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창12:1~4 09.01.31.설교녹취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되었고, 믿음을 가졌는데,
내가 정말 믿음을 가졌다는 증거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혈육과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로.. 내가 거듭나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가 전도하기에 더 좋은 장소인 것 같은데... 떠나라!
아브라함은 이제 더 이상, 인간적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져 버렸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당시 아브람이 살았던 갈대아(바벨론)의 우르는.. 아주 번영한 큰 도시였고,
그 도시에서 주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하시며 얼마든지 살 수 있었을 터인데..
그리고 전도할 사람도 얼마나 많았겠는가? 큰 도시였으니..
자기 친척 아비 집 사람들만 전도해도..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셨는가?
왜 삭막한 광야에서 살게 하셨는가?
비상식적인 조치였다.
그 이유는.. 그가 의지할 인간적 근원을 다 끊으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자기 의지로 삼으라>는 뜻이다.
▲애굽이 더 좋은 장소인 것 같은데... 애굽을 떠나라
히브리 사람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그 당시에 세상의 중심지는 애굽이었다.
이왕이면 큰물에서 고기를 잡아야..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될 터인데..
하나님이 애굽에서 살던 히브리 백성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며, 큰 은혜를 주셔서
그들이 세계 중심지 애굽 가운데 살면서
언약 백성의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가?
왜 광야로 내몰아서, 40년을 지내게 하셨으며,
애굽보다 훨씬 작은,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하는 백성>이 되기 원하셨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애굽을 떠나,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가야했다.
▲요셉은, 가나안을 떠나서 애굽으로 갔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편애해서
요셉은 가나안 땅 아버지 집에서 너무 편하게 잘 지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할 여건이 안 되는 것이다.
너무 사랑만 듬뿍 받으니까..
요셉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아도, 사는데 별로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 하나님은 사정없이,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게 하셨다.
그리고 거기서 <간절히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셨다.
보디발의 집에서, 그리고 시위대 감옥에서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했다.
아니, 이왕에 요셉과 함께 해 주실 것 같으면,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 함께 해 주시든지,
아니면, 형들이 자기를 인신매매로 팔아넘길 때, 그 때 함께 해주셔서
그 순간을 면하게 해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요셉이 무고하게 애굽으로 종으로 팔려갈 때.. 뻔히 보고 계시고,
사태가 더 악화되어 감옥에 갇히게 될 때도.. 두 손 놓고 방치하시다가,
상황이 나쁘게 다 저질러지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 ... 이게 무슨 말인가, 약 올리시는 건가?
하나님의 일관된 목적은,
자기 종으로 쓰실 사람은,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하는 상황>으로.. 그들을 거칠게 몰고 가신다.
그래서 <간절히 주님만 의지하는 법>을.. 자기 몸으로 터득하게 하신다.
▲제/설교자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은, 이스라엘에 살았던 5년간이었다.
거기에 제가 아는 사람, 그래서 위급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곳 한인사회에서, 저를 집요하게 괴롭힌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5년 동안이나 나를 거기서 힘들게 했다.
결국 5년 만에, 제가 이스라엘을 떠나기 전에, 그와 화해하기는 했지만,
정말 이스라엘에서 지낸 5년간은.. 괴로움의 연속이었고,
그 상황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주님만 간절히 의지하게 되었다.
주님이, 나를, 아무도 의지할 데 없는 극한 환경 속으로 몰아넣으신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하지 못하도록.. 훈련시키신 것이었다.
저는, 이스라엘에 살 때,
아예 광야 언저리(가장자리)에 집을 정했다.
예수님이 시험 받으셨던 그 광야..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 다녔던 그 광야..
그 광야 근처에 살면서, 나는 그 분들을 묵상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살았던 광야를.. 제가 체험했다.
광야는 얼마나 삭막하고 고요한지..
벌레 지나가는 소리도 다 들릴 정도였다.
거기엔 ‘주님과 나밖에’ 없었다.
내가 의지할 분은, 내가 기댈 곳은, 오직 주님 밖에 없었다.
나는 거기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는 법’을 훈련할 수 있었다.
▲여러분이 정말 믿음의 사람인지.. 테스트 할 수 있다.
어떤 극심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완전히 사면초가에 몰렸을 때,
내가 주변에 사람을 찾아다니는가?
아니면 딱 주님과 독대해서, 주님만 간절히 의지하는가?
- 그것을 알아보면 된다.
그런데 보통 사람은, 누구나, 사람을 의지하게 되어있다.
친척, 동창, 교회식구, 지인, 인맥 등 .. 언제나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특단의 훈련을 시키신다.
위에서 열거한 아브라함, 히브리 백성, 요셉처럼
절대로 사람을 의지할 수 없는 환경으로, 절박한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으셔서
오직 하나님 한분만 철저히 의지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바꿔버리신다.
