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쉽지 않은 길 막6:8~9 스크랩
◑거추장스러움을 피하라는 뜻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막6:8~9
▶만약 저 같았으면..
한 몇 달 동안 전도로 파견되는 제자들을 위해 몇 가지 챙겨줬을 것입니다.
일인당 교통비 20만원, 식비 30만원, 또 혹시 모르니까 비상시에 쓸 체크카드,
또 연락이 되어야 하니까, 휴대폰 하나씩...
그것만으로 되겠습니까? 일일이 챙겨주지 않아도 각자가 다 알아서 챙겼겠죠.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자동면도기, 편안한 신발, 우산,
갈아입을 옷충분히 몇 벌, (젊은 청년들은 멋 불릴 옷도 챙깁니다.)
혹시 모르니까 밑반찬, 고추장, 읽을 책 몇 권...
그러다보면 큰 배낭 하나로 모자랄 것입니다.
끌고 다니는 초대형 여행가방도 안 되겠지요.
보십시오. 이것 저 것 챙기다보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장거리 여행 다니다 보면, 가방 때문에 힘들어 죽습니다.
때로 가방에 든 소지품, 귀중품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여행도 제대로 못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복음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결국 예수님의 지론은 간단합니다.
청빈한 삶을 기반으로 한 강렬한 하나님 체험,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
그것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을 향해 그토록 어려운 요구를 하신 스승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분은 보다 효과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
일정한 거처 없이 이곳 저 곳을 떠돌아다니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분 스스로도 자신을 향해 ‘이 세상 어디에도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이방인’이라고
자처하셨습니다.
찢어질 듯 가난한 분들 가운데,
극심한 고통을 겪고 계신 분들 가운데,
철저하게도 혼자인 이웃들 가운데..
신앙이 아주 돈독한 분들이 많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 어딜 가도 의지할 곳 없다보니
오로지 마음 둘 곳은 단 한군데, 하느님 뿐,
하나님만이 모든 것, 하나님만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분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삶 전체, 자신이 지닌 에너지 가운데 100% 전체를
아버지 하느님께로만 향하기 위해 다른 방향의 통로들을 모두 차단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 아버지만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극도의 가난을 솔선수범해서 실천하셨기에
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이 쏠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힘과 능력 전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음 선포만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셨습니다.
◑죽으면 살리라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표현 앞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예수님 제자의 길은 분명 그리 호락호락한 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보다, 자기 가족보다 더 우선순위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 길은
순교까지 각오해야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제가 수녀원에 입회할 때, 가족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수도자의 길을 가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기뻐하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제가 가족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저를 원수처럼 여기는 가족도 있었습니다.
다른 수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들 하나같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수녀원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찌를 듯한 열정은
막상 수도원 공동체에 살기 시작하면 곧 시들해져버립니다.
사랑은 이상적인 생각의 차원이 아니라
나의 몸과 마음에 고통이 따라오는 의지의 차원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구체적인 일상생활 가운데
자기를 버리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가 ‘자기 성취’인 이 시대에
‘나를 찾지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죽음입니다.
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죽기 싫어서
예수님과 힘겨루기를 합니다.
“예수님 정말 제가 죽으면 살 수 있나요?”
◑작품이 나오려면, 체험이 중요하다.
소설가 킹슬리가 그림 전시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전시된 많은 그림들 중에서도
특히 폭풍우 치는 바다를 그린 그림 한 점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마치 자신이 폭풍우 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듯
생생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거든요. 그래서 화가에게 다가가 물었지요.
“어떻게 이런 훌륭한 그림을 그렸습니까?”
그러자 화가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오랫동안 폭풍우 치는 바다를 그렸지만,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폭풍우가 사납게 몰려오는 어느 날 어부에게 배를 빌려 바다로 나갔습니다.
폭풍우는 거세게 몰아쳤고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았어요.
나는 내 몸을 배 기둥에 묶었답니다.
너무나 두려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뱃머리를 돌려 육지로 돌아갈 것 같아서였지요.
결국 나는 배 기둥에 묶인 채 그 사나운 폭풍우를 견뎌냈답니다.
그리고 나서야 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요.”
자신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생생한 작품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머릿속의 상상만으로 그러한 작품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요.
이렇게 내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체험을 시키십니다.
◑칼의 용도 변경을 조심합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분명히 예수님을 우리는 평화의 주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니요?
그러나 이 말은 악과 타협하지 않는 주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칼을 갖고 살아가십니까?
주님께서 주신 칼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어디에?
무엇에?
쓰고 계신지요?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예리한 칼입니다.
그 말씀의 칼은
자신의 혈연에만 연연한 마음을 잘라내게 합니다.
자기 가족만 위해서
자기 자식만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마음을 잘라내는 일에 사용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것이 아닌 모든 것들 이기심, 자존심,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심을 잘라내는 일에도 사용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곧잘 그 칼의 용도를 변경하는 일에 있습니다.
사랑을 빙자하여 상대를 힘들게 하는 일
말씀을 들먹이며 판단하는 일
남의 티를 잘라주는 일,
남의 잘못을 후벼주는 일,
날카로운 칼 날 같은 말로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뾰족하게 날 선 눈길로 상대의 가슴에 피멍을 들이곤 하니까요.
◑좋은 땅, 척박한 땅의 장점과 단점
나무를 심을 때 기름진 땅에 심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척박한 땅에 심는 것이 옳을까요?
당연히 기름진 땅에 심는 것이 좋은 나무를 만드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교회에서 몇 천 그루의 나무를 심었는데,
그때의 경험을 떠올려 볼 때, 좋은 땅에 심은 나무들이 훨씬 잘 자랐던 것 같습니다.
척박한 땅에 심어진 나무 중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죽어 버린 것도 참 많았지요. ←척박한 땅의 단점
그러나 태풍이 왔을 때 저는 아주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름진 좋은 땅에 심어진 나무보다
척박한 땅에서 힘들게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거센 바람을 거뜬히 이겨내더라는 것입니다. ←척박한 땅의 장점
이와 같은 이유로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는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서
일부러 척박한 땅에 포도나무를 심는다고 하네요.
왜냐하면 토질이 좋은 땅에 심은 포도나무는
쉽게 자라서 탐스런 포도송이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땅 표면의 영양분으로도 충분하기에, 굳이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토질이 좋은 땅에 심은 포도나무는
병충해도 많고 기온의 변화에도 민감하며
자연재해에도 약하여, 결국 포도의 품질이 떨어지게 된답니다. ←좋은 땅의 단점
그러나 척박한 땅에 심으면
자라는 속도는 더디고 열매도 늦게 맺히지만,
생존욕구에 의해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답니다.
따라서 포도 맛도 더 깊고, 자연의 변화에 따른
그 품질의 변화도 거의 없다고 하지요. ←척박한 땅의 장점
이 포도나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들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쉬운 일과, 쉬운 돈벌이를 찾지요.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오히려 사람을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척박한 땅으로 상징되는 우리 삶의 고통과 시련이
나를 더욱 더 성장시켜주는 것인데,
항상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려서.. 편하게 지내기만을 원하는 나는 아니었던 지요?
고통과 시련이라는 척박한 땅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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