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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지금 여기에’ 2488

LNCK 2010. 6. 7. 23:53

◈주님이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요11:1~44                 06.05.28. 설교스크랩

                                                                                         *원제목 :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마르다의 반쪽짜리 신앙고백


(전략)

베다니 촌에 나사로가 죽은 후에, 예수님이 뒤늦게 도착하셔서,

마리아, 마르다와 대화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11:26


이 말씀을 풀어 설명하면, 대략 이런 뜻입니다.

"마르다, 너는 내가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에 대해 말하는 줄 오해하고 있구나.

아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네 오라버니를 ‘지금’ 살릴 것이다.


그러면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마다 새로운 생명으로 회복된다는 사실을, 네가 눈으로 확인할 것이다.

자, 마르다, 이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마르다는,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요11:27

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보다 더 완벽한 고백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39절에 보면, 마르다가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매장된 무덤의 입구를 막아놓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했을 때,

마르다가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39)라고 말하면서 말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책망하여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40)


그러니까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 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라는 27절의 마르다의 고백은 ‘반쪽 고백’(imperfect confession)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만,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지금’ ‘자기에게’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세상 마지막 때에 모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실 것이라고 믿었지만,

‘지금’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실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믿었지만,

‘자신’에게는 어떤 일을 하실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임을 알았지만,

자신의 구원을 위해, 지금 자신에게 찾아온 분인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정확하고 완벽한 고백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믿고 따릅니다.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셔서, 우리 중에 영으로 함께 하심을 믿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분에게 연합되면, 그분의 능력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역시 교리적으로는 완벽한 고백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 고백이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나의 구체적인 삶에는

위의 마르다처럼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아간다는 사람도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이런 불행이 안 생겼을 텐데..." 라는 탄식과 불평이 자주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문제들과 아픔들이 모두,

예수님이 우리 사정에 무관심해서 생긴 것처럼,

혹은 그분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셔서 생긴 것처럼,

"왜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았느냐?"면서 투정하고 화를 냅니다.


내가 주님을 필요로 할 때마다, 왜 내 곁에 계시지 않는 거냐고,

왜 이렇게 응답이 더딘 거냐고,

왜 내 사정을 몰라주시는 거냐고.., 아쉬움과 섭섭함을 토로하곤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는

"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좀 더 서두르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때가 늦어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그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누가 오더라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아무리 세상의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곁에 계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해 주실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이 대목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실로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 여기서 here & now, 부활의 주님과 교제, 동행 하고 계십니까?


▶주일 예배의 의미

우리가 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려는 까닭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일 예배를 안식일 예배로 오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일 예배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지키려고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 다음 날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축하하고,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새로움을 입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마다 예배를 드림으로써

부활하셔서 우리 곁에 와 계신 주님을 늘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물론, 부활하신 주님을 매일, 매 순간 만나 사귀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더 밀도 있게 그분을 만나 사귈 수 있습니다.


매일 주님과 사귀는 삶을 열망한다면, 주일 예배를 더욱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일 예배가 충실할수록..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살아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 때마다 듣고 또 들어야 할 메시지의 중심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왜 복음입니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죽음이 가시고 생명이 움트며,

어둠이 지나가고 빛이 비치며,

근심이 지나가고 평안이 자리잡고,

눈물이 그치고 기쁨이 터져 나오며,

한숨이 그치고 웃음소리가 터져나기 때문입니다.


혹시 상황이 내 소원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님의 소원이 내 소원보다 더 완전한 줄 알므로..

주님을 신뢰하면서 여전히 기뻐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소식이

기쁜 소식, 즉 복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중에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그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26)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과 함께 동행 하면,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고, 마침내 그 상황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복음입니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분에게는 죽음까지도 이길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머리로만 인정하고, 마음으로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상관없는 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혹은 그분의 능력이 놀라운 것은 알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부르짖지만,

정작 그 능력이 자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도록 준비하는 일에는 주저합니다.


