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과 감성의 시인 다윗 시51:1~7 06.04.30.설교스크랩
▲다윗의 예술적 성향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는 우선 하나님이 끔찍이 사랑하셨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용사로서 전쟁에 능한 장군이었습니다.
나중엔 왕이 되어서 자기 백성을 잘 통치했던 유능한 정치가였어요.
그런데 그런 공적인 지위를 빼더라도, 그는 너무나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시인에다, 연주자요, 작곡가요, 안무가요, 건축가요, 연출자였습니다.
정말 일생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한 사람치곤, 너무나 감성이 풍부했던 사람입니다.
다윗의 이런 예술적 성향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존 칼빈은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가련한 가운데 빠져 있는 인간을
위로하기 위하여 예술을 주셨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음악이 없고 문학이 없다면,
또는 미술이나 영화나 연극이나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요?
오늘 우리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배에 음악이 빠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배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예술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그 모든 예술적 감성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어떤 모습이
그를 이토록 신앙적이면서도 감성이 풍부한 예술적 기질의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저는 오늘 거기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다윗의 깊은 신앙과, 풍부한 감성은 잘 듣는 것으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중략 주1)
◑2. 다윗의 영성과, 또한 풍부한 감성은 잘 고백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의 영성과 감성이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둘째는 고백하는 모습으로 무르익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詩로 자기를 표현했던 다윗
시편 150편 중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73편이 다윗의 시입니다.
그런데 그 73편의 시를 다시 분류해 보면,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51편과 3, 17, 18, 31, 39편을 비롯한
거의 절반이 고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생애 중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사건을 모두 시 형태로 남겼는데,
그때 마다 자기 마음을 그대로 다.. 시에 쏟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영성과 감성은
바로 자기 고백으로부터 익어간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 고백, 자기 표현이.. 정신을 건강하게 합니다.
다윗의 생애 중에 가장 힘들었던 때는,
밧세바를 취하려고 그 남편 우리야를 죽게 한 후에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들었을 때일 겁니다.
그때까지 다윗은 모든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왔던 훌륭한 왕이었어요.
그런 그가 무고한 자기 부하를, 특히 온갖 충성을 다했던 우리야를 죽게 했을 때
그는 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그 일을 저질렀어요.
나중에 1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 나단 선지자가 그 일을 심하게 책망합니다.
그때 뒤늦게야 다윗은, 자기 죄를 들여다보면서 하나님 앞에 꼬꾸라집니다.
다윗이 괴로워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도, 1년이 넘도록,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 자기 심성에 경악한 겁니다.
양심이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는 그 사실에 전율한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범죄하고 마는 자기 내면의 죄성에 대해 절망한 거예요.
그 마음을 그대로 내놓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백했던 글이
오늘 우리가 읽었던 시편 51 편입니다.
여러분! 한 번 이 시편 51편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낭독해 보십시오.
다윗의 마음이 전해져 올 것입니다. (낭독)
벌써 1년이 넘었군요. (이 설교문은 2006년 4월경)
작년 이맘 때, 제가 좋아했던 영화배우 이은주 씨가 자살을 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접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죽음으로 몰고 갔던 그 상황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만큼은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그렇게 죽겠으면, 좀 누구한테 얘기라도 하지,
왜 그걸 혼자 갖고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 속내를 털어놓을 대상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쉽게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고백이 습관이었고, 그의 고백들이 모두 작품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다윗의 삶과 시편을 연구해 보면, 그는 고백이 습관화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그의 생활의 일부였다는 거예요.
그게 그의 시로, 음악으로, 건축으로, 예술로 활짝 꽃을 피운 거지요.
▲로마인의 부부싸움 해결법
시오노 나나미의「로마인 이야기 1권」에 보면
부부싸움의 여신 비리프라카 얘기가 나옵니다.
로마인들은 부부싸움이 일어나면 부부싸움을 중재해 주는
비리프라카 여신의 신전으로 찾아 갑니다.
물론 신전 안엔 아무도 없지요.
