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이 범한 진짜 잘못 창13:10~12 10.05.08.설교스크랩
*내용요약 :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진 것은, 양치는 데 필요한 목초지가 부족해서..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아브라함과 결별하여 다가간 곳은, 작은 도시들을 거쳐 결국 큰 도시 소돔이었습니다.
소돔에 살면서, 양은 인근 들판을 오가며 쳤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소돔 도시는.. 양 치는데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양은 들판에서 칩니다.
결국 롯이 아브라함과 결별한 것은, 표면적 이유는 목초지가 부족해서..이었지만,
이면적 이유는, 롯이 자기 마음에 소돔 문화를 동경하고 있었다는 추정입니다. (도시 문화 자체가 모두 나쁘다는 뜻은 아님)
안 그랬다면, 롯이 결별한 후에, 목초지를 찾아다녔어야죠.
즉 롯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속사람이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입
아브라함은 갈 바 몰랐으나 하나님께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떠남에 처음부터 동행했던 조카 롯은,
그를 본받아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무참히 실패한 인생으로 끝났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눈앞에 보이는 환경에만 집착하여
인간적 선택을 하였기 때문입니까?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목자라면, 물이 많은 (동쪽 요단) 땅을 선택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 선택 자체는 합리적입니다.
말하자면 그가 땅을 잘못 선택한 일은
차후의 실패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근본적 잘못은 딴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자이지만, 도시를 꿈 꾼 롯
요단 들이 “애굽 땅과 같았더라.”고 합니다. 13:10
또 “평지 성읍들cities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고 말합니다. :12
뭔가 집히는 내용이 없습니까?
그가 소돔의 향락문화에 마음이 차츰 빼앗겼다고 판단됩니까?
이 또한 옳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이유가 훤히 보이지 않습니까?
그가 요단 들을 택할 때, 물이 많은 것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애굽 땅과 같아” 보여서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10
애굽 땅 같으려면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나일 삼각주처럼 비옥해서 곡물 농사짓기에 아주 적합하든지, (그러나 롯은 농부가 아니라 목축업자)
아니면 당시 세계 최강 국가로서 화려하고 번창한 도회적 분위기입니다.
롯은 이 둘 중에 후자 즉, 도시를 꿈꾸며 땅을 골랐던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과 헤어지게 되는 계기는
순전히 목축에 필요한 초지와 물이 모자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요단-소돔 쪽을 선택한 것은
‘애굽 도시들을 떠올리며’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목축을 전문으로 하려면.. 들판에, 최소한 아주 작은 소읍에, 장막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롯은 “평지 성읍들cities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삼촌과 헤어지자마자 그는 평지 성읍에 머물렀습니다.
목축은 하인들에게 맡겼고, 자신은 소도시에서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드디어 아예 장막을 걷고서, 소돔이라는 대도시로 거주지를 옮긴 것입니다.
분명 목축업을 더 크게 키우려는 의도로 헤어져 놓고는
아예 업종을 바꿨거나, 본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땅을 선택하는 그 시점부터
롯은, 대도시 소돔에, 이미 자기 마음이 가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잘 봐주면) 목축을 주업으로 하되
생활은 도시에서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롯은, 인생의 온전한 목적과 굳건한 믿음도 없이
쉽게 세상 유혹에 빠지는 타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따라 나섰지만, 근본 내면의 뿌리는 변하지 않은 롯
말하자면 롯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쩔 수 없이 삼촌을 따라 나서긴 했지만,
두고 온 갈대아 우르 도시의 풍요와 안일과 향락을, 못내 잊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세속적 욕심을, 아브라함 앞에서 내색을 못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러다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피신하는 바람에 창12:10~20
다시 애굽의 도시적 향기(?)를 실컷 마시게 되었고
마음이 갈대처럼 심하게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러다 목자들 사이에 물과 초지로 다툼이 일어나 삼촌과 헤어지기로 하자,
그에겐 울고 싶었는데, 뺨을 때려준 격이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합리적으로 물이 많은 들판을 택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기실 속마음은 콩 밭(도시 문화)에 가있었던 것입니다.
롯이 선택한 동편 요단 땅은.. 물이 많은 데다, 애굽과 닮은 소돔이 가까우니
완전히 꿩 먹고 알 먹게 되었다고 내심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롯(우리)의 약점을 파고드는 사탄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성경 기록이야 당연히 정미하지만
그보다는 사단의 속임수가 말입니다.
