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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0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2508

LNCK 2010. 6. 18. 22:03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고후4:5          10.05.16.설교녹취



◑복음과 문화


전략  주1)


▲컵과 내용물의 구분

우리가 물을 마실 때, 컵에 물을 부어서, 마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컵이나 그릇에 담아서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물을 마실 때, 컵도 같이 마시지 않는 것처럼

복음을 전하거나/받아들일 때에도, 컵과 내용물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컵은 문화를, 내용물은 복음을 가리킵니다.)


물을 주거나/받아 마시려면.. 컵이 필요하지만, 컵이 내용물 자체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할 때나 받아들일 때

그 신앙의 핵심을 간파하고, 그것을 배워야지..

그것을 담는 그릇마저도.. 받아 마셔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용물과 그릇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릇/문화가 기독교 신앙의 일부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오늘날 한국에 전파된 기독교는, 미국의 옷(문화)을 많이 입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를 배우는 것이.. 미국 문화를 수용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우리나라 신학생들이 제일 많이 유학을 가는 나라가 미국이고,

우리나라 목회자들이 ‘교회성장학’을 배우러 가는 곳이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 소위 첨단 목회방식을 수입하는 모델도.. 거의 미국교회의 모델입니다.

그것도 미국 흑인교회가 아니라, 주로 미국의 백인 중산층 교회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기독교신앙 중에

미국의 문화적 요소가 많이 섞여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꼭 좋다고만 말할 수 없고, 꼭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미국 문화적 기독교의 특징 및 장/단점

①미국의 기독교신앙은.. 개인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의 회심, 개인의 믿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국가에서 자라났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회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크리스천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점을 따지자면, 공동체성이 부족한 것입니다.

개인신앙 및 개교회주의로 흐르는 것이죠.


②또 한 가지 미국문화의 특징은 실용주의입니다. 프래그마티즘이라고 부르죠.

옳으냐/그르냐를 따지기 보다는, 얼마나 효과적이냐..를 따집니다.


실용주의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이 실용주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미국 기독교는

-성장지상주의.. 양적인 성장만 최우선으로 강조합니다.

-대중적인 인기와, 목회도 마케팅적 기법을 도입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교회에서 엔터테인먼트(볼거리를 통한 재미)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비판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미국의 앞서간다는 교회가 할리우드를 흉내 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알려진, 새들백 교회, 윌로우크릭 교회의 일부some 예배 중에는

   불신자에게 친화적으로 한다는 것이,

   예배가 마치 쇼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엔터테인먼트 위주로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장/단점을 논하고 있습니다. 둘 다 있다는 것입니다.)


정작 문제는, 우리가 미국 것이라면 무조건 다 좋다고 생각하고,

무분별하게 그들의 문화적인 요소를,

우리 교회 실정에 도입하려고 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이것은 물을 마시려고 할 때, 컵까지 같이 먹으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역사적 반성


▲과거 19~20세기 초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수고했던 서양선교사들이

일각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제국주의적 선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앞서 16~18세기에 가톨릭 국가들이 선교했던 방식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세계선교에 그렇게 헌신적으로 이바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평가를 보면, 그렇게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선교가 문화적 제국주의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확장하듯이 (19C~20C초 당시는 식민지 점령시대)

서구의 기독교 선교 방식도, 종교/문화적인 우월성으로

마치 식민지 확장하는 식으로, 기독교 선교지역들을 개척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핵심 문제는 우월성이었습니다. 선교방식이 우월성에 기초한 강요였습니다.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제국주의적 우월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이 못 사는 나라, 소위 제삼세계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우월한 나라 사람의 입장에서

   열등한 나라 사람들을 돕겠다는 마음자세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우월하고, 군사적으로도 우월하고,

   문화적으로도 우월하고, 종교적으로도 우월한 자의 입장에 서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열등한 민족을 도와주겠다는 입장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우리 것을 받아들이라! 우리 것이 너희 것보다 낫다’는 전제 하에

   받는 자의 입장에서는, 감지덕지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그런 방식이 과연 성경적이었는가?’ ..를 생각하며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의 복음전도 정신을 본 받은 것일까요?