그래도 거기서, 그 여신에게, 부부는 서로 자기의 입장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거기엔 한 가지 룰이 있는데
그 여신에게 얘기할 때, 한 번에 한 사람씩만 얘기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끝나야.. 이어서 다른 사람이 여신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얘기할 때, 남편은 그 얘기를 고스란히 들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후에 다시 남편이 얘기하면, 또 부인이 다 듣습니다.
그렇게 신한테 이르는(고자질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어떤 부분은 ‘그래 그건 일리가 있는 얘기네’
‘아! 또 집사람 입장은 그런 거였구먼!’ 하면서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신전을 나올 때는, 손을 잡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길까요?
사실은 자기 마음을 배우자에게 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백을 하니까 그 자리에서 카타르시스가 되는 것입니다.
보통 부부싸움은 어때요?
누가 더 총알처럼 빠르게, 대포처럼 크게 떠들어서 기선을 잡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래가지고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고백의 대상을 정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카운슬러같은 하나님, 친구 같은 하나님,
그 하나님이 여러분의 고백을 받으시고 위로하실 것입니다.
▲예술은.. 자기 내면의 고백
이제 여러분의 얘기로 돌아가 보십시다.
음악이든 다른 예술이든.. 그 본질은 영혼에 울림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이 음악을 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셔야 될 일은, 그 음악의 대상인 사람들에 대해서
따뜻한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여러분의 가장 은밀하고도 사적인 내면을 폭로(고백)하는 것,
그게 바로 음악이고, 문학이고, 예술입니다.
여러분의 가장 은밀한 내면을 보여 주십시오. 그래야 사람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청중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연주자의 '고백'을 들어야만
정화되고 감동받게 되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자기 내면/자기 혼/자기 느낌/자기 감성이
스며있지 않은 예술 작품은.. 꽝입니다.
작가가 먼저 감동을 받으면.. 청중에게 반드시 그 감동이 전달되게 되어 있습니다.
작가나 연기자가 아무 감흥이 없는데.. 청중에게 어떤 감흥이 전달될 리 없습니다.
글은 그렇다 치더라도, 음악으로도 그런 표현(고백)이 가능하냐고요?
물론입니다.
연주 속에는 여러분의 재능만 들어있는 게 아닙니다.
인격과 생애까지도 다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곡을 쓴 사람의 내면까지 다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비엔나의 신년음악회 장소인 무직훼어라인에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4번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연주자가 두 번째 악장, 안단테 칸타빌레를
너무 아름답게 연주하는 거예요.
정말 환각에 빠질만큼 좋더라고요.
표현은 잘 못하겠지만, 마음속에 뭔가 깊은 울림이 오더라고요.
그 선율들이 제 가슴에 저며 오면서 제 영혼을 만져주는 거예요.
거기서 더 시간이 가니까 연주자는 안 보이고,
모차르트가 커튼을 열고 얼굴을 내미는 것 같은 느낌이 오는 거 있지요?
모차르트는 사는 동안 별로 행복한 시절이 없이 살았잖아요.
그런데 음악만큼은 너무나 깨끗한 거예요. 호수처럼 맑고 투명한 겁니다.
거기엔 무슨 사상이나 이념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불행하게 살았다.. 그러면서 넋두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내 음악을 듣는 너희들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훈계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음악은 음악이다’ 그러는 거예요.
음악은 거기에 무슨 불순물을 함유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결국 마지막엔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그것은 결코 슬픔의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맑고 깨끗한 게 제 마음을 가만히 적셔왔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눈물로 완결됐습니다.
그 날 그 연주자는 연주를 끝내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더라구요.
"여러분! 이게 모차르트랍니다!"
그 날은 모차르트나 그 연주자나 둘 다 위대하게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저대로 음악으로 제 속을 다 행궈낸 것 같이 시원해지더라고요.
▲예술적 테크닉이란?
하나님을 향해서는 여러분의 희노애락을 다 고백하세요.
다윗처럼 시시콜콜, 옆에 있는 친구에게 하듯이 다 고백하세요.
