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추적자 요10:1-6 06.03.05.설교스크랩
▲이 설교문의 주제
저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저희를 찾으셨군요.
저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저희를 사랑하셨군요.
마지막 순간까지 저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으시고 부르시고 이끄시는군요.
‘먹잇감을 결코 놓치지 않는 사냥개처럼!’ (좋은 뜻으로 이해해 주세요)
오, 주님!
저희를 도우시어
언제나 주님의 음성에 민첩하게 응답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향한 근원적인 갈증을 가진 인간
▲우리가 무엇을 갈망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과거에 그 '무엇'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사랑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 사랑을 잃고 난 후 사랑을 갈망하게 됩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그 고향을 항상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건강을 잃은 사람들은 건강을 갈망하게 됩니다.
젊음을 잃은 사람들은 젊음을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겨울에는 여름의 뜨거움을.. 여름에는 겨울의 눈(snow)을 그립니다.
이렇듯 뭔가를 갈망한다는 사실은.. 과거에 그 갈망하는 대상을 가져 보았다는 뜻입니다.
적도에 있는 사람들이 눈snow을 보고 싶어 할 리가 없습니다.
그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동서고금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인간에게는 항상 신God에 대한 동경과 갈망이 있어왔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이 과거에 하나님을 알았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어느 지역, 어느 인종, 어느 문화를 가든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을 추구하고 갈망합니다.
사람들이 신에 대해 부르는 이름도 다르고, 그 신을 찾아가는 방법도 다르지만,
인간은 누구나 절대자(the Absolute)를 찾으려는 갈망을 타고 납니다.
이 갈망이 잘못 표현되면 미신(shamanism)이 되기도 하고,
사악한 종교(evil cults)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제법 차원 높은 종교로 발전되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종교 현상은, 인간이 원래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암시해 줍니다.
마치 모태womb로부터 분리된 아이가 엄마 품을 파고 들어가듯,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나왔기 때문에
늘 하나님을 향하는 근원적인 갈증(unquenchable longing)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적도에 사는 사람들이 눈을 그리워할 수 없듯,
콜라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콜라를 찾을 수 없는 법이듯,
하나님을 알았던 적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그의「고백록」에 쓴 저 유명한 고백은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당신은 저희를 흔들어서, 당신을 찬양하는 데서 기쁨을 얻게 하십니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 저희들을 지으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쉴 수가 없습니다."
You stir man to take pleasure in praising you,
because you have made us for yourself,
and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rests in you.
▲아마도 자신의 내면을 어느 정도 성찰(reflect)하시는 분이시라면,
자신의 내면에 신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갈망이 있음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그 갈망을 외면하거나 억압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문득 문득 그 갈망은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리고 그 갈망을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끊임없는 내면의 소리에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 내면의 소리는 우리를 향해 말합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인가?
저 깊은 곳에 텅 비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그 공허감을 그대로 둘 것인가?"
적어도 자신을 정직하게 볼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자기 내면의 소리로부터 결코 자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사냥개’ (추적자) ←이 설교문의 제목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시23:6
▲아마도 이 집요한 내면의 소리를 가장 잘 표현한 사람 중 하나가
영국의 비극적인 시인 프랜시스 톰슨 Francis Thompson 입니다.
프랜시스 톰슨은 1859년에 의사의 아들로서,
영국의 아주 독실한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신부①로 만들기 위해 신학교에 보냈지만,
그는 18세에 신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퇴학을 당한 이유는 게으름이었습니다.
톰슨은 신부의 꿈을 접고, 의사②가 되기 위해 공부를 다시 시작했으나,
번번이 의사 시험에서 낙방하면서, 아편opium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국 의사 시험도 완전히 포기하고,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있던 시인③의 꿈을 안고 런던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숙자homeless④로 방황하며, 아편에 더 심하게 중독되었습니다.
간헐적으로 정신이 들 때마다 그는, 쓰레기통에서 주운 펜과 넝마쪽지에
떠오르는 시상을 끄적이곤 했습니다.
그렇게 써서 모은 시집이, 윌프리드 메이넬 Wilfrid Meynell의 도움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 시집에 실린 시 중 <하늘의 사냥개 The Hound of Heaven>라는 한 편의 시가
프랜시스 톰슨을 두고 두고 기억되게 만들었습니다.
그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밤과 낮의 비탈길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세월의 아치 저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내 마음의 미로로.
눈물의 안개 속으로,
웃음의 시냇물 속으로
그를 피해 숨었습니다,
나는 조망이 활짝 트인 희망의 가로수 길로 달려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밀침을 받아 거대한 공포의 심연 속으로
쏜살같이 거꾸로 떨어졌습니다,
쫓고 또 쫓아오는 저 힘찬 발을 피해.