체질 개선을 시켜버리신다.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후원자들에게 정기적으로 기도편지newsletter를 써서 보냈는데,
가끔씩 그가 기도편지를, 고의적으로 빼먹고 보내지 않을 때가 있었다.
자기가 재정적 위기를 겪고 있었을 때,
즉 후원금이 고아원에 필요한 액수보다 적게 모여졌을 때,
오히려 더 긴급하게 기도편지를 보내서 모금을 요청해야 될 상황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기도편지를 고의로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 기도편지에,
만에 하나라도 ‘헌금 좀 해 주세요’라는 뉘앙스가 묻어 나올까봐..
지금 재정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게 될까봐..
다시 말해서, <오직 하나님만 철저히 의지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사람의 도움을 의지하게 될까봐...>
그는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게 될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도편지를 일부러 보내지 않았고,
그 정도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을,
자기 스스로 철저히 지키며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서, 저도 이스라엘에 지내는 동안에
제 사역을 알리는 기도편지만을 쓰려고 노력했다.
조금이라도 ‘후원을 해 달라’는 뉘앙스가 비춰질까봐
기도편지를 다시 쓰고, 또 다시 고치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기를 꺼려하시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기도편지를 쓸 때,
‘내가 사람을 얼마나 의지하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역ministry을 하지만, 사람을 철저히 의지하는 사람이 있고,
사업business을 하지만, 하나님만 철저히 의지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前者는, 겉모양은 사역이지만, 속 본질은 사업이고,
후자後者는, 겉모양은 사업이지만, 속 본질은 사역이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시94:9
이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나의 모든 문제, 모든 필요, 모든 간구를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께 아뢰어서 응답받겠다는..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의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
▲인간적인 정도 다 끊어라!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조카 롯이 마치 자식처럼 친근했고,
특히 조카 롯은, 하란의 아들인데, 하란은 일찍 죽었다. 창11:27~28
그래서 조카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서 떠난 것이고, 그를 아버지처럼 대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롯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안정감을 누렸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아브라함에게는 정affection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정’情이란.. 친한 사람에게서 느끼는 감정적인 안정감이다.
그러나 그 ‘정’도,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조카 롯을 떼어내셨다.
롯이 소돔 쪽으로 떠나가도록 허락하셨다.
(사실이 그렇다. 자녀/배우자/가족/친구를
도가 지나치게 너무 사랑하는 것도..
온전한 하나님과의 교제와 섬김에 방해가 된다.
감정적인 안정감이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affections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
And they that are Christ's have crucified the flesh with the affections and lusts. KJV
여러분, 정과 욕심 중에서
‘욕심lust’은 못 박기 쉽다. 그것은 죄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affection’은 못 박기 어렵다. 그것은 죄라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따듯한 사랑’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의 ‘정affection’도
그것을 통해 자신이 안정감을 누리려고 한다면.. 어떤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정affection’에 휩싸여서, 주님을 바라보는 일을 게을리 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그랬다는 것이다.
조카 롯 때문에.. 그 ‘정affection’에 끌려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을 소홀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본토/친척/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한 이후로 ‘본토와 아비 집’은 떠났으나
‘친적-롯’은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정’ 때문이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강제적으로, 롯을 떠나가도록 하셨다.
아브람과 롯의 종들이 서로 다툼을 일으켰을 때.. 아브람은 롯을 떠나보내 준다.
하나님만 간절히 바라보고, 주님만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로는 인간적인 ‘정’도 다 끊게 하신다.
‘부모를 향한 정’, ‘자녀를 끔찍이 아끼는 정’, ‘친구 간 우정’등
그것마저도, 하나님만 간절히 의지하는데 방해/우상이 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은 끊게 만드신다.
아래 관련 글을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 더 읽으실 분 ...............................
▲신20장에, 전쟁에 관한 규례가 나온다.
20:1, 적의 말과 전차와 군대가 아군보다 더 많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마라.
20:5, 새 집을 짓고, 아직 들어가 살지 못한 사람은.. 면제. 집으로 돌아가서 살아라.
20:6, 포도원을 가꾸고 열매를 아직 맛보지 못했으면.. 면제. 귀가해서 포도를 맛봐라.
20:7, 여자와 약혼하고 아직 결혼하지 못했으면.. 면제, 귀가해서 결혼하라.
세상에 만약 이런 군대가 있다면, 다 망할 것이다.
그 이유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주실 것이기 때문에 신20:4
자기 힘으로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반드시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평소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어 있을 때.. 이런 일이 가능하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즉 ‘믿음의 삶’을 평소에 살면
전쟁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싸워주실 줄.. 확실히 믿기 때문이다. ▣ 믿음론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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