무섭고 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 우리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더 친숙해 질 수 있습니다.
사람을 향해서는, 어떻게든
여러분의 가장 은밀하고도 사적인 내면을 조금이라도 보여주세요.
결국 여러분의 예술적 테크닉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숨기는 것과 보여주는 것의 경계에서 얼마나 격조 있게 서 있느냐 하는 걸 겁니다.
거기에 감동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서나 인간을 향해서나
그 두 가지를 너무나 훌륭하게 해 냈습니다.
그랬기에 그가 지나간 길은,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들로 차 있었던 겁니다.
우리도 다윗이 가졌던 그 영성과 예술적 감성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더욱 매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얘기는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 길면 여기서 쉬었다가 가세요 ...........................................
◑3. 다윗의 영성과, 또한 풍부한 감성은 사랑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주인을 사랑한 개 이야기
언젠가 감리교 기관지인 기독교 타임스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군에서 사역하시는 군목님이 쓰신 건데,
그 목사님이 사역하시는 부대의 사단장님은 아주 열심히 믿는 분이셨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에 나오셨대요.
그런데 그 사단장님이 새벽기도에 나올 때는
꼭 그 집 개도 따라 나오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개는 주인이 기도가 끝날 때까지 교회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돌아가곤 했답니다.
그러니까 그 개도 매일 새벽기도에 다닌 것이지요.
그러다가 그 사단장이 전출을 가게 됐나 봐요.
그런데 새로 부임해 가는 부대는, 개를 기를 형편이 못 되었던지
그냥 그 개를 그 부대에 두고 떠났답니다.
그런데 사단장이 떠나고 난 다음날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하려고 교회에 와서 보니까
그 개가 교회 문 앞에 와 있더래요.
그리고는 아주 슬픈 얼굴로 목사님을 쳐다보더래요.
‘우리 주인 어디 갔어요?’ 하는 표정이더랍니다.
‘우리 주인이 여기 매일 오니까, 여기 오면 혹시 만날 수 있겠지’ 하는 그런 모습이더랍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보니까 또 나와 있더래요. 그 다음 날도 또...
그렇게 얼마동안 그 개가 교회에 나왔냐 하면, 꼬박 한 달을 나오더라는 거예요.
군목 목사님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일 처음에 드는 생각이 그거였습니다.
‘내가 그 개보다 나은 게 뭔가?’
‘개가 주인을 그렇게 기다리듯이, 내가 정말 하나님을 그렇게 기다려는 봤나?
그렇게 간절하게 주인을 사랑해 봤던가?
주인에게 그렇게 일편단심 마음을 쏟아는 봤나?’
▲다윗의 힘은.. 하나님과의 알콩달콩한 교제에서 나왔습니다. 다른 뚜렷한 이유는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한 것과,
또 자기 일생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모든 예술적 향기들은
결국 '하나님 사랑' 때문에 시작됐고 완결됐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나 모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 보질 않으려고 해요.
하나님은 사랑을 베푸시는 분으로만 생각하지, 그 반대의 경우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하나님은 원래가 사랑이시니까
그까짓 인간의 사랑은 받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다윗을 그토록 사랑하셨을까요?
왜 다윗에게만큼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그런 찬사를 보내셨을까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다윗만 보면 행복한 거예요.
다윗이 늘 자기와 함께 있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일이 있을 때마다, 꼭 물어줍니다.
그리곤 일이 끝나면, 언제나 고마워했습니다. 정성을 다해 감사를 표하는 거예요.
틈이 나면 아름다운 시를 써서 드리고, 또 얼마나 자주 노래 불러 주는지 모릅니다.
여태껏 수도 없는 자식을 두어봤지만, 다윗같은 아들이 없었던 거예요.
불효(不孝)끝에 얻은 아들이라 너무나 예쁜 겁니다.
때때로 실수도 하지만, 한 번 혼을 내면 고개를 푹 숙이고 정말 뉘우칩니다.
