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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의 참 뜻 2367

LNCK 2010. 5. 25. 21:48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의 참 뜻                  마16:21~25                  09.10.25.설교녹취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내 기독교 신앙이 흔들리는 것은,

그 첫단추인 '신앙고백'부터가 잘 못 꿰어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가르치는 신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모두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데,

예수님이 주님/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서

나는 변두리 인생으로 물러나도 좋은지..?

내가 전혀 주목받지 못하는 인물로서, 배경에 머물러 살아가더라도..

나는 정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 다같이, 이 문제를 통해 자신을 깊이 성찰해 보자고.. 제가 질문을 던졌는데,

한 주간이 지나서, 한 신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제가 교수님의 질문을, 지난 한 주간 동안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맡은 교회 부서의 사역과,

    또한 제가 참여하는 교회 바깥의 여러 단체의 활동 들,

    또한 학교에서 활동하는 동료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그 문제를 놓고 볼 때..,  

    

    제가 그 모든 모임에서, 모두 주역은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장차 언젠가는 그 모임의 주역이 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비전들을 다 포기하고,

    내가 ‘주변인’으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면,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있는 듯/없는 듯한 존재로 살아간다면,

    현실적으로는 ‘자신이 깊은 침체감 속에 빠질 것 같다’고... 고백했다.


▲‘만약 주만 그리스도시오, 나는 주변인으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면,

내가 무슨 의미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우리 모두의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도, 예수님의 도움으로 

나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하고,

내가 모든 일에 중심이(우두머리가) 되어보고자 하는 일이 아닌가?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내가 중심이 되는, <내 나라>도 동시에 세워보고자 하는 그 욕구가

내 속에서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그렇다.


바꾸어 말해서,

내가 덩달아 출세하지 못하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어쩌면 내게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랴 하더냐?’ 마16:13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14


사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로(세례요한으로, 선지자로) 믿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엘리야, 세례요한, 선지자’처럼 되어주기를 바라는

그들 마음의 바램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엘리야 선지자는, 구약의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은 기적을 행했고,

세례요한도 압제자 헤롯에 당당히 맞선 것처럼,

예수.. 당신도 그런 역할을 해 달라는.. 사람들의 바램이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 백성들의 바램에 대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다시 물으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베드로는 매우 분명하고 단호하게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라고 대답했다.

‘당신은 또 다른 세례요한, 또 다른 엘리야가 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조상 때부터 그렇게 기다려왔던 메시야,

바로 그리스도가 되셔야 합니다!’


베드로의 고백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바

그런 그리스도가 되셔야 합니다.’ .. 이런 바램이었다.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해석’이

    오늘날 교계에서 많이 왜곡되어 있다고 본다.

    즉, 베드로가 대답을 잘했다고 가르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절반만 잘 한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아주 틀린 대답이었다.


    이건 심각한 문제이다. 신앙의 첫 단추(신앙고백)부터 잘 못 꿰어질 수가 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아래에 계속 설명)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반응하신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있고난 이후 

그때부터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미를 설명해 주신다.


즉,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 대제사장, 서기관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며,

3일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마16:21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명이요, 의미였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 

 

베드로는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제자와 스승과의 관계가 무색할 정도로

예수님을 꾸짖고, 막 언성을 높여서 예수님께 대들었다.


‘그러고도 (십자가에 못 박히고도) 당신은 그리스도란 말입니까?

우리가 기다리던 그리스도는, 그런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마16:22


만약 당신이 그런 식의 그리스도라면,

지금 유대의 이 궁핍하고 억압받는 현실은, 어떻게 해결될 것입니까?

 

그런데 당신은 그런 현실은 깡그리 외면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고요?

그래서 의인의 죽음을 선택한다고요?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절반은 잘 해서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지만, 16:17

절반은 완전히 엉터리 대답이었다.


행1장에서 보여주는 대로, (‘이스라엘 나라가 언제 회복될 것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줄은 알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엉터리였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정복자 그리스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두 개념은 180도 정 반대다.

