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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인 사랑

LNCK 2010. 6. 27. 23:35

◈새 계명인 사랑                        요13:34~35                     스크랩, 정리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13:34



◑사랑의 속성 - 감격과 감동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권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묵묵히 그 십자가를 지고, 순교합니다.

그분의 사랑에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랑은 감동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감동시킨 것처럼’ 너희도 서로 감동을 주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쉽게.. 사랑을 물질로 저울질합니다.

감격의 사랑이 아니라.. 돈이 되는 사랑을 생각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물질을 받아야..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가 이웃에게) 물질을 주어야.. 주님의 사랑을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감동을 주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만 생각하며 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

이 생각을 극복하지 못하면 ‘감동을 주는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감동을 주면 ‘감동’이 돌아옵니다.

때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모습으로 되돌아옵니다.


오늘 우리는, 위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을 바꾸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서로 감동을 주고 있습니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사랑은.. 형식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당신 제자들의 정체성은

바로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삶’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요13:35



◑‘새 계명’은 보다 적극적인..


주님께서는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시겠답니다.

그런데 새 계명을 주신다니 헌 계명이 있다는 뜻이지요.

헌 계명이 무엇일까 생각하니, 구약의 율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과 ‘헌 계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구약의 율법이나, 십계명을 보면 전반적으로 Negative합니다.

십계명을 놓고 볼 때, 대부분 ‘하지 마라’는 계명입니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등.


그런데 이 계명들도 사랑의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피해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

이것도 사랑이고, 이것이 사랑의 기본이지요.

 

그런데... 자기는 사랑을 실천했는데, 남에게는 피해인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종종 범하는 잘못이 이것인데,

저는 사랑으로 도움을 주었는데.. 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저는 사랑으로 좋은 일을 했는데.. 다른 사람의 기를 죽이고,

저는 사랑으로 말을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등,


제 사랑만 믿고 다른 사람을 헤아리지 못해

저는 사랑을 했노라 만족하지만

그때 다른 사람은 그로 인해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 청년 때 이런 저를 깨닫지 못하다가

“너에게 좋은 것이 남에게는 칼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쪽으로 조심을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너무 조심을 하다 보니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 하면 피해 줄 일도 없겠지요?


이런 식으로 한동안 소극적으로 살다가 어느 날 생각해보니

이런 삶은 피해를 주지 않을지는 몰라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하지 않고 사니까

삶의 의욕과 활기도 잃고 사는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대수가 아니고

더 잘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잘 사랑하는 것,

어떤 것이 더 잘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적극적으로, 감동적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튼 주님의 사랑 방식은?

주님의 사랑은 남을 죽이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을 살립니다.

주님의 사랑은 남의 기를 꺾지 않고.. 오히려 기를 살립니다.

주님의 사랑은 남을 억압하지 않고.. 자유와 해방을 줍니다.


   이렇게 남을 살리고 자유와 해방을 주는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에 이어지는 복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당신이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은총과 축복은 하늘에서 내립니다.


돼지 한 마리가 우리 안을 이리자리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열심히 주워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엇인가 돼지 옆에 툭 떨어졌습니다.

감나무에서 빨갛게 잘 익은 홍시 하나가 떨어진 것입니다.


돼지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서 쳐다보다가 입 안에 넣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달착지근한 것이 입에 착 달라붙어 기가 막히게 맛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와~ 이거 꿀맛이네.. 꿀꿀~’


그리하여 돼지는 꿀이 또 먹고 싶어서 우리 안을 샅샅이 다 뒤졌습니다.

돼지는 홍시가 땅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돼지는 신체구조상, 목이 뒤로 안 젖혀지기 때문에, 하늘을 쳐다보지 못합니다.)


땅을 아무리 파도, 홍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올 리 없습니다.

그러나 돼지는 땅만 쳐다보므로, 땅 속 아니면 홍시가 나올 곳은 전혀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돼지는 뾰쪽한 주둥이로 땅을 마구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멀쩡한 우리를 온통 뒤집어놓은 돼지를 보고.. 주인이 어떠했겠습니까?

화가 나서 돼지를 마구 두들겨 팼지요.


움직이지 못 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돼지가

드러누워 하늘을 보고 끙끙거리고 있을 바로 그 순간,

돼지의 얼굴 옆에 너무 익어서 곯은 홍시 하나가

우리 곁의 감나무에서 철퍼덕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돼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늘에서는 감이 떨어질리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잘 익은 홍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표현을 양해 바랍니다) 이 돼지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은총과 축복을 찾아서 돼지처럼 땅을 뒤지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행복과 축복이 있다고 여기고,

   그래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땅을 파헤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총과 축복은, 이 세상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맛있는 감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정확하게는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이지만),

은총과 축복도 하나님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대가를 요구하는 은총과 축복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무상으로 떨어지는 은총과 축복입니다.

 

   그 은총과 축복 중에 가장 구체적인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

   즉 주님의 사랑을 위로부터 받은 만큼만, 나도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못 하는 사람, 사랑이 도저히 안 되는 사람은,

   (상대가 얄미워서가 아니라)

   내가 아직 위로부터 내리는 사랑의 은총이.. 고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성 어거스틴-    



◑영안 靈眼


인도에 가면 많은 인도 여성들의 미간에 붉은 점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절에 가면 모든 부처상의 미간에 보석이 박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여인의 화장이요 부처의 치장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눈을 인도 사람들은 제 3의 눈(the third eye),

지혜의 눈(the eye of wisdom)이라고 하고

불자들도 혜안慧眼, 즉 지혜의 눈이라고 합니다.


이 혜안은 육신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그런 것들과

그런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이 혜안이 없으면, 사람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밖에 볼 수 없고,

눈에 보이는 세계만 알 수 있습니다.

(이 혜안을 기독교 식으로 표현하면, 영안입니다.)


   믿는 사람만이 영안靈眼이 열리고

   영안을 가진 사람만이

   보이는 것 너머의 존재와 세계를 보게 됩니다.


   영안을 가진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다른 사람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영안이 아직 열리지 않은 사람은

   늘 ‘자신 속에 있는 그리스도’밖에 보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