그리곤 두 번 실수는 절대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다윗에게, 어떻게 더 좋은 것을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항상 함께 있어 주니까, 하나님 당신도 다윗과 언제나 함께 있고 싶었던 겁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 한 것을 보면, 거의 연인에게 하듯이 합니다.
연인에게 하는 사랑은 물불 안 가리지요?
돈 다 씁니다. 힘 다 씁니다. 어디라도 달려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또 일을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오랫동안 전쟁을 치루고 태평성대가 되면 좀 쉬고 싶을 텐데,
또 하나님 기쁘게 하려고 성전을 지을 계획을 세웁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속에 있는 그 사랑을 주체하질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어떻게 그에게 이런 사랑이 생겼습니까?
자기가 아주 어렸을 때 어느 날, 사무엘이라는 사람이 와서
자기 머리에 기름을 붓더니 '이제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다' 그러는 거예요.
그러더니 진짜 왕이 됐습니다.
다윗이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왕이 된 이유를 모르겠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자기가 왕이 된 이유를 자기 스스로 결론지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이유와 똑같습니다.
"그냥!"
그냥입니다. 다른 이유 없어요.
왕이 될 만한 어떤 일을 한 적도 없고, 원래 왕을 지냈던 왕족도 아닙니다.
죄를 모르고 어릴 때부터 성스럽게 살아왔냐? 그것도 아닙니다.
답은 '그냥!'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어서요? 구원받을 만한 행위를 해서요?
아닙니다. 이유 없습니다. ‘그냥’이에요.
다윗이나 우리나 경우는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다윗과 우리가 다른 것은 뭘까요?
똑같은 사랑에, 똑같은 은혜를 받았다면, 그 결과도 똑같이 나타나야 하는데,
무엇이 다릅니까?
다윗은 하나님이 고마웠습니다.
그 분이 감사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기를 사랑해 주셨어요.
그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자기도 그 사랑을 표현한 거예요.
다윗과 우리가 차이나는 건, 대단한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사랑에 대한 자각을 하느냐/못 하느냐의 차이, 표현하느냐/못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 개 역시, 자기를 사랑해 주었던 주인이 고마웠던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표현한 거예요.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 분입니까?
필요할 때 돈 대주는 물주입니까? 어려운 문제가 오면 해결해 주는 해결사입니까?
위험할 때 구해주는 119 구조대입니까? 여러분의 자녀를 잘 키워주는 보육사입니까?
시험 답안을 가르쳐 주는 족집게 선생입니까? 미워하는 사람을 손봐주는 청부업자입니까?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십시다.
이제는 정말 그분과 함께 있어 드려야 될 때가 왔습니다.
모두가 사랑받기 원하듯이, 그분도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십니다.
사람이 상처받듯이, 하나님도 사람 때문에 너무 많은 상처를 받으셨어요.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음악가가 되려면.. 조건 없이 음악을 사랑해야 합니다.
일생동안 성악가나 다른 연주자의 반주만 해 주면서 살았던
제랄드 무어라는 피아니스트를 아실 겁니다.
1967년에 그가 40년의 음악인생을 마감하면서 고별 연주회를 했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는 평생의 파트너였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를 비롯해서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같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함께 무대를 꾸몄습니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이제 그가 마지막 곡을 연주하게 됐을 때,
무대에는 제랄드 무어 혼자만 남아 있었습니다.
마지막 곡을 연주했는데, 그 곡이 바로 슈베르트의 ‘An die Musik’ (음악에)
라는 곡이었습니다.
성악곡이지만 피아노로만 조용히 연주를 했습니다.
그 곡을 듣는 모든 사람들 속에 진한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그 곡은 다름 아닌 음악에 대한 그의 고결한 찬가였습니다.
평생을 음악과 더불어 살아온 그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것이었지요.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그대 아름답고 즐거운 예술이여!
마음이 울적하고 어두울 때
그 아름다운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언제나 즐거운 기운 솟아나
마음의 방황 사라집니다.
누구의 멜로디일까요.
