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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9

탄식가운데 소망 있다 2473

LNCK 2010. 5. 29. 10:50

◈탄식가운데 소망 있다             롬8:18-27             09.09.27.설교스크랩, 편집, 출처

 


▲들어가는 말 : 신음, 탄식

세계적인 현역 여자 테니스 선수 가운데 흑진주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미국 선수 비너스 윌리엄스가 있습니다.

이 선수가 경기하는 모습을 본 분들은

그녀의 괴이한 비명소리에 신경이 아주 거슬릴 것입니다.


코너로 찔러대는 상대선수의 공을 악착같이 따라가 받아 넘길 때 지르는 날카로운 비명,

네트를 간신히 넘어온 공을 필사적으로 따라가 넘기면서 질러대는 동물 울음소리 같은 신음소리,

서브를 넣을 때 하늘 위로 올렸던 공이 내려오는 순간 점프하면서

상대방 코트 모서리를 향해 내리꽂으면서 질러대는 괴상한 비명소리,


이런 소리들 - 끙끙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신음 소리 같기도 하고,

비명 소리 같기도 하고, 탄식 소리 같기도 한 소리들 - 때문에

상대방 선수가 심판에게 강력한 이의를 제기합니다.

신경이 쓰여 도저히 경기에 집중 할 수 없다는 불만 제기입니다.


지난 세대에는 체코 태생의 미국 선수인 마르티나 나브로틸로바가 그런 선수였습니다.

서브를 넣을 때마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비명을 지르면서

네트로 돌진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헬스장(fitness center)이나 실내체육관(sports complex)에 가시면

여기저기 안내문이 붙어있을 것입니다.

괴성이나 신음소리 같은 것을 삼가 달라는 내용입니다.

그런 소음들은 편안하고 안락해야할 곳의 평온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끙끙대거나 신음소리를 내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러닝머신 위에서 조용히 달리고 있는데

옆 사람이 뛰면서 끙끙대면.. 주변 사람들이 편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신음소리, 한숨소리, 탄식소리가 자주 등장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탄식은 어떤 종류의 소리인지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세 가지 탄식들


본문에 피조물의 탄식, 하나님 자녀들의 탄식, 성령님의 탄식이 나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신음)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22절)


“그(피조물)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신음)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들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3절).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절)


여기에 대한 설명은 주1)을 참조하시고, 설교의 주제로 막바로 점프합니다.↙



◑탄식 속에 희망 있다.


우리의 탄식은 절망하는 탄식이 아닙니다. 우리의 탄식은 ‘희망하는 탄식’입니다.

아니 ‘탄식하는 희망’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탄식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향해 속에서 끓어대는 외침이며

탄식이며, 신음이며, 간절한 열망이며, 바람이며, 그리움입니다.


   비록 현재 상태는, 사방으로 우겨 쌓인 것 같고,

   답답한 일을 만난 것 같고, 소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탄식하지만..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 왜냐하면 미래에 하나님이 구속하실 그 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롬8:18~25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1절)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미래에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들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3절).


장차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완성하실 구속, 최후의 승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탄식 중에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완전히 승리하지 않아서, 레슬링 경기처럼 엎치락 뒤치락 합니다.


그러나 최후승리는 분명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승리하신 그 승리에 내가 참여할 것이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탄식 중에 '인내'인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고, 또한 신앙의 본질이 그러합니다.

   우리의 소망과 목적지는 저 천국이요, 영광스러운 구속과 자유입니다. (21절)

   그리고 이 세상은 '인내, 참음,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려고 하고, 저 천국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23절은, 이 세상에서 탄식하며 살 수밖에 없지만,

   장차 몸의 구속(완성될 날)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삶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8:24~25)

  


▲2. 성령의 탄식 또한 우리의 소망입니다.  롬8:26~28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롬8:26


①여기서 '성령께서 간구하신다'는 '중보intercession하신다'는 뜻입니다.

'중보 하는 것'을 무엇에 비유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어떤 절박한 문제를 놓고 기도할 떄,

갑자기 기도의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머리는 복잡하고 가슴은 뜁니다.

무슨 말로 기도의 문을 열어 가야할지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 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고 말문이 굳게 닫혔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여러분과 저의 기도들 가운데 임재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논증하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성령의 간구는 그저 한숨입니다.


로마서 8장의 첫 부분을 기억해보십시오.

사도 바울께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절)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들도 살리시리라.”(11절)


우리 속에서 우리와 함께 ‘아빠 아버지!’라고 외치시는 성령(15,16절),

  

   이렇게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것을 먼저 알 때,

   성령님의 중보기도를 우리는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어야할 것을 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면서 탄식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래의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②이렇게 성령의 중보기도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기도하게 될 때,

우리 신앙은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 즉 성령에 따라 사는 삶의 깊은 곳으로,

   ․ 성령에 따라 걸어가는 삶의 의미 안으로 깊숙하게,

   ․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이해하는 곳으로 깊숙하게,

   ․ 구원의 영광스런 무게 그리고 우리 앞에, 우리 가운데, 우리를 위해 펼쳐지는

    그 영광의 무게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가게 됩니다.