그래서 그의 대답은 ‘절반은 맞았지만, 절반이 완전히 틀린’ 대답이었던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대답을 잘 했지만,

그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정복자 그리스도’였지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는 아니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단호하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베드로를 꾸중하셨는데... 16:23


▲베드로의 얘기는, 다름 아닌 오늘날 내 얘기가 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사실에 대해

너무 편파적이고,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그 사실을 믿는 우리는 영혼이 구원받고 천국에 간다.

그리고 이 땅에 살 동안에도, 전능하신 그 분이

우리를 이 땅에서 주인공으로, 성공자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시다.’

성도들은 그런 가르침을 매우 좋아하는 듯하다. '그리스도'를 그런 식으로 믿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 경쟁사회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로... 우리가 믿고 있다.

우리의 그런 믿음과 신앙고백은, 베드로와 매우 흡사하다.


즉,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경쟁적인 세계 속에서, 나를 중심에 서도록 해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에게 실패는 없다.

머리가 될지언정 결코 꼬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증거가 사방에 있지 아니한가? 실제로 여러 간증들을 들어보시라.

재벌의 간증, 스포츠 스타의 간증, 심지어 코메디언의 간증도 등장한다.

그 간증들은 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아닌 '정복자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았다는 간증들이다.


그 간증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은 흥분한다. 열광한다.

‘내 모습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데.. 나도 그리스도를 믿으면.. 보란 듯이 성공할 수 있겠구나!’


사람들이 이런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을

전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문제는.. 거기에 ‘십자가가 쏙 빠져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십자가가 빠진 성공과 축복만 구하는 것은.. 반기독교적이다. 이것은 샤머니즘이다. 


베드로의 이런 입장에 대해, 예수님의 태도는 매우 단호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베드로는 순간 사탄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본문의 대화를, 왜 특별히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일으키셨는지,

저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에서 동북쪽으로 40Km 떨어진 곳인데,

여기에 헤롯빌립 왕이 로마 황제 가이사를 신격화하기 위해 세운 거대한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은 그 도시의 산 정상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도시 어디서든지 이 신전을 바라볼 수 있었다.


    고대 신전이 대부분 그렇듯이,

    어마어마한 대리석 기둥들이, 신전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 아름답고 웅장한 신전 건물의 모습을 보노라면,

    누가 감히, 이 엄청난 로마 황제의 권위 앞에 도전할 수 있었을까?


    추측컨대,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본문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 거대한 신전이, 그들의 배경으로 떡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아마 의도적으로 그런 자리를 선택하시고,

    제자들에게 물으시는 것이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랴 하느냐?’ 그 말씀을 풀어 설명하면 이런 뜻이다.

 

    ‘제자들아, 너희들이 저 웅장한 신전을 보고 있느냐?

    사람들은 그곳에 머리를 조아리며, 헛된 세상 영광/축복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나를 누구로 믿고 있느냐?

    가이사 같은 정복자 그리스도냐, 아니면 어떤 모습의 그리스도냐?’  마16:15      주1) 


▲지금의 예수님 신분과, 당시 예수님의 사회적 신분은.. 한참 달랐다.

당시 예수님은, 돈을 쌓아놓고 계신 부자도 아니시고,

단 한 사람도 자기 권력으로 휘어잡으실 수 없는

무명의 목수(노동자)요, 나사렛 시골출신 청년이었다. 학벌도 무학이었다.

지금처럼 온 세상의 존경을 받는 그런 그리스도가 아직 아니셨다.

 

그런 예수님이, 거대한 가이사를 숭배하는 신전 앞에 서서 도전하고 계신다.

(사람들은 모두 이 신전에 경배하면서, 가이사와 같은 권력과 물질을 갖게 될 것을 기원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극적인/대조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사실 제자들은 이때 매우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기는 했지만,

이 어마어마한 가이사의 권력과 그를 찬양하는 웅장한 신전을 바라볼 때

상대적으로, 그런 세상에서 주변인으로 밀려난, 자신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왜소하게 느껴졌을까?