사단이 사실은 롯을 소돔으로 끌어들이면서도
겉으로는 목축에 적합한 땅을 선택의 구실로 삼도록 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사단은, 신자를 항상 경건하고 의로운 일인 양 일단 속여 놓고
실제로는 더러운 죄악이 발동되도록 유도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지적한 대로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6)
사단은 신자로.. 이생의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일처럼 착각하게 만들면서
실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일단 신자가 되면.. 도가 넘쳐 죄라고 확실히 인식되는 일에는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겉으론 육신과 안목과 이생에 다 좋아 보이니까.. 그러나 속으로는 죄악된 일에 속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런 거짓된 정욕이, 신자의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으니까
사단이 그 약점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둘 중 하나만 사랑하게 되어 있다!
거기다 더 신기한 일은, 하나님은,
사단이 신자에게 그런 치사한 시험과 유혹을 하도록 묵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신자더러 영적 분별력을 온전히 갖추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그런 시험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속에 펄펄 살아 있는 육신과 안목의 정욕을 죽이고,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뿌리 깊은 습성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당신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힘을 다하여 순전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말씀 바로 앞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인간이 궁극적으로 사랑할 대상은
하나님과 세상(물론 그 배후에는 사단) 둘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를 사랑하면.. 다른 하나를 미워하는 것이고,
또 하나를 미워하면.. 다른 하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인가, 롯인가?
요컨대 롯은, 하나님 뜻을 물어 아브라함과 땅을 정하기 이전에
이미 세상을 향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을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알기는 알았지만.. 그분을 순전히 사랑하여 믿고 따를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그의 몸은 빠져 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전혀 달랐습니다.
몸과 마음 둘 다 갈대아를 완전히 떠났습니다.
물과 초지의 많고 적음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과 함께라면 어느 곳이라도 좋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연히 소돔 쪽은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설령 소돔에 어쩔 수 없이 살게 되더라도
절대 그에 물들지 않을 믿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애굽에서 범한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은 다 용서해주시고
오히려 은혜를 더 부어주셨음을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아브라함은 애굽의 실패(창12장)를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활용한 반면에,
롯은 더 멀어지는 방향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겪은 경험의 모든 외적 상황은 동일한데
그것을 이해, 해석, 적용하는 데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롯의 믿음은 아브라함과는 실제로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따르려 했지만, 그 믿음의 본질이 아브라함과 반대였기에
반대의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달리, 자기가 걸어가는 방향을 일직선으로 잡지 못하고
계속 오락가락했던 것입니다. 인생 목표가 분명하게 서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뜻만 따르기로 했지만,
롯은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거나 형식적으로 믿은 것입니다.
롯은 자기 주변에 묶여 순종이 방해 받았습니다.
아니 그분께 순종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주변 환경에 묶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잘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잘못을 곧바로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 그 잘못을 범하기 전보다 더 성숙하고 견고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의 방향이, 그분만 따르기로 완전히 고착되어 있었기에
모든 활동이 그 방향 안에서 이뤄졌습니다.
실수와 잘못도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도중에 일어났기에
오히려 그분의 은혜와 축복으로 변환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롯은 화려하고 안락한 도시적 삶을 살려는 소원에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습니다.
신자 가운데도 마음은 완전히 제사 밥에 가있으면서
형식적으로 제사 드리는 자들이 꽤 많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으려 하지만
자신의 인생 목표를, 오직 자기 뜻(롯으로 치면 소돔같은 도시의 타락한 문화)에만 붙들어 맨 것입니다.
(요한일서에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살던 죽든 자기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의 뜻대로 따르겠다고 하는
그 방향을 전혀 전환하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롯의 잘못을
단지 땅을 잘못 선택한 행위에만 돌리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 근본 이면/내면을 보자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속 내면과 근본 방향은 전혀 변화되지 않은 채
겉으로 아브라함만 따라 나섰듯이, 겉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www.nosuchjesus. com 5/8/10 박신 목사님 글 스크랩 ▣ 죄, 복된 회개
'분류 없음 > 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브엘세바의 삶을 사는 성도 2517 (0) | 2010.06.24 |
---|---|
아, 요나단이여! 2516 (0) | 2010.06.23 |
사명자가 가는 길에서 (0) | 2010.06.21 |
자리에 앉아 불평하는 사람들 2509 (0) | 2010.06.19 |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2508 (0) | 2010.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