그러나 서두르지 않은 추적으로,
침착한 보조로,
계산된 속도로, 위엄 있는 긴박성으로,
그 발소리 울렸습니다.
그리고 발보다 더 급한 한 목소리 울렸습니다.
"네가 나를 등지기 때문에.. 만물이 너를 등지는 것이다."
▲이 시는, 자신이 신의 낯을 피해 달아나는데도 불구하고,
그 신이 집요하게 자신을 추적해 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프랜시스 톰슨은 그 신을 사냥개 하운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던 사냥개가 바로 '하운드'였습니다.
'그레이하운드'라고도 하는 이 개는, 공기 저항이 최소화될 수 있는 날렵한 몸매와,
말과 맞먹을 정도의 질주력,
그리고 먹이를 결코 놓치지 않는 특징으로 인해 인기가 높았습니다.
톰슨은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하나님을
하운드 사냥개에 비유합니다.
그 자신은 하나님을 멀리 멀리 피해 달아나고,
하나님은 마치 먹잇감을 추적하는 사냥개처럼 그를 뒤따라옵니다.
결코 앞서는 일 없이, 결코 덜미를 무는 일도 없이,
스스로 멈추어 돌아설 때가지.. 추적하기만 하는 하나님을.. 그는 그리고 있습니다.
▲실로 신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면서
그는 하나님을 피해 다니는 도피자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그런 학생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늦은 나이에 하던 일을 다 접고 신학교에 들어옵니다.
왜 이런 결단을 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피해 다닐 수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또 어떤 학생들은 신학교에 왔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일반 대학으로 갑니다.
그런 학생들을 만나보면,
하나님을 버리고 달아난다는 죄책감이, 그 후로 늘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저는, 그럴 필요 없다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면 다 목회라고 위로하지만,
그 위로의 말로써.. 그의 마음이 깔끔히 정리되지는 않는 듯했습니다.
프랜시스 톰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선택을 합니다.
아편 중독도 하나님을 잊고자 했던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의사 고시에 번번이 낙방한 것을, 하나님이 징벌하신 것으로 해석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런던의 슬럼가로 들어가 노숙자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영원히 피하려 했습니다.
그는 50세도 되기 전에 폐병과 마약 중독의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까지 그는 외형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쓴 시 <하늘의 사냥개>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면,
그의 내면에서는 하나님께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늘의 사냥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인간의 사랑은 그만한 공로가 있어야 받지 않느냐
너는 무슨 공로가 있느냐
엉긴 흙덩이 같은,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거무칙칙한 흙덩어리인 네가?
애석하다! 너는 아무런 사랑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모르고 있으니!
보잘 것 없는 너를 사랑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나밖에는, 단지 나밖에는 말이다.
내가 네게서 무엇을 빼앗았던 것은 너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네가 내 품에서 그것을 다시 찾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네 어린애 같은 착각으로 잃었다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가 너를 위해 집에 간수해 두었다.
일어나서, 내 손을 꼭 쥐고, 가자!
아, 제 곁에 저 발자국소리가 멎었습니다.
제 어두움이 결국
쓰다듬으려고 내민 그분의 손 그림자였단 말입니까?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고. 앞 못 보고, 약하기 짝이 없는 자여,
네가 찾는 사람은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밀어냈기 때문에 사랑도 함께 밀어냈던 것이다."
◑앞서 ‘하운드’로 설명했지만, 성경은.. 목자가 양을 찾는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10:1~6절에 나오는 <양과 목자의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 3절과 4절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음성을 알아듣는다(recognize)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때,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 나섭니다.
목자는 양들을 우리 밖으로 이끌어내어 앞서 가면서
그들을 푸른 초장, 물이 천천히 흐르는 시냇가로 데리고 갑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비유한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요,
살아생전에 그분을 만난 것도 아닌데도,
누구나 내면에서 들리는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그 정체(identity)를 정확히 잡아내기는 어렵지만,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이 아닌, 자기보다 높은 어떤 존재의 음성이 들린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프랜시스 톰슨이 말한 것처럼, 그 음성은
마치 하운드 사냥개처럼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추적해 옵니다.
끊임없이 우리 내면에서, 그 목자의 음성이 들립니다.
▲프랜시스 톰슨이 내면에서 들은 목자의 말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네가 나를 등지니, 만물이 너를 등지는 것이다."
All things betray you, who betrays me.
"네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니 아무도 너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Nothing shelters you, who will not shelter me.
"내게 만족을 주지 않는 네게 아무도 만족을 주지 않을 것이다."
None satisfies you, who does not satisfy me.