그런데 자기들 앞에 서 있는 예수는, 자기들의 전 희망이 걸린 예수는 

세상적으로 볼 때,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졌을까?

그런데 고작 하시는 말씀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겠다니...' 이게 될 말인가?


▲그렇지만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약간의 희망을 걸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병자들을 고치시고, 5병2어로 수 만 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는가 하면, 많은 군중들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마음속 깊은데서 터져 나오는 '자기 생각'이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로마 권력, 어떻게 이것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을까?

그래서 바로 당신이 힘과 권력을 가진 그리스도가 반드시 되셔야 합니다.

당신만이 그리스도가 되셔서,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은, 아주 큰 희망이 담긴 내용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희망과 비슷하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지금 어떤 우상, 어떤 신전 앞에 서 있는가?

   어떤 세상의 도전을 받고 있는가?


▲1996년 8월, 하버드 대학교 하비 콕스 박사가 내한한 적이 있었다.

연세대학교에서 공개강좌가 있었고, 제/설교자가 거기에 참석해서 들었다.


그 강좌의 후반부, 질의응답 시간에

한국의 신학자/목회자들이 하비 콕스 박사가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가정하고

‘종교다원주의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입장’에 대한 질문을 막 쏟아냈다.

그것에 대한 하비 콕스 박사의 개인적 견해를 묻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당신은 거듭난 크리스천입니까?’ 라는 식의

인신공격성 질문도 일각에서 터져 나왔다.

일부 청중은, 그 분의 강의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그를 공격하러 온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大학자답게,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조목조목 차분하게 대답해 나갔다. (그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주2)  

그 질문에 하비 콕스 박사는 이렇게 답변했다.


‘여러분,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맹렬하게 도전하는 우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여타 다른 종교들이 아닙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오늘날의 쟁점이 아니라는 뜻


정말 심각한 우상은.. 현대의 ‘맘몬주의’입니다.   *물신物神숭배사상

오늘날 기독교를 심각하게 도전하는 것들은, 

물질주의, 상업주의, 과학만능주의들이며,

그것들이 오늘 나 자신에게, 교회에게, 맹렬하게 도전해 오는 것을..

여러분은 그 심각성을 깨닫고 계십니까?


적어도 한국교회는 그렇게 되지 않을 줄로 제가 기대하지만,

지금 미국교회는.. 사실 그 맘몬주의가 지금 큰 도전이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 속임수를 눈치 채야 하며,

그것이 대단히 무서운 우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에 과감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헛된 세상 영광을 구하는 수단밖에 되지 못합니다... 라고 그는 지적했다.

(참으로 선지자적인 예견이었고, 오늘날 우리는 이 문제로 심하게 골머리 앓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

또한 오늘날 우리의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신앙고백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박사께서 우려한 것이 무엇인가?

 

주님이 그리스도(전능하신 분)이시라면,

내가 출세를 원해서 기도하면, 출세도 시켜주시고,

내가 물질을 원해서 간구하면, 물질도 좀 넉넉하게 허락해 주시는

‘그런 전능하신 그리스도가 되어주세요!’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


- 베드로의 신앙고백에는, 이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고 본다.


본문의 문맥을 보면, 사실 이런 의미가 상당히 내포되어 있다.

이 대화 이후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으신 것을 보면,

베드로가 생각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전능하고, 세상적인 힘이 많은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도, 베드로와 똑같이 신앙고백 한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소원을 다 들어주시는 <기복적 신앙의 대상인 전능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이런 고백을 예수님이 기뻐하실 리 없다.

예수님은 그러한 고백을

‘사탄적인 것’으로 규정하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재차 가르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마16:24~25


▲상식적으로는, 베드로의 생각이 옳다.

베드로의 논리는 아마 이런 것인데, 상당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아니, 메시아 왕국을 세우는데, 우리가 다 죽어버리면, 과연 누가 세운단 말인가?’


내가 중심적인 인물이 아니라면,

내가 출세하고 성공하지 않으면,

심지어 내 존재가 없어진다면

그리스도 왕국(하나님 나라)이 어떻게 세워지겠으며,

내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말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반문했을 것이다.


