 하나님이 출제하시는 테스트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치르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학생들의 등수를 구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시험을 중간 중간에 치러야.. 학생들의 실력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시험test을 안 보면, 학생들의 실력 향상이 더디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사설학원에서도 자체적으로 월말시험을 보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시험이 필요한 이유가 뭡니까?
그 테스트를 통해서 우리가 뭐가 부족한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뭐가 잘못되고 뭐가 부족한지 알아야 고치고 보충할 것 아닙니까?
거기에 시험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든 시험을 본다면 공부를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시험을 준비하면서 실력이 느는 법입니다.
▲우리는 테스트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출제자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인류의 구원섭리를 시작하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은 당연히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브라함이 그런대로 잘 해 왔는데,
이제 그 큰 일을 맡아 시작할 만한 사람인지 어쩐지는
아직 확신이 안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어려운 테스트를 해 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 테스트를 통과할 줄로.. 믿으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에게도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결과는 두고 보셔야 했습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으려고 칼을 치켜들었을 때
황급히 막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결과를 예정해 놓으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도 추이를 지켜봐야, 흥분되고 기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지금 많이 힘드시지요?
그리고 이번 테스트는 평소보다 더 난해하지요?
그렇더라도 이 테스트를 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 더 큰 것, 더 유용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험은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이것을 이기고 나면, 반드시 좋은 상을 주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좋은 상을 주시기 전에,
반드시 테스트를 해 보십니다.
내가 그 상을 받아서 잘 관리할 만한 능력이 되는지... *
▲시험을 쉽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하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 시험의 출제자, 즉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한 질병이,
자녀의 문제가,
실직, 실연, 또 다른 상실의 문제가 아무리 고통스런 것이라 할지라도
그 문제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을 때,
우리는 ‘그 다음 국면stage’을 믿을 수 있습니다.
아비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선하신 아버지는 어련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좋은 것을 주시고, 결국 이로운 것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벼락같은 것을 주시더라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환자가 무슨 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갑자기 혈변을 바가지로 보는 합병증이 찾아왔습니다. *혈변 : 血便 피똥
한 가지 병도 견디기 힘든데, 다른 합병증까지 찾아오다니요...
현실은 아주 절망적이었습니다. 정말 앞이 캄캄했습니다.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하던 그의 아내가, 믿음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여보, 고쳐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혈변이 나왔네.
그러니까 이 혈변은, 몸에 있던 안 좋은 것들이 다 빠져나가는 것이야!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오히려 더 좋은 거야!’
정말 비과학적인 말이었지만,
결과는 그 아내의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피를 바가지로 몇 번 더 쏟아내기는 했지만, 나중에 더 건강해졌습니다.
암이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지만, 몸이 더 이상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 힘든 시련의 때에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아무 상관도 없고,
아무 개입도 없고, 아무 힘도 못 쓴다면... 정말 여러분은 일어날 길이 없습니다.
절망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테스트의 출제자가 하나님이시고,
나를 붙여주시기 위한 시험이라는 것을 믿으면,
즉 상 주시기 위한 시험이라고 믿으면
시험이 오히려 희망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그 분이 우리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 시시때때로
테스트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테스트는 복 주시기 위한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복 주시길 원하는데
그걸 받지 않으려고 하니.. 시험을 뿌리치려고만 하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부디 시련의 모습으로 닥친 이 테스트를 정면으로 맞닥뜨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족한 것을 채우고, 틀린 것을 고쳐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에겐 다음이 있습니다.
◑둘째로, ‘그 다음’을 믿는다면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75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고,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24년 동안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99세 되던 해 아내 사라가 진짜로 임신을 하고
그 다음 해에 드디어 아브라함은 아들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얻은 아들을 이제 다시 달라는 것입니다.
가장 미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던가요?
줬다 다시 뺏는 사람입니다.
언제 아브라함이 아들을 달라고 했나요?
아버지가 되는 일은 애저녁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하나님 편에서 알아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 놓고 이제는 달라 하시니..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지난 주 여선교회 성경공부의 주제는 ‘기도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에게 각자가 생각하는 기도가 뭔지 물어 보았는데
어떤 분이 ‘기도란 내려놓는 것이다’ 말씀하시더라고요.