꿈결 같은 그 멜로디에
내 마음 어느덧 불타는 정열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때로는 그대 하프에서 한숨이 흘러나오고
때로는 그대의 달콤하고 성스러운 화음이
더 좋은 시절의 하늘을 내게 열어 보여 주었습니다.
그대 아름다운 예술이여!
나는 그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대 아름다운 예술이여
그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 노래의 주제는, 마지막 줄의 가사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대 아름다운 예술이여! 나는 그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대 아름다운 예술이여! 나는 그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음악은 무엇입니까?
밥벌이의 도구는 아닙니까?
겉치장을 위한 액세서리는 아닙니까?
남들이 보기에 화려한 훈장은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이 음악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언젠가 음악은 여러분을 떠날 것입니다.
이제 음악이 가져다 줄, 돈과 명성과 평판은 모두 포기하십시오.
다만 음악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음악을 연인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제랄드 무어처럼, 그에게 감사하고 헌신하십시오.
그러면 음악은 여러분의 곁에 오래 오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여러분이 필요한 모든 것을 풍요롭게 공급할 것입니다.
제가 음악을 일례로 들었지만,
우리의 모든 <신앙>과 <예술>적 감성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랑해야 할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우리의 사랑은 타의에 의해 접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기 전에 맘껏 사랑하십시다.
다윗이 그렇게 사랑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음악을 사랑하십시다.
그러면 우리의 길은 풍요롭고 즐거울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길을, 서로 사랑하면서 손잡고 함께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1)
다윗의 이야기는 사무엘상 16장에 처음 나오기 시작해서
열왕기와 역대기까지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야기를 보면 계속해서 줄기차게 나오는 말씀이 있는데
뭐냐 하면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대", "다윗이 물어 가로대" "다윗이 가로대" 입니다.
또 거기에 대해서 댓구(對句)로 이어지는 말씀이 뭐냐 하면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라는 말씀이 똑같이 반복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때에 질문을 하십니까?
<모를 때> 하지요?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할 때 질문을 합니다.
즉 뭔가를 듣기 위해 질문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매사에> 하나님께 물어보고, 거기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잘 한다'라는 말을 많이 하지요.
그런데 '잘 한다' 하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술적으로 매우 좋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뭔가를 자주 한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말씀드리자면, 앞의 것은 very well 이고, 뒤의 것은 very often입니다.
오늘 다윗이 듣기를 잘했다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앞의 것입니까, 뒤의 것입니까? 아니면 둘 다입니까?
그렇지요?. 둘 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자주 들었고,
또한 그 말씀을 들을 때 너무나 열심히 들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의 생애에 몇 번 실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듣지 않고, 귀를 막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먼저 행하기를 좋아하는데,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듣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영성과 감성을 길러주는 것은, 행동하기에 앞서서 듣는 것입니다.
듣되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또한 듣되 자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을 하다가 그르친 후에,
그 이유를 찾아보면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들었어야 할 말을 무시했던가.. 아니면 듣되 흘려들었을 때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말을 무시하고 제사를 드렸다가
‘제사보다 순종이 더 낫다’라는 책망을 들었고,
롯의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흘려듣고 농담으로 알았다가
영영 소돔성에서 빠져 나오질 못했습니다.
▲사실 다윗이 잘 들은 것은 하나님 말씀이었지만,
그 잘 듣는 습관이 몸에 배자
모든 자연의 소리까지 들을 줄 알게 되었던 겁니다.
맑은 물소리, 바람 소리, 천둥과 우레 소리,
그 모든 것에서 그의 예술이 나온 겁니다.
그 아름다운 시편들을 읽어보십시오.
또 우리가 직접 들어보진 않았지만, 그의 하프 연주가 얼마나 아름다웠겠어요.
그 음악을 듣고 귀신이 쫓겨갈 정도였으니까요.
또 법궤가 들어올 때 다같이 춤을 췄다고 했는데,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웠을까요?
뭐 이런 것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감성과 영성의 귀를 열고, 하나님의 말씀과 자연의 소리와,
또 감성의 소리를 깊이 들을 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독교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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