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발견한 예수 믿는 도리 롬8:1~6 09.08.02.설교녹취/정리/편집
◑롬7장, 바울의 고민과 딜레마 롬7:15~25
▲사도바울의 갈등과 탄식
사도바울은, 오늘날 우리가 가끔 겪고 있는 양심의 고통처럼,
그도 양심을 찌르는 듯한 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만두고, 사도바울 자신이 자기 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한참 의롭고 거룩하게 사는 듯 하다가도
율법이, 양심의 법이 자신을 찌르곤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반복되어 일어나야 하는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8
내가 원하는 것과, 행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자기 속에는 원하지 않지만,
2가지 법이 공존하면서 갈등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을 발견했다.
자기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자기 육신은 죄악의 법이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7:22~23
이 극심한 갈등이 사도바울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4
사도바울은, 자기가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중적인 삶을 사는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내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사도로 자처하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여전히 이 모양인가? 내가 이중인격자란 말인가?’
도저히 그런 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진지한 젊은이였다.
일찍이 20살이 되기도 전에, 그는 수도사로 자원할 만큼 독실한 신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그 엄청난 번뇌, 용서할 수없는 자기 모습 때문에
한 때는 수도원에 자기 방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을 하면서
죽을 각오를 하고, ‘내가 이 문제가 해결 안 되면 나는 여기서 죽는다’ 하면서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수도원 사람들은, 한동안 루터가 보이지 않아서 찾았더니
루터가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혼자 고민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깨닫고, 변화된 후에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특별히 갈5: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사실을 내가 진작 깨달았더라면,
‘이렇게 내가 어리석게 오래 동안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터인데.’
라고 술회한 바 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2가지 법이 씨름하면서
‘이중인격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 안하면 안할수록’
‘그럴 수 없다!’라고 하면 할수록 더 고통 속에 들어간다는 얘기다.
요지는, 자신의 전적 타락성total depravity을 일단 인정하라는 것이다.
자기 속 내면이 이중인격자인 것을, 일단 고스란히 인정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타락성을 인정한 바울
바울은 그 깊은 몸부림 가운데 빠져 있는 자기 자신을, 이제 내동댕이치기로 작정했다.
바울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 결과 롬7:25에서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라고
자신의 타락성을 고스란히 인정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갈망하지만,
내 육신으로는 여전히 죄악의 삶과 깊게 연계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말하자면, “나는 이중인격자야!” 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했고, 롬7:15~25에서,
자기 자신이 그 현실을 고스란히 스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신앙의 좌절과 실패는.. 자기 힘으로 잘 믿으려고 할 때이다.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아직 절실하게 깨닫지 못한 때이다.
자기 힘, 자기 노력, 자기 의.. 이런 것들은 빨리 좌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데...
◑롬8장, 바울의 반전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7장 마지막절과 8장 1절 사이에는
행간에 많은 의미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오래 묵상한 것 같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오늘 나에게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네가 너를 정죄하는가?’
내가 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죄를 사하고, 죽었고, 부활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너는 믿느냐? .. 그것은 헛된 일인가?
그러므로 누가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야?’ 하고 나온다면,
우리는 퍼뜩 롬8:1절로 대답해야 한다. 자기 속으로 암송하면 된다.
혹시 자기 양심이 자기를 정죄할 때도 있다.
그 때도 마찬가지로, 이 구절을 암송하면서,
바울처럼, 루터처럼.. 그 정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게 진리요, 진실이니까.
바울은 마침내 깨달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는 탄성을 지르게 되었다.
여러분, 이 롬8장을 읽을 때, 바울의 탄성이 들리시는가?
바울과 비슷한 고민을 하던 루터도 자기 무릎을 쳤다. ‘맞아 바로 이것이야!’
이런 깨달음과 탄성은 결코 자의적인 결심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역사였다. (우리도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그래서 본문 2절에서 바울은 또 다른 탄성을 쏟아낸다.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고 살게 되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자기 속에 계신 성령께 순종해서 사는 삶을 뜻한다.
자원해서 성령께 순종해서 율법을 지킬 때.. 그 율법은 생명과 성령을 준다. 그래서 '생명과 성령의 법'
‘죄와 사망의 법’은
윤리적, 도덕적으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서 살려는, 예수 믿기 이전 삶을 뜻한다.