▲예수님의 복음전도방식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셨지만,

‘너희가 많이 받았으니.. 적게 받은 자를 도우라’는 식으로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전파와 섬김의 정신은,

우리가 많이 가졌기 때문에,

적게 가진 자들을 돕겠다는 자세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이 물질을 많이 가지셨던가요?

돈이 아니면, 식량 같은 다른 자원이라도.. 많이 보유하신 가운데서 전도하셨던가요?


더 특권을 가지신 상태에서, 그 특권으로 사역하셨던가요?

 

소위 ‘노불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으로,

적게 가진 자들을 돕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사역을 하셨던가요?

물론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지내셨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병자들이 많았고,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지중해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국가적 우월성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문화적 우월감이나 경제적 능력, 이런 것을 가지고 일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의 선교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사도바울의 팀이 더 우월한 문화를 갖고서,

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더 많은 재력을 가지고서


덜 발달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돕는 차원에서

선교를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 당시 세계적인 문화는, 헬라문화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결코 우위를 자랑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바울의 선교팀이 갖고 있었던 자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들은, 은과 금을 갖고 있었기에,

    사방에 나가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문화적/경제적 우월주의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some 선교하는 분들을 보면,

뭔가 내게 은과 금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선교를 내가 가진 물질적, 문화적 우위에 있는 것들을,

가난한 나라에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고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물론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섬기는 자세이지, 우월주의가 되면..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강요가 됩니다.


그리고 베푸는 것의 우선순위가 엄연히 복음에 있습니다.

사회복지도 꼭 필요하지만, 그것이 최우선은 아닙니다. 

                                                               *관련글 보기 : 선교에 사회봉사활동이 우선되어선 안 됨


◑본문 설명/해석/적용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4:5


▲나를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나를 전파하는 것’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전도evangelism는.. 나를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인데,

그 자세는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입니다.  즉 섬김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봉사하고 복음전하는 것은

내 종교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우월한 어떤 것을 남들에게 나눠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종 된 섬김의 자세로 말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물질적으로 남들보다 많이 가져서가 아닙니다.

내가 남들보다 많이 배워서가 아닙니다.

'나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전파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내가 전파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나의 연약함 뿐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연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천국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자랑할 만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요?

내가 보란 듯이 위대한 점이 어디에 있는가요?

내가 잘난 점은 없습니다.


▲오직 전파할 것은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전도는, 나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내가 돕는 것뿐입니다. 내가 가교bridge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남을 주선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신앙이지만,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파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되, 우리 신앙문화를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어느 한 민족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서양민족의 전유물도 아니고, 유대인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지금은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에서 기독교가 부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아시아인/아프리카인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누구든지 받아들이는 그 사람들의 종교입니다.


    한 때는 서양에서 기독교가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때가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기독교가 부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는,

    이제 기독교가 서양종교라고 말하기가 무색할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영국의 성공회에서 전 세계의 성공회 주교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영국의 성공회Anglican Church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자꾸 흘러가려고 했지만,

그렇지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3세계에서 온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주교들이

그것을 적극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영국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전수받은 제3세계 및 라틴 아메리카 기독교인들이

이제는 영국 성공회의 신앙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제삼세계에서 온 그들이

영국 성공회가 더 보수적인 신앙으로 흘러가도록.. 기독교 신앙의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 universality (universalism과 구분됨)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어떤 특정 국가나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고, 
모든 문화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복음의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초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전파하려 했다면,

이방인들에게 ‘너희도 우리처럼 되어라.