참, 탁견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 역시 어렸을 때는 뭘 얻을 생각으로 하지만,
장성해갈수록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포기할 게 뭔지를 알아서 내려놓는 겁니다.
아브라함 역시 그 동안 참 많이 받아왔습니다.
구원받았고, 믿음의 조상이 되도록 약속 받았고,
실제로 그에 걸 맞는 복을 받았습니다.
거부가 되었고 강한 힘을 주셨습니다. 사병私兵도 많았습니다.
그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은 그 받은 것을 도로 내 놓기를 요구하십니다.
그것도 자기가 가진 모든 것에다 자기 목숨을 합해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아들,
그 아들을 죽음 앞에 내려놓으라는 겁니다.
그렇게 달라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진정 우리가 ‘그 다음 stage’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실 그 동안 아브라함은 이런 저런 일로
내려놓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한 적이 꽤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두 차례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다른 남자에게 보냈습니다.
조급한 나머지.. 자기 아내의 여종과 동침해서 서자(庶子)를 봅니다.
모두 다 내려놓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런 모든 과정에서 ‘학습효과’를 본 까닭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은 이번 명령에만큼은 즉시 순종합니다.
그 동안 여러 차례의 실패와 실수를 통해서 내공을 쌓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소식이 없다가 100세에 아들을 주신 것이 그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었습니다.
또한 내려놓으면.. 하나님은 다시 주실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여러분! 사실 저나 여러분 모두 지금까지 받은 은혜로도 족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될 때가 왔습니다.
내려놓고 포기해서.. 그걸 하나님이 가져가시도록 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그 다음’을 믿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내려놓으면 그게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작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광활하고 환상적인 인생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내려놓고 포기한다 해도
인간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아픔과 슬픔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삼일 길을 가야 했습니다.
아비로서 얼마나 생각이 많았겠습니까?
암탉 한 마리도 독수리가 새끼를 덮치려고 들면
자기 몸을 날려서 새끼를 구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인간이 어찌 제 정신으로 자식을 죽입니까?
차라리 자기 생명을 달라면 어렵지 않게 드렸을 것입니다.
▲기다리라!
우리가 오늘 아브라함에게 배워야 할 게 바로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5절이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창22:5
종들에게 한 말이,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아들과 같이 드리지만
돌아올 때도 역시 아들과 같이 돌아오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바치라 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자기 아들을 죽이시지 않을 것이요,
혹시 죽더라도 다시 살려서라도 자기에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던 게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를 믿어주는 신뢰입니다.
나를 믿어 주는 사람에겐
어떻게든 그 믿음대로 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내려놓고 순종하십시오.
내려놓음에서 오는 자유로움과 기쁨을 맛보십시오!
그 믿음 때문에 기뻐하실 하나님의 환한 웃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또한 내려놓더라도
그 내려놓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미리 다 차단시켜야 합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내려놓으려고 해도 다른 이유에 충분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날 죽이고 이삭을 데려가라” 그랬을 것입니다.
또 막상 모리아산에 가서도 종들까지 단 앞에 데려갔다면,
아무리 종들이라도 아들 잡는 아비를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노망들었다고 했을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때로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까지도 말하지 않고
혼자 결단해야 하는 게 이 내려놓음입니다.
▲여러분! 이 위기 앞에 여러분이 내려놓을 게 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뭡니까?
돈입니까? 지금의 지위입니까?
또는 자존심입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자식입니까?
아마도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게 지금까지 쌓아 온 안정과 안전이겠지요?
하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모두 다 내려놓으십시오!
왜 그래야 합니까?
하나님이 괜히 시험주시고, 괜히 내려놓으라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용규 선교사의「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 책의 실제 제목은 ‘내가 얻은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 책은 내려놓음으로서 결국 얻은 게 뭐였냐 하는 얘기로
일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으십시오! 그래서 얻으십시오!
이것이 오늘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내려놓음으로서 더 큰 것을 얻는 이 진리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후략)
................................ 더 읽으실 분 (설교문의 서두) ...............................
▲죽음 이후 세계를 믿고서, 죽음을 편안히 맞이했던 사람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고하는, 어떤 호스피스 봉사자의 체험담이 방송에 나왔습니다.
자기가 ‘죽음을 아주 새롭게 바라보게 된 계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은 거의가 기독교인들인데,
그 호스피스 분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88올림픽을 계기로 정부 부처에 체육부가 생겼었는데,
그 초대 장관이 이영호 씨였습니다.