이것은 율법의 역기능이다. 자기 힘으로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율법이 '죄와 사망만 주는 법'이 되었다.
내 속에 예수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내주하고 계심을 믿고서
내 속에 계신 그 성령에 교제/동행/순종하며 사는 삶을
내가 느끼고, 깨닫고, 현실에서 적용해서 살 때..
이 순간을 일컬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이 예수 믿는 도리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는 해방되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강압하고 누르는 윤리교과서가 아니라
복된 소식(복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바울은 앞선 롬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며
깊은 탄식을 하였던 바 있는데,
‘죄와 사망의 법’에만 얽매인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법적으로 (현실과는 조금 다를 수 있음)
‘생명과 성령의 법’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옛 법에서는 해방되었다.
이제는 자원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율법을 지키려 하므로.. 법이 내게 생명과 성령을 더하여 준다.
참고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도 가르치신 것이,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율법을 겉형식이 아니라, 네 마음으로/본질적으로 지키라는 것이었다. 살인하기 전에, 미움부터 버리다 등.
로마서는 그것을 저 자세히 설명한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다.
▲8:3~4, 영을 좇아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며 살게 되었다.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영을 좇아서 행하는 우리에게' ... 우리가 내주하시는 예수의 영을 좇아 살려고 할 때
쉽게 말해서 성령의 인도를 늘 받으며 살려고 할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심' ... 2가지 뜻으로 나누어 해석해 보면,
① 영을 좇아서 살면, 율법을 자원해서 지키며 살게 된다. 즉 율법의 요구를 이룬다.(도덕적 완전주의는 아님)
② 그 과정에서 설령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고, 어긴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이미 율법을 어긴 죄값을 다 치르셨으니.. 율법의 요구(죄의 삯은 사망)는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기 전에는
도저히 하나님의 영Spirit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즉, 부활하신 예수가 성령으로 내주하고 계시기에
그 영을 좇아서 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게 되는데,
과거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율법의 요구인, 죄의 삯인 사망의 대가를 치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적으로 성화의 길을 걷는 것이다.
▲8:5~6, 영Spirit을 좇아 살면.. 생명과 평안을 누린다.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자유인이 되었기에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따라서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생명의 풍성함과 평안함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구원 받을 백성들이 누릴 특권이다.
▲칼빈은 이러한 경험들을 일컬어서 <이중적 은혜>라고 말했다.
“믿는 사람들은 이중적 은혜를 덧입는다.
첫째는 우리가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우리는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지속적으로 성화되어간다는 사실이다.”
의롭게 된 사람은, 동시에 성화를 이루어가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신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죄 지을 자유도 있고,
성령을 따라 살 수 있는 자유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현실에서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불순종의 삶, 죄악의 삶은
바로 이 선택의 삶을 우리가 남용한 것이다.
만약에 죄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그냥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벌써 죽어가는 사망의 삶을 경험할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생명과 평안이 없고, 사망의 고통이 있다. 8:6a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 법이 나를 강권해서, 순종의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인도하신다.
그래서 어쩌면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보다 징계를 많이 받기도 한다.
성령이 나를 강권해서, 순종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면서, 안 되면 징계도 하시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
롬7장 후반부의 사도바울의 갈등은
마르틴 루터의 갈등이었으며,
오늘날 우리 자신의 똑같은 갈등이다.
사도바울은, 7장에서,
그런 곤고한 자신을 솔직히 인정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전적 타락한 존재’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인정’을 강조한다.
자기가 타락한 죄인임을 바울처럼 (개인적으로도 괜찮음) 인정하고 나면.. 갈등과 번민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것을 부인하고, 인정 안 하려고 하니까.. 늘 갈등, 번민하고, 외식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정할 때, 나는 구세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간절히 애타게 붙잡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내 공로, 내 의로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다 내버려야 한다.)
예수님 공로, 예수님의 의를 덧입어 하게 된다.
(롬1:17절에서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의도.. 예수님의 의를 내가 덧입고, 수여 받는 개념이다.)
그 다음 롬8장에서 바울이 깨달은, 예수 믿는 도리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을 좇아서 살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8:6절에, 생명과 성령의 법을 따라 살 때.. 생명과 평안을 얻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과/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 교제, 임재, 친밀함을 나누는 삶을 뜻한다.
이런 맥락으로 롬8:7절 이하를 읽어보시라. 같은 흐름과 맥락이 이해되실 것이다.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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