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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자가 가는 길에서

LNCK 2010. 6. 21. 00:27

◈사명자가 가는 길에서                 스크랩



◑성직자라도 삶이 메마를 수 있는 이유


▶변덕스런 날씨 같은 내 영혼

바닷가 날씨는 때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도 잔잔하던 바다, 그래서 호수 같은 바다였는데,

순식간에 세찬 바람과 함께 높은 파도가 몰려옵니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얼마 전까지 인자한 노인 같던 바다는

어느새 화가 잔뜩 난 난폭한 젊은이로 바뀌고 맙니다.


그런 성난 바다, 갯바위 위에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먹장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속히 구름이 걷히면서 하늘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수도자로 살면서도 삶이 왜 이다지도 허황된가,

왜 이다지도 인생이 허전한가, 생각해봤더니

문제의 원인은 한 가지더군요.


하나님 체험의 결핍.

그분과 1대1의 긴밀하고도 인격적 만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보니..

그리도 삶이 '팍팍'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은 내 인생의 둘도 없는 동반자이기에,

내 앞길을 환히 밝혀주는 등대이기에,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죽고 못 사는' 연인이기에,

그분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행복에 겨운 날이 되길 다시 한 번 꿈꿔봅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 신앙이 이토록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희망하길 바랍니다.

언젠가 반드시 어두웠던 하늘이 걷히고 활짝 갠 날이 다가오리라 확신합니다.


▶수도자로 살아가면서, 늘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수도자라면 당연히 언제나 하나님을 눈 앞에 뵙는 듯이 살아가야 하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조심조심 살아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앉아서 곰곰이 그 원인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너무도 당연하더군요. '하나님 체험'의 부족이었습니다.

소홀했던 영적 생활의 결과였습니다.

사는 데 바빴던 나머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너무 많이 줄여버린 결과였습니다.


언제까지나 육적 삶만 고집한다면, 영성생활에 우선권을 두지 않는다면

수도자라도.. 하나님 현존을 의심하는 비신자나 냉담자로 전락하게 됨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갑니다. 



◑수도원 담을 따라 3바퀴 걸은 이유


탁월한 영성가이신 한 수도원장께서 

하루는 수도원 문을 나서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수도원 담 안으로부터, 크게 다투는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놀라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담 벽에 귀를 기울여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 늘 옥신각신하던 두 형제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서로 언성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아침부터 크게 다투고 있는 두 형제를 보자

수도원장은 덩달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 순간 당장 달려가서 이렇게 혼냈을 것입니다.

“이 쫌생이들아! 너희들 그렇게 할 일이 없냐? 아침부터 싸움질이나 하고 있게.

너희들, 그 작은 것 하나 양보 못하면서, 도대체 뭣 하러 수도원 왔어?

그러려면 당장 짐을 싸라!”


그러나 원장은 다시 발걸음을 계속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길고도 긴 수도원 담을 따라 천천히 계속 걸었습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담을 세 바퀴나 돌고 난 후에야, 수도원 안으로 들어간 수도원장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두 형제를 불러서 타일렀다고 합니다.


수도원장은 제자들의 문제에 개입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분노나 화로부터 자유롭게 했습니다.

수도원 담을 따라 천천히 돌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리했습니다.

그가 담을 따라 돌던 시간은

어쩌면 다투고 있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다투고 있던 형제들로부터 받은 부정적인 감정의 영향을

수도원 담을 따라 걸으면서 최소화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조금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갓 수도생활을 시작한 햇병아리 수도자가, 스승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스승님, 제 마음이 이토록 고통스럽고 슬픔에 가득 차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보지 말고, 누구도 판단하지 말며, 누구도 비방하지 말게.

   그러면 주님께서 평화를 주실 것이네.”

  (안셀름 그륀, ‘하늘은 네 안에서부터', 분도출판사 참조)   



◑‘말씀’이 그를 가게 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인제대학교 81학번으로 의사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인턴 과정과 군의관으로 군 복무를 끝내자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생각해 오던 ‘소명의 길’에 응답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후 그는 외국을 오가며 10년을 더 공부한 뒤

마흔한 살의 늦은 나이에 사제 서품을 받습니다.


그는 전쟁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200명 이상의 환자들을 돌보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아무도 가지 않는 오지 마을을 찾아, 이동 진료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가 나타나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모여든다고 합니다.

치료도 받고, 소식도 듣고, 이웃 간에 만남을 이루는 날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 황량한 땅으로 가게 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정말 그는 아무것도 없이, 예수님에 대한 확신 하나로 떠나간 사람입니다.

“저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제가 그들에게 해 주는 것보다

그들이 제게 돌려주는 행복과 가르침이 더 큽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KBS에서 2010년 4월 11일 방영하였던 ‘수단의 슈바이처 故 이태석신부님’이란 다큐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10남매 중 아홉째로 10세에 부친을 잃고

모친이 바느질로 번 돈으로 의대까지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음악에 재능이 있어서 성당 오르간으로

혼자 피아노와 많은 악기를 다룰 줄 알게 되었습니다.


군복무 중에 갑자기 ‘가장 가난한 이에게 해 준 것이 당신께 해 준 것’이라는 성경말씀대로

사제가 되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쟁 피해자가 많은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수단 톤즈 마을에서 선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루 평균 300명 이상을 진료하고, 밤에 갑자기 사람들이 찾아와도

절대 얼굴을 찡그리는 법이 없었고 그냥 돌려보낸 사람도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학교도 세우고 거기에서 수학도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쳐

합주단 밴드도 만들었습니다.

이 청소년 합주단 밴드는 남수단 대통령도 인정할 만큼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부족들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수치로 알았지만

그들은 이태석 신부님의 죽음 앞에서 많이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분은 그 사람들에게 메말랐던 눈물을 되찾아준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 휴가차 와서 사람들의 권유로 생전처음 건강검진을 했을 때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으나 당신이 죽는 것 때문이 아닌,

그 곳에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큰 낙담을 하였지만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항상 밝은 모습으로 지내셨습니다.


그 분은 특별히 한센병으로 발이 뭉그러지고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맨발로 다녀야 하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겨서 일일이 발모양을 그려서

신발을 맞추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한 눈이 보이지 않는 한센병 환자인 아주머니께서 돌아가신 고인의 사진에

끊임없이 입을 맞추시는 모습에서 정말 많은 것을 주고가신 분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정작 고마워하는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기만을 하였던 것처럼 보였지만 그 분이 죽음을 기다리시면서 쓰신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책에는 그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당신의 ‘고마움’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기 죽음으로 끝난 완고한 아집


미국 남북전쟁 당시, 한 백인 병사(남군)가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곧바로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수술 도중 사망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흑인 피는 절대로 수혈하기 싫다며 완강히 고집 부리다가

치료시간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독일 병사가 부상을 입고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야전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군의 피는 수혈할 수 없다면서 수술을 거부했고

끝내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남의 말을 안 들으려 하고,

내 영혼을 수술하기를 거부하다가는..

자기 영혼의 죽음으로 끝장 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