   사실 베드로처럼, 오늘날 우리 중에 많이 그렇게 믿고 있다.

   전도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려면,

   일단 내가 먼저 성공하고, 출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내가 십자가에 죽어서는.., 뭐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나를 통해, 무슨 역사가 일어나려면,

   내가 먼저 복 받아 잘 되고, 번듯하게 성공해야 한다고.. 그렇게들 생각한다. 


   문제의 핵심은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빠진 복음, 십자가 없는 신앙고백.. 그게 바로 ‘사탄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해 보면

우리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를 드려서(십자가에 죽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일(십자가)에,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초대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능력이 공개적으로 드러날 때가 있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실 때였다.

그때 예수님은 종종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

‘(이 기적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아라’


그 이유는, 그게 그리스도의 진면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으로 투사하여 예수님을 바라볼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예수님이 공회 앞에 서 계실 때였다.

그 공회에 끌려가서,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묻는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이때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말씀하셨다.

‘맞다. 내가 그리스도다’


그 순간 예수님은, 아주 무기력한 모습이셨다.

십자가를 앞두시고,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시지 않으시고,

죄인처럼 붙잡혀서 재판정에 서신, 철저히 비참하고 무능한 모습이셨는데,

그제야 예수님은 비로소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시고, 그 연약한 자리에서

당당히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의 전략과, 예수님의 전략이 180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탄의 전략은, 내가 먼저 살고, 그 다음 너도 사는 것이다.

내가 존재해야, 그 다음에 너도 존재할 수 있다.

내가 먼저 잘 되어야, 그 다음에 너도 잘 될 수 있다... 이런 식이다.

세상의 경쟁사회에서 내가 먼저 승리하고자 하는, 세상의 이기적인 논리와 똑 같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라도 만나면,

‘나의 안정’에 대한 욕구 때문에

힘으로나, 위협적 태도나, 물리적 힘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한다.


그가 친구든지, 사업 파트너이든지,

동역자이든지, 심지어 배우자이든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내가 그를 이기고,

내가 중심적인 인물이 되어야 하고,

그는 내 주변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경쟁에서 승리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서, 세상을 얻으려고 한다.

이것은 사탄이 사람들을 끌어가는 방식인데,         *남을 죽이고 자기가 사는 방식

십자가를 믿는다는 성도들도.. 실제로 다들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남을 정복하기 원한다.

 

    오늘날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본문의 베드로 수준’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을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시며, 크게 꾸짖으실 것이다. 



▲상식적으로 옳은 그 방법으로는.., 결국에 망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다. ‘네가 살고자 하면.. 너는 죽는다!’ 마16:25


그런 남을 죽이고 자기가 사는 방식으로 세상에서 잠깐 승리할지 몰라도

결국은 자기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경고하신다.


자기 영생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생에서도, 결국은 존경과 승리를 잃게 될 것이다.

이생과 영생에서 모두 생명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현실 세상에서 우리가 실제로 늘 보고 있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다가, 결국은 자기도 죽고 만다.

그러나 우리도 마찬가지다. 늘 현실적인 방식을 택하다가, 결국 내가 사탄처럼 되고 만다.)


    내가 먼저 살아야 하고, 내가 중심적 인물이 되어야 하고,

    내 삶이 먼저 잘 되어야, 하나님 나라도 어떻게 해 보겠다는 사람은,

    결국은 자기도 망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는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없게 된다. 


 

▲결론 : 그러므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예수는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이시며,

자기도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겠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지난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당대에는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 일은, 대부분 묻혀져 있고, 가려져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일은 철저히 ‘십자가에서 죽은’ 일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른 일은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는지.. 나중에 결국 드러나게 된다.

죽고자 했는데.. 결국은 살아나더라는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바로 그런 소망을 갖고서

오늘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자기 죽음’의 길을 따른다.

한 알의 밀알로서.. 자기를 죽이는 방식으로.. 복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이 올바르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 길을, 자기도 기꺼이 따르겠다는 고백인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살고자 하는 자들은 죽고, 죽고자 하는 자들은 살 것이라고...


