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의 기도 이사야41:14 스크랩, 정리,
◑1. 기도하기 위한 장소
▶기도 장소를 찾아갔던 성 프란시스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종종 후일 그렇게 불렀던 - ‘장소적인 구도求道’로부터 시작하였는데,
실제로 기도를 위한 장소를 마련하였다.
우리는 분심(分心, 산란한 마음)에 매우 약하기에
기도를 위한 특별한 장소를 가지는 것은 도움이 된다고 말하곤 하였다.
(※미국의 어느 교회가, 한국의 개신교회를 본 받아, 기도원을 만들었는데,
미국 성도들이 기도원에 한 번 가고는, 더 이상 가지 않더라고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은 여기, 저기에 다 계신데, 뭐하러 기도원까지 멀리 가야하나?’였단다.
자기 집이나, 가까운 예배당에서 충분히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은 맞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기도할 때, 조용한 장소를 찾는 이유는,
우리는 환경적으로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즉 우리의 ‘분심’을 없애고, 오로지 기도에만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기도원 같이.. <일상을 떠날 수 있는 곳>이 좋다.
성 프란시스가 기도를 위해, 자기 기도처소를 정했다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반드시 정해야 한다.
또 한 가지, 기도원이나 자기 기도골방처럼,
평소에 기도가 많이 되어진 장소에서는, 낯선 신자가 가서 기도해도, 기도가 잘 된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경험되어진 사실인데, 동양의 신비적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가능하나
서구의 합리적인 이성으로는 증명이 불가능한 말이다.)
프란치스코가 기도하기 위해 찾아가곤 했던 섬이나 바위나 산이나 동굴들은
그가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는 우리가 약하고 불완전하기에
기도하기 위한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다.
하나님께서 지어내신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의 눈길이 머물면,
그는 바로 하나님의 그 아름다움으로 들어 올려지곤 (기도로 몰입되어지곤) 했다.
그에게 피조물은 거울과 같았고,
그 거울 안에서 그는 그가 갈망하는 하나님의 반영을 보았으며,
그가 향해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다.
하나님께서 온 누리를 채우고 계심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이것이 단지 앎이 아니라, 체험이 될 때까지
우리의 기도 생활 안에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가정에서 기도골방 마련하기
우리는 분심(分心 집중하지 못하고 나눠진 마음)에 약하기에
그처럼 기도하기 위한 장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문 밖 어딘가를 발견하거나
작고 소박한 한 구석을 실내에 마련하여, 자기 취향에 따라 촛불을 밝히고,
청초한 꽃을 놓고, 기도를 위한 방석을 깔 수 있다면,
그래서 기도의 집중을 가로막는 일상적인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면.., 좋다.
그래서 ‘기도의 골방’으로 향하는 단순한 행위를 통하여
우리는 내적 고요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나의 기도골방은 어디인가?'
'내가 주말이나, 여가시간에 찾는 기도원/일상에서 떨어진 개인적 기도의 동산이 정해져 있는가?
프란치스코는 종종 산에 올라가서, 엎드려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2. 기도시간 배정하기
기도를 위한 두 번째의 간단한 도움은 ‘기도 시간을 배정’하는 것인데,
기도의 누적적인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기도가 쌓여서 그 응답이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많이 배정할 뿐 아니라 시간을 규칙적으로 내는 것이다.
기도시간에 따라 기도내용도 달라지게 됨을 발견한다.
<아침 기도>는.. 맞이할 그날 하루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으로 가득하고,
고요한 아침은 그 어느 시간보다, 기도에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다.
<저녁 기도>는.. 하루 일과의 내용들이 기도에 반영될 것이고,
우리가 만난 사람들과 겪은 일들에 대한 생각으로 기도할 것이다.
우리가 받은 상처, 피곤함, 감사하는 것들,
걱정하는 것들, 도움이나 용서가 필요한 크고 작은 문제점들,
인간 삶의 고뇌 등, 이 모든 것들은 기도를 위한 원재료 raw material 이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새로운 수도회를 위해 무엇이 좋을지
또는 이런, 저런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것을 주님께 여쭈곤 하였다.
그러나 기도의 핵심은 역시 하나님께 대한 그의 경배였고
다른 것은 도입부 prologue 일 뿐이었다.
◑3. 기도시간에 두 가지 질문
프란치스코는 자주 다음의 두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기도드렸다.
▶1. 하나님은 누구신가? (찬양의 기도)
즉 그분을 묵상하면서, 그분을 찬양 드리는 기도였다.
그분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강하시고, 크시고, 선이시고,
사랑(Love)이시고, 애덕(Charity)이시고, 지혜이시고, 아름다움이시고,
평화이시고, 기쁨이시고, 정의이시고, 알맞음(Moderation: 적절한 처신, 개역엔 아담함)이시고,
온갖 풍요이시고, 온화이시며, 휴식이시고, 희망이시고,
감미로움이시고, 생명이시다.
(※기도를 가르치는 분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묵상’하는 부분을 매우 강조하는데,
내 기도가 너무 ‘내 필요의 간구’위주로 되는 것은 교정을 요함.)
우리가 이를 천천히 기도로써 되풀이 묵상 한다면
프란치스코가 배운 그 흠숭(경배)의 기술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는 아침에 해가 떠오를 때 특별히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고 말하곤 하였는데,
그것은 눈 먼 우리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빛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프란치스코는, 해는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하나님을 닮았기에 해와 빛을 사랑하였다.
낮에는 해, 밤에는 불을 바라보며, 우리의 순례길을 밝히도록
밤낮으로 충분한 빛을 주셨음을 찬미하였다.
▶2. 나는 누구인가? (회개의 기도)
두 번째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그는 ‘지극히 불쌍한 벌레’라고 대답하곤 했다.
프란치스코는 성경에 너무도 깊이 잠겨들어
성경의 말씀들이 거의 그의 모든 말이 되었다.
‘두려워 말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아훼의 말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를 구원하는 이다.” 사41:14
‘지극히 불쌍한 벌레’라는 표현은, 병적인 자기비하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상대적으로 지존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대면하게 될 때,
자연적으로 고백되어지는 자기 인식이다.
사실 지구 전체가, 우주에서 작은 티끌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물며 그 속에 사람이랴!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자기를 낮출수록,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부적합함과 영적인/총제적인 가난이 은총을 얻게 하는 수단, 바로 그것임을 알았다.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다른 누구보다도 더 가난한 존재로 이해한 것은
결코 잘못된 겸손이 아니었다.
마치 ‘동굴의 어두움 속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리고 자신이 진정 무엇과 같은지를 철저히 탐구하였고,
그래서 거기서 자신이 배운 것들을 그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어둠 속으로 깊이 들어감으로써
빛(주님의 은총)이 그의 전 존재를 휘감게 한 것이었다.
자신에 대한 모든 탐구는 끝내고 하나님만을 찾을 때까지
이 고통스러운 여정을 통하여 그는 철저히 자신을 변화시켰고,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섰다.
이럴 때, 기도가 깊어져서, 환희와 관상으로 들어간다고 한다.(후략)
'나에게는, 정해진 개인기도 시간이 있는가?'
'그 시간에 주님을 깊이 묵상하는가, 또한 나의 가난함을 깊이 묵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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