나사로를 살려내기 위해 무덤 문을 열라고 예수님이 명령했을 때,

그래 보아야 부질없는 일이라고 만류하는 마르다의 태도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앞에 모시고도

여전히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자신을 살릴 약봉지를 옆에 두고도,

그것을 먹지 않아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가는 사람과 같은 형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철학이나 계몽을 넘어섭니다.

인간을 계도하고 순화시키자는 것도,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티켓을 얻자는 것도, 기독교의 핵심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가르치자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하셔서 우리 중에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과 사귀고, 그분에 의해 변화되고 사로잡혀,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살아가자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만을 기다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 나서 천당 갈 것만을 기다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금’ ‘여기서’ 내 삶을 변화시키는 부활의 사건을 누리고

그 능력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가 문제를 만났을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요즈음, 앞으로의 목회 방향에 대한 깊은 성찰과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고민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삶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면서, 고민이 더 심해졌습니다.

우리 속담에 "꽃 가마 속에도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만,

말 그대로, 문제없는 가정, 문제없는 사람이 없음을 봅니다.


때로는 그 문제가 너무 크고 깊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경우가 있습니다.

각 가정에서 매일같이 겪는 이 절절한 고통과 아픔을 알고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헌신하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진다 한들,

교회의 모든 노력은 의미 없는 몸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목회의 목표는 성도들을 ‘목사가 필요 없는 (성숙한) 성도들’로 키우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성도님들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자기와 함께 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찾지 않고,

두리번거리면서 이렇게 불평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능력 있는 주의 종이 있었다면 이렇지 않았을 걸!"

"어디를 가면 능력 있는 종의 안수기도를 받을 수 있을까?"

"우리 교회가 좀 더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우리 목사님의 영성이 좀 더 강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자,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앞에 세워 두고,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옛날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와 계신 부활의 주님과 연결되어,

그분과 함께 사귀어 살아가면서,

그분의 능력을 힘입으면,

능력 있는 종의 안수기도가 없어도,

부활의 능력은 얼마든지 힙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계신 부활의 주님은 무시하고

능력의 종만 찾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지속적으로 흘러넘치도록

우리의 삶을 구조 조정하는 노력은 하지 않고, 막연하게 목회자의 도움만을 간청합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그 어려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겨내기 위해, 자기가 적극적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를 통해, 뭔가 기적적인 구출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기만을.. 기다리고 앉아 있습니다.


▶목회자 의존적 신앙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루 하루의 생활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사귀어 살면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그 능력으로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믿는 사람다운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가 ‘목사가 필요 없는 성도’입니다.

‘목사가 필요 없는 성도’라고 해서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주님을 만나 사귐으로 영적으로 성장하여

목사에게 의존하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비로소

목사의 동역자로서 함께 건강하게 사역할 수 있습니다.


영성이 파리하게 야위어 언제고 목사에게 의존하는 성도들은

세상과 교회의 경계선에서 언제나 무력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교인이라고는 하지만, 교인다운 차별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의 영의 눈을 열어 여러분 내면에 계신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신 부활의 주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이미 여러분 안에, 여러분 옆에, 여러분 뒤에, 여러분 가까이에 와 계십니다.


여러분 곁에 와 계신 주님을 보시고는,

"주님이 진작에 여기 계셨더라면!" 이라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눈을 떠서 그분을 알아보고,

여러분의 삶에 초청하며, 그분의 능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도록,

여러분 몫의 노력을 지속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고 낙망하여 앉아서 울면서, 다른 사람 탓만/하나님 탓맛 하고 있겠습니까?

떨치고 일어나 예수님 앞으로 가십시다.

그리고 그분이 일하시도록 나의 마음을 여십시다.

한 번 뿐 아니라, 늘 그분과 함께 동행하도록 영성의 삶을 배우고 실천하십시다.

부활의 능력이 <지금, 여기에>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게, 믿는 겁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 오시어 함께 거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를 도우시어

부활의 능력이

내 일상의 삶 속에 빛나게 하소서.

매일 매일 주님과 함께 걷는 삶으로

저희를 인도하소서.

그 삶을 배우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부활의 증거가 되게 하소서... 아멘.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