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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 부대는 포용력 2453

LNCK 2010. 5. 16. 08:40

◈새 포도주 부대는 '포용력' 의미                    마9:14~17              가톨릭글 스크랩, 편집



▲아래 글의 요지


1.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씀과    마9:14~15

   <금식>에 대한 말씀이 본문에 연결되어 있는데,  마9:16~17

   그 둘의 연관성을 살피고.. (종종 우리는 둘 중 하나만 따로 떼서 가르칩니다)

 

2.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님과 함께 교제에서 오는 기쁨’이며


3. 금식의 필요성.. 그 교제가 멀어지고, 그래서 기쁨이 사라졌을 때는.. 금식해야!


4. ‘새 부대’의 의미를 오해하면.. 이 말씀이 남을 내리치는 ‘도끼’로 오용됩니다.

 

(적용은 약하지만, 일단 성경 해석 쪽에 무게를 두고 스크랩했습니다.)



▲마9: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금식은.. 유대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중요하게 지키는 계율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과 방불할 정도로..

유대교인들은 금식에 치중했고,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1주일에 2번이나 금식할 정도였습니다.  눅18:12


(여기서 금식은 ‘아침 해 뜰 때부터 저녁 해 질 때까지’ 금식하는 것.

지금도 회교도들은 라마단 기간에 그렇게 금식합니다. 해 지고 나면 먹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보니까.. 이거 보통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위 14절과 같이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


유대인들의 금식은 율법의 규정입니다. 율법의 명에 따라 음식을 끊었습니다.

이후 금식은 조상들의 <전통>이 되어 누구나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금식의 이유’에 앞서.. 금식 자체에 매달리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입니다.

목적 없는 금식은 ‘이유 없이’ 육체를 괴롭히는 고통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9: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금식의 때’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고 하셨습니다.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을 때는 ‘당신의 일’을 하자는 말씀입니다.


금식은 하나님께로 가는 수단입니다. 음식을 절제함으로써

주님께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 ‘보조 수단’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니

금식할 이유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함께 계시는 날은 잔칫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임재를 모심으로써, 내 인생의 날을 ‘잔칫날’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고 했습니다. 삶은 늘 축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흔들리고 신앙생활이 힘겨워질 때는.. 사순절이 아니더라도 금식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다시 힘을 주십니다. 다시 임재해 주십니다.

예수님과 연관된 금식은 언제라도 은총입니다.


<적용>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그래서 기쁘다는

그 임재 체험을 과연 일상 안에서 얼마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신자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권리(즉 금식)를 계산하기 전에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그 기쁨이 가장 우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생동감 있는 신앙의 기쁨을 맛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나한테서 그 기쁨의 원천인 ‘신랑’을 빼앗아 가는 실체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그분을 내 삶에서 누군가에게 빼앗길 때,

즉 내게 임재의 기쁨이 사라졌을 때,

그때는 마땅히 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의 의미를 모르고,

    그저 종교적 규율로서 금식 하고 있었고, (금식의 필요성도 모르고 금식했고)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임재를 빼앗기면서도 금식을 안 하고 있습니다.

    (금식의 필요성이 있음에도, 금식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아래 구절과 같은 내용이므로, 아래 구절에서 그 의미를 살펴 봅니다.)


▲마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


어떠한 행동이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것이겠습니까?

근본은 새로운 출발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시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포용력을 갖고 시작하라.’는 것이지요.


‘새부대가 (낡은 부대보다) 좋다’는 뜻이기 보다는,

새 포도주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새 부대로서의 포용력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 부대는 ‘포용력’입니다.


    이 본문 말씀을 ‘포용력’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 ‘오래된 포도주와, 오래된 포도주 부대’로 규정하고

    다 잘라버려야 한다는...

    (잘못된 의미의) ‘개혁’의 근거 구절로 남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의 교훈을 거슬러 볼 때,

    그런 식으로 남을 잘라내는 개혁을 해서.. 한 번도 잘 된 적이 없었습니다.

    몇 년 후에, 자기도 결국 새로 등장한 개혁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 이 말씀을 <포용력>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남을 찍는 도끼로 둔갑합니다.


▲그러면 문맥을 통해, 이 말씀을 이해해 봅시다.

<새 포도주 부대>를 <금식>과 연결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율법에서 명하는 ‘금식’도... 전통과 매너리즘에 젖어 생각하지 말고

새롭게 고민해 보라는 말씀이지요.

‘새 포도주 부대의 포용력’으로 생각해 보라는 것이지요.


헌 부대는, 오래된 포도주밖에 받아들일 수 없지만, (새 포도주는 부대가 터지니까)

새 부대는, 오래된 포도주, 새 포도주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임금은 역사상 처음으로 제국을 건설합니다.

로마 제국보다 500년 앞선 일입니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모든 나라의 종교와 문화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을 바빌론의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는 것도 허락하였습니다. 엄청난 포용력입니다.

아니, 그러한 포용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고레스는 ‘페르시아’라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금식’을 포함해서 예수님의 복음은

새로운 것이므로

과거의 잣대를 가지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이스라엘의 협소한 종교적 관념과 형식에다 맞추어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포용력을 가진, 새 부대가 됩시다.

그래서 새 포도주, 오래된 포도주를 모두 다 받아들여도,

터지지 않는 가죽부대가 됩시다.


    만약에 ‘조상 제사’ 문제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음식은 그대로 차려 놓고, 그 앞에서 절은 하지 말고,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과일이라도 깎으면서, 조상을 기억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조상 추모’를 너무 간편하고 무성의하게 하는 것도

    그렇게 썩 좋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 크리스천 인격   

 

..................................................

 

이런 사전 지식을 가지고, 다시 아래 구절을 해석해 봅시다.

 

▲마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생베- 새포도주,        낡은 베-오래된 포도주

새 옷-새 가죽부대,    낡은 옷-오래된 가죽부대 ... 이렇게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는 뜻은

'새 포도주를 오래 된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다'는 뜻과 같습니다.

 

그 결과도 똑같습니다.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고',

'새 포도주가 그 가죽부대를 당기어, 부대도 버리고, 포도주도 쏟아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고, 또한

생베, 새포도주와 같은 복음을 담으려면.. 새 옷, 또는 새 가죽부대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새것과 옛것을 모두 다 포용할 수 있는, 포용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