............................................ 더 읽으실 분 ..........................................


▲설교 서두에 나오는 일화  

2009년 10월에, <전국기독교학회>가 대전에서 열렸다.

전국에 수 백 명의 신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거기 개회예배에서, 장로교 통합교단의 영향력 있는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설교 중에, 요즘 국회의원들이 정치를 잘 못 한다고 쓴 소리를 약간 하셨다.


그 설교에 이어서, 한 크리스천 국회의원께서 나와서 축사를 했는데,

그 분은, 축사 중에,

앞서 설교하신 목사님의 ‘정치권에 대한 쓴 소리’가 마음에 걸렸는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국회의원 299명 중에, 크리스천이 142명(47%)입니다.

    그 국회의원들이, 누구로부터 신앙적인 영향과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바로 이 자리에 앉아계신 여러분들을 통해서 배운 사람들이고,

    그 분들은 국회의원이면서도, 지금 지역교회에서

    이런 저런 직분을 맡아서, 수고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내용인즉, 그들 국회의원들이 혹시라도 잘 못 하는 게 있으면,

무조건 비판만 할 수 없는 것은,

크리스천 국회의원들이 다 교회에서, 오래 동안 설교를 듣고 배웠으니,

그들이 혹시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들의 탓만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교회에서 잘 못 가르친 것의 결과가 아니겠느냐?’... 라는 요지였다.


    저는 그 국회의원의 뼈있는 ‘축사’를 통해서,

    과연 오늘날 우리 교회가 무엇을 잘 못 가르치고 있으며,

    성도님들은 과연 무엇을 잘 못 배우고 있는가... 그것을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그런 주제로.. 오늘 제 설교를 풀어나가려고 한다.


    오늘날 많은 수의 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어떤 ‘고상한 취미활동’의 일환으로,

    주일날 교회 가는 것을 ‘우아한 엔터테인먼트’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우리 교회가 잘 못 가르치고 있다는 것인데...


 

    주1) 제/설교자가 그리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즉, 바울이 아테네에서 설교했던 곳을 답사한 적이 있다.


    제가 그 동산의 아레오바고에 올라가서 보고 깜짝 놀랐다.

    약간 떨어진 그 뒤편에는, 어마어마한 파르테논 신전이 떡 버티고 있었다.

    그 신전이, 그 육중한 기둥의 위엄을 자랑하면서 뒤에 버티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건물의 외형적 위엄에 눌려서, 압도당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바울은 오히려, 그런 우상과 신전 앞에서 쩔쩔 매는 사람들을 보고서, 울분이 터져서

    그래서 열심히 (아마 고함치며) 복음을 전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레오바고에 모인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십자가의 복음’에 귀를 기울였을까?

    뒤에 버티고 있는 웅장한 파르테논 신전과는, 너무 비교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바울의 복음이..                                                                   ▣ 믿음론 (순종)  

 

 

   주2) 그 질문들 중의 하나는,  

   '당신은 기도를 마칠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왜 말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을 빼먹는 기도는.. 정통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바로 직전 시간에, 하비 콕스 박사가 대표기도로 강의를 마치면서, '예수님 이름으로..'를 빼고 기도를 마쳤다.

 

   그 질문성 공격에 대한 박사의 대답은 이랬다. 

   '초대교회  2~3세기까지 교부들의 문서를 살펴볼 때, 그들은 기도 끝에 '예수님 이름으로..'라는 문장을 넣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라고 기도를 마치는 전통은

   적어도 4~5세기가 지난 이후에, 교회에서 생겨난 전통이지..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핵심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박사는, 여러 가지 질문에 조목 조목 <학술적으로> 답변을 이어갔다.

    그 질문과 대답에서.. 사실은 학문적 깊이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강의가 끝나고 나서, 어떤 사람이 사석에서 박사께 이렇게 말을 건넸다.

    You've knocked them out!  (박사님이 질문자들을 다 KO시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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