그 분의 임종얘기였습니다. 아주 예수를 잘 믿는 분이었지요.
이 분이 암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고 호스피스 병실로 들어왔는데,
교수와 장관을 역임한 분이라 문병객도 많았나 봅니다.
그런데 그 호스피스의 얘기가 뭐냐 하면, 환자는 늘 밝은데
오히려 그를 문병하는 방문객들의 표정은 어둡고 우울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죽음을 앞둔 사람 앞에서, 어떻게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해서 방문객들은 이해를 하겠는데
정작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이영호 장관이었다는 겁니다.
어떨 땐 자기를 찾아온 친구들에게 농담을 하는데,
“내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잘 닦아놓을 테니까 충분히 일한 다음 천천히들 오라구!”
그런다는 거예요.
도대체 죽음을 무슨 소풍 가듯이 생각하고 전혀 두려워하질 않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환자들을 돌보아 주는데, 그 일을 죽기 바로 전날까지 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돌아가시는 날도 평안하게 임종을 맞이하더라는 겁니다.
그 호스피스 분 얘기가 그랬습니다.
<자기가 난생 처음으로, 죽음의 세계 외에 다른 세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그렇게 깊은 감동을 받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이영호 장관은 죽음 이후의 다음 세계를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의연했을 것입니다.
▲성경이나 세계역사를 주도해 간 사람들은, ‘그 다음’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였습니다.
그것은 꼭 죽음만을 놓고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지금의 이 상황이 끝이 아니고, 반드시 그 다음에 뭔가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금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들쳐보면, 그 사실은 더욱 확연해집니다.
노아는 그 다음을 믿고 100년 넘게 방주를 지었고,
아브라함은 그 다음을 믿고 본토 친척을 떠났습니다.
다니엘은 그 다음을 믿고 사자굴로 들어갔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 다음을 믿고 뜨거운 풀무불로 들어갔습니다.
엘리사나 이사야, 호세아,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 역시
그 다음을 믿고 악한 왕들 앞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외쳤습니다.
신약으로 와서도 스데반은 ‘그 다음을 믿고’ 돌에 맞아 순교하였고,
사도 바울은 ‘그 다음을 믿고’ 베스도 총독 앞에서 예수를 전했고,
요한도 ‘그 다음을 믿고’ 밧모 섬으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그 다음’을 믿고 산 사람들을 열거하자면
오늘 밤까지 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여러분 역시 모두 ‘그 다음’을 믿는 분들이시지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그 다음을 믿고, 그 다음세계까지 믿는 것’입니다.
▲문제는 평소에는 이렇게 ‘그 다음’을 믿는데,
위기 때는 ‘그 다음’을 잘 못 믿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평안할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원칙을 지키는 일이나 양심을 지키는 일이나 신앙까지도
평안할 때는 그런대로 유지가 됩니다.
하지만 일단 위기가 닥쳐오면 ‘그 다음’은 생각 밖입니다.
내 사고의 테두리 안에서 ‘그 다음’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켜왔던 원칙, 양심, 신앙 다 무너집니다.
사실 알고 보면 그런 것들은 위기 때를 위한 것인데,
정작 그런 것들을 가동시켜야 될 때가 오면 그것들은 올 스톱합니다
마치 ‘그 다음’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그 다음’을 믿는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한 번 다짐하고 배우고 새겨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다음’이 있음을 믿고 확고하게 우리 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이제는 우리에게 클래식이 된, 아브라함을 한 번 따라가 봅시다.
말씀 속에서 우리를 통렬하게 꾸짖는 소리를 듣고
다시 한 번 ‘그 다음’이 있음을 새깁시다.
아브라함에게 인생 최대의 고비가 왔습니다.
하나님이 100세 때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번제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토막 쳐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완전히 태우는 제사입니다.
무슨 이방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나 있을 법한 일을
지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위기도 이런 위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저나 여러분에게도 이런 위기는 언제나 오는 법입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결판났는지는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해피엔드입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시련의 때에 어떻게 ‘그 다음’을 믿고
출중하게 행동하느냐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위기는 하나님의 테스트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 다음을 (결국 합력해서 선을 이룰 줄) 믿는다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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