"네가 내게서 도망치니까 만물이 네게서 도망치는 것이다."
All things fly you, who flies me.
"너를 사랑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There's none who loves you except me.
"네게서 가장 귀한 것을 빼앗아간 이유는, 네가 내 품에서 그것을 도로 찾게 하려는 것이다."
The reason I took precious things from you is to let you find them again within me.
여러분, 이 말들이 어쩐지 귀에 익지 않습니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표현은 다를지 몰라도, 때때로 마음에서 느끼던 그 느낌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이 목자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임을 압니다.
그 말씀이 진리임을 압니다. 그 음성을 따라가야 함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상하게도 목자의 음성이 아니라
강도와 도둑의 음성을 더 좋아합니다.
내면에서 우리를 죄악과 허무한 것으로 이끄는
미혹하는 자(the deceiver)의 음성을 들으려 합니다...
◑사람들이 목사나 교회를 피하는 이유
▲제가 한국에서 살 때, 제가 살던 아파트의 바로 아래층에
같은 교회에 다니는 교우가 계셨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소속 목사(affiliated pastor)로 있었기 때문에,
목회 활동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분은 목사가 바로 위층에 산다는 것에,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만일에 담임목사가 바로 위층에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성도님은 하루 속히 이사를 가려고 했을 겁니다.
왜들 목사를 이렇게 부담스러워하시는지요!
▲하루는 제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아래층에 사는 여자 권사님과, 갓 결혼을 한 아들 청년이 함께 탔습니다.
그 청년은 어머니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를 본 그 어머니 권사님은 아들을 툭 치면서
"얘, 우리 교회 목사님이셔! 인사해!
아이쿠, 이놈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고 교회를 멀리하나 몰라요.
죄송합니다, 목사님! 얘! 인사하라니까!"
저는 그 청년을 보면서 먼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제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마치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난 것처럼
인상을 쓰고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젊은 사람으로부터 예상치 않은 대접을 받고서,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이 살고 있던 13층까지 불과 1분도 안 되었을 텐데,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요!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그 청년이 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빚쟁이처럼 대했을까?
내가 그렇게 기분 나쁘게 생겼나?’
만일 그 어머니께서 아들에게 "얘, 위층에 사는 아저씨다!"라고 소개했다면,
그 청년은 나이 차이 때문에라도 공손하게 인사를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은 그 어머니께서, "얘, 위층에 사시는 교수님이다" 라고 소개했다면,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상, 더 공손하게 인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얘, 우리 교회 목사님이다"라고 소개하니, 청년은 인상을 구겼습니다.
왜 목사 앞에서 인상을 구기고 고개를 돌렸을까?
▲대답이 나오지 않는 이 질문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언젠가 칼 융Carl Jung의 심리학에 관한 글을 읽다가 해답을 얻었습니다.
심리학 이론에서 자주 말하는 'transference'에 관한 글이었는데,
그분의 해석에 의하면, 그 청년의 태도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청년은 내면에서 들리는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 음성을 들었으나,
집요하게 피하고 거부해 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그 부름을 거부하고,
강도와 도둑의 음성을 따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눈앞에서 목사를 마주했습니다.
그 순간, 그 청년은 마음속에서 들리던 그 음성,
자신이 집요하게 회피해 오던 그 음성의 주인공을 만난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목사를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청년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지난 수년 간 내면의 음성을 피해왔듯이,
저와의 대면을 피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 청년의 태도 때문에 상했던 마음이 풀리고,
그 청년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청년이 더 이상 외면하고 회피하고 도망 다니기를 그치고
목자의 음성에 응답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대접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마음 상해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들이 속히 그들을 부르시는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응답하여
목자를 따르는 양이 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마치는 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Abraham Yoshua Heschel 이 잘 지적했듯,
성서의 일관된 메시지 중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나섰다" God in search of human beings 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부름이 참된 목자이신 하나님의 음성인지를 압니다.
여기까지는 다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여기까지는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우리가 어떻게 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프랜시스 톰슨이 말했듯이,
그 음성을 따라갔다가는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짓누르고,
목자의 음성을 따라 가겠는가?
아니면, 그 음성을 못 들은 체 무시하고
그 목자를 떠나 강도와 도둑의 음성을 따라 가겠는가?
그 결정은, 나의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는 돌이켜라.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거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에스겔33:11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경고의 말씀이 됩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면 생명의 길에 이르고,
도둑과 강도의 음성을 따르면 죽음의 길에 이릅니다. 결과는 이토록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떠나려고만 하는지요!
언제까지 그 음성을 외면하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맴돌고 있겠습니까?
오늘, 그 음성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 전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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