▲3. 미래에 승리하겠지만, 현재에도 승리합니다. 그래서 탄식 중에 소망이 있습니다. 롬8:31~39

왜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도살당하는 양같이 괴로운 현실을 살더라도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롬8:36~39


그래서 우리는 기도 중에 이렇게 외치며/확신하며 기도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5

  

"우리가 이 보배(부활 예수)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핍박을 당해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길 와중에 예수의 생명이 더욱 나타나게 됨을 깨닫습니다. 고후4:7~10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얻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롬8:18

우리의 고난 가운데 함께 고통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말 : 탄식의 긍정성

성령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말씀처럼,

탄식과 신음이 긍정적으로 묘사된 곳은, 성경 이외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러한 탄식은 매우 긍정적이고 힘과 위로와 격려가 되는 탄식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①마가복음서에는 예수께서 귀머거리를 고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사람을 무리 가운데서 따로 데리고 나와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으시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열려라(에바다)” 하시니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렸습니다(막7:31-37).


   이처럼 긍정적인 의미의 탄식

   전쟁을 치루는 신음소리며, 마귀와 교전(交戰)하는 탄식입니다.

   악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포로를 다시 되찾아오기 위한 전투의 소리며,

   억눌린 자의 고통을 풀어주는 해방의 탄식입니다.


②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집에 대해 쓴 일이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후5:1

  

이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집으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그 영원한 집이 아니라

이 땅의 흙으로 지은 막사라는 것입니다.


이 흙집에 살면서 우리들은 탄식하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탄식입니까?

이 탄식은 우리의 썩어질 몸이 하늘 거처(heavenly dwelling)로 덧 입혀지기를

갈망하는 탄식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고후5:2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생각하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동안, 탄식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은 <절망적인 탄식>이 아니라,

   <소망을 기다리는 가운데 탄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탄식 가운데도.. 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1) 세 가지 탄식들

우리가 읽은 본문 롬8:18~27절 안에는 ‘탄식 groan’ 이란 용어가 두드러지는데,

바울은 동일한 헬라어를 사용하면서도, 3가지 독특한 탄식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의 탄식과 신음이 있습니다.

창조세계가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지금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선한 창조세계가 인간의 타락이후로 고통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언제 이런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날 것인가 하면서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영적 청력이 예민하신 분들은 피조물들의 탄식과 한숨소리를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신음)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22절)


②피조물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도 속으로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피조물)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신음)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들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3절).


추수 때가 되면 제일 먼저 거둔 쌀을 ‘햅쌀’이라 부릅니다. 첫 곡식이란 뜻이지요.

이와 비슷하게 장차 하나님의 위대한 수확의 계절이 올 것인데

그 추수의 때가 시작되었다는 첫 번째 물증이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이 첫 곡식인 성령을 받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도.. 탄식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탄식입니까? 무엇을 위한 탄식입니까?


   ․ 먼저 이 탄식은 한숨이 아닙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아이고 힘들어, 사는 것이 왜 이리 힘든 것이야. 일이 꼬이네.

     뭐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어. 아무도 도움이 못돼!” 하면서 내려 쉬는 한숨이 아닙니다.

   ․ 그렇다고 아쉬움의 탄식도 아닙니다.

    마치 로맨스 영화에 눈물을 짓게 하는 결정적 순간에 터져 나오는

    “어휴, 저런, 어떻게 저렇게 된단 말인가!”하는.. 깊은 아쉬움과 서글픔도 아닙니다.


   ․ 아니면 연말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독주를 해야 하는 연주자가

    깊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는 숨의 깊은 내쉼도 아닙니다.


   ․ 이 탄식은 우리의 몸이 온전해 지기를 소원하는 갈망에서 시작된 탄식입니다.


   ․ 썩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몸들이 온전하게

    구속(속량)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탄식입니다.


③이런 우리의 탄식에 참여하여 함께 탄식하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이 탄식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탄식은 존재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저음의 신음소리입니다.

상쾌하거나 달콤한 소리도, 듣기 좋은 상냥한 소리도 아닙니다.

장탄식이며 신음입니다.


성령의 탄식과 신음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절)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깊은 우리의 속사정을

성령께서 오로지 탄식과 신음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은 우리가 마음으로 암송해야할 진주 같은 구절들을 담고 있는 보석함이라면,

26절은 홀로 우뚝 서 있는 에메랄드 구절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바로 그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 종말, 내세, 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