‘너희가 구원 받으려면, 우리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따르고

우리의 식습관과 문화적 전통을 따르면.. 너희도 구원받을 수 있다.’ 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나 우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이

이방인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그대로 가진 채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이방인대로 예수님을 믿었고,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에

이방인이, 먼저 문화적으로 유대인처럼 되고,

그런 후에야 구원을 받는 것이었다면,

기독교는 세계적인, 보편적인 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설교문의 주제는, 다음 구절에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4:5


1) 초대교회부터, 기독교는, 자기 문화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컵을 버리고, 그 속에 물만 전해주었다는 것입니다.

 

2)우월성으로 전파한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우월할만한 게 아예 없었습니다. 복음 말고는요.


▲우리끼리 얘기지만, 노방전도나 교회에서 간증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지하철이나 시내 한복판 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또한 교회에서 간증하는 분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전파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서 ‘자기 자랑을 한다. 거만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 특히 그렇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가끔 느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경건을, 자기 독실함을 전하려 할 때.. 저는 혼자서 속으로 생각합니다.

‘저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인가, 자기를 (복 받은 것을) 전파하는 것인가?’


‘예수님’과 ‘자기’를 구분하지 못하니까,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예수 믿고 나처럼 복 받아라’는 식으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나처럼 신앙생활하고, 나처럼 잘 믿어라’ 이런 식이 되면 곤란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간증이나 전도를 조심해서 해야 하겠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월/교만한 자의 입장에 서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고, 나를 전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지 않습니다. we do not preach ourselves”

여러분 ‘우리를 전파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은, 강단에서

    자기가 어떤 유명인사와 만났고,

    자기가 어떤 진귀한 식사를 대접받았고,

    자기가 어떤 화려한 모임에 초대받았는지.. 자랑스럽게 간증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선교지에서 복음전도를 하다가

    강도를 만나서 얻어맞고, 칼에도 찔리고,

    무서운 병에 걸려 며칠간 사경을 헤매기도 하고,

    또 현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모든 교회재산을 다 빼앗기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부족한 자기가 복음전도를 계속 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만약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느 쪽이 하나님께 큰 칭찬과 상급을 받을까요?

    저 같으면 후자를 선택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전자는 방위고, 후자는 해병대입니다. 방위 복무 자랑을 절제합시다.)


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헷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신 나간 나귀>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다 과거에 그런 적이 한두 번 있었죠?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사람들이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칠 때

정신 나간 나귀는, 그만 자기에게 사람들이 환호하는 줄 알았습니다...


‘자기가 태우고 있는 분’과, ‘자기’를 혼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태우고 가다가 환호성을 받기만 하면,

그렇게 착각 안 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친해야 하지만, 익숙해지면 안 됩니다.

나를 전하는 게 아니라, 내가 모시고 있는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 하더라도

주님과 친해 질 수는 있지만, 주님을 익숙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에 대해 익숙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늘 처음 접하는 것처럼, 늘 어려운 마음을 가지고, 떨리는 마음을 갖고서 해야지,

익숙해지는 순간부터.. 우리는 교만해집니다.

익숙해지는 순간부터.. ‘내가’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목회자가, 목회에 익숙해지면, ‘내가’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남편과 아내도, 서로 너무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자아ego가 표출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친한 것과 익숙한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친해야 하지만, 그러나 익숙해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항상 부족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나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 해외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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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전략前略된 부분


▲우리는 기독교를 서양종교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미국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개신교 신앙을 전해 준 나라가, 미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이해했고,

실제로 어느 정도 그러했습니다.


구한말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분들은, 서양식의 교육을 제일 먼저 수용했고,

또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최초로 해외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승만, 김활란, 윤보선 이런 분들이 예수를 믿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그것이 국가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동양의 종교에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위치가, 동서양의 경계에 놓여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동양(중동 Middle East, 또는 근동 Near East)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독교가 이스라엘(동양)에서 발생했지만,

사도바울에 의해 서양으로 건너갔고,

그 후 서양(로마)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기독교를 서양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메시지와

기독교 신앙을 담는 그릇을.. 하나로 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