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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4~2005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LNCK 2010. 7. 17. 20:27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딤후1:1~8     -스크랩, 출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                         1:2, 4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딤후1:2

 

▲생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보고 싶은 제자 디모데

바울의 그 모든 서신서 중에, 디모데후서가 제일 마지막 서신이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서라고 까지도 말한다.

마지막에, 사람이 그리운 그 시간에 가장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한다.

 

딤후4장 끝에 가서 보게 되지만, 이제 그는 머지않아 순교하게 된다.

그런 것을 본인이 예측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겨울을 나게 된다.

이 겨울을 지나서 봄에 순교하게 되는데, 그런 종말을 앞두고

또 추운 겨울을 맞아 지내야 되고 하는 이런 상황 속에서,

그러니까 이제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또 추운 마지막 겨울을 보낸다.

 

이런 가운데서 이 편지를 쓴다. 그래서 이 마지막 끝에 가서 보면

"겨울 전에 속히 오라" 하는 그런 이야기도 있다.  4:21

 

그래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보고 싶어하는

그 바울의 마음이 이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본문 가운데도 "내가 너 보기를 원한다" 하는 간절한 표현이 있다. 1:4

보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디모데가 바울에게 ‘아들’인 이유

딤후1:2절에 보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라고 말한다.

바울과 디모데 사이에 혈육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아들이다. 바울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믿음의 아들이다.

 

옛날에 ‘아들’이라 할 때 몇 가지 의미를 가진다.

①하나는 혈통이 이어져야 된다. 아들이 아버지의 피를 이어서 그 아들이 되는 것이다.

 

②또 하나는 권세적 의미가 있다. 아버지가 귀족이면 아들도 귀족이다.

아버지의 그 권세, 혹은 사회적 신분이 그대로 아들에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③그 다음에 또 하나는 지식적 의미에서의 아들이 있었다.

옛날에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는, 혹은 사회에서 배우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부모로부터 배웠다. 부모가 가르쳐 준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농부일 때 그 농사하는 법을 다 가르쳐 준다.

나름대로 또 비법도 있다.

 

어떤 것은 어떻게 해왔고 또 어떤 것은 어떻게 하면 되더라.

그 많은 경험, 거기서 얻어지는 노하우가 있다.

이런 것들을 다 자식에게 물려준다.

그래서 목수의 아들이 목수요, 어부의 아들이 어부가 된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가 평생 경험하면서 배우고 익힌 것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그것을 물려받아야 아들이다.

엄격히 말하면 농부의 아들이 농부가 안 되면, 이 차원에서는 아들이 아니다.

또 랍비의 아들이 랍비가 못되면, 이런 차원에서 아들이 못된다.

 

④아들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이다.

아버지의 기업이 아들을 통해서 이어진다. 이것을 유산이라고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버지에게 물려받는다는 특권이 있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유업을 지켜야 한다는데 있다.

 

명예와 재산과 또 그 뜻과 그 하던 일을 그 유업을 그대로 지켜가야 하고

또 더 발전시키고 더 부흥케 해야 된다.

그런 귀한 사명이 있는 사람이 바로 아들이다.

 

그런데 디모데는 그런 의미(위 ②,③,)에서 충실한 아들이다.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뜻을 그 아들이 이어갈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지만,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삶/정신/지식이 이어질 때..

이게 진정한 아들, 참 아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라고 부른 것이다. 이점을 깊이 생각해야 된다.

이제 바울은 세상을 떠난다. 이제 그 뒤에 ‘아들’을 통해서 이어질 것이다.

그런고로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로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바울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고, 바울의 말을 다 순종하고,

또 바울의 뜻을 그대로 이어가는 그런 의미에서.. 디모데는 ‘진정한 아들’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다.

   여기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있다.

   바울은 앞서 갔고 아들 디모데는 뒤따라온다.

 

   그래서 이 교회사에 보아도 이 디모데의 역할은 대단하다.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해서 구속사는 역사 속에서 계속 이어지게 된다.

 

▲4절,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오늘 본문을 보니까 사랑하는 믿음을 아들을 그렇게 보고 싶어한다.

그것은 임종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나이도 많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겨울이 가까이 오니까 추워지고

이런 때에 더더욱 믿음의 아들이 생각이 난 줄로 안다.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자, 저를 만남으로, 그리고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기쁨을 얻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 정말 친부親父와 같은 마음이다.

 

▲적용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 ... 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가?

이 말씀을 볼 때마다 ‘내가 정말 믿음의 아들이 되었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내가 누구의 아들이 되었나?’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지만,

오늘 이 세상에서도 분명히 스승의 영향을 받고 있다. 나 혼자 되는 게 아니다.

그런고로 ‘나는 누구의 믿음의 아들이 되었나?’ 한 번 생각해 보자.

 

바울 자신도 그런 말을 했지 않는가? 바울이 롬16: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그에게도 믿음의 어머니가 있었다. 바울은 그 어머니의 ‘믿음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②다음으로.. 내게는 또 믿음의 자녀가 있느냐? 그리고 몇이나 되는가?

아마도 일생을 살면서 ‘나는 아무개(내 이름) 선생님의 믿음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내 주변에 몇 사람이나 있는가?

이걸 또한 생각해야 되겠다.

 

내 신앙적 인격, 또는 내 신학적 자세, 또 내 경건,

이런 것을 통하여 예수를 믿고, 그리고 나를 본받고

그리고 중심에서부터 ‘저분이 내 믿음의 아버지다, 나는 그의 믿음의 자녀다’,

이렇게 부르고 이렇게 평생을 사는 그런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이다.

 

③어느 회사나 기관을 운영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적어도 어떤 일을 하나 하려고 할 때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자기 주변에 적어도 몇 사람이,

‘나는 이분과 생명을 같이 하겠다. 온 운명을 같이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어도 몇 사람은 있어야 된다. 그렇지 않겠는가?

 

저는 얼마 전에 김봉학 장로님과 같이 일본에 있는 공장에 방문해 본 일이 있다.

그때 제가 같이 방문해 보고, 김 장로님을 더욱 존경하게 된 것은

그가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다.

"나와 같이 이 회사에 30년 이상 있은 사람이 200명이 넘습니다"

 

‘그 회사에 30년 이상 같이 있은 사람이 무려 200명이 넘는다.’

이 얼마나 굉장한 이야기인가?

그때 제가 만났는데, 자기를 소개하는 그 비서도 24년 일했다 하더라고요.

나와 같이 이 회사에 있은 지가 24년이래요. 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정말 고등학교 마치고 들어왔다는데 이제는 24년 지났으니까 몇 살인가?

아주 뭐 아주머니더라고요. 바로 이래서 김장로님이 훌륭한 분이다.

 

④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한 번 만났다가 도망가고..

한 번 만났다가는 배신하고..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이거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정말 바울에게는 믿음의 사람이 여러 사람 있었다.

그 중에 디모데가 첫째다. 가장 중요한 아들이라고 생각된다.

 

여러분 주변에 한 번 생각해 보라.

정말 나와 함께 하고, 내 뜻과 함께 하고, 내 신앙과 함께 하고,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당당하게

 

‘나는 아무개 선생님으로 인하여 예수를 믿었고,

아무개 선생님을 본받아 살고 있고, 그 분은 내 믿음의 어버이가 되십니다.

나는 그 분의 믿음의 자녀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이점을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이 선한 사업이, 내가 하고 있는 이 귀한 역사가

계승되고, 이어져 내려가야 할 것이다.

이런 전승적인, 혹은 전통 있는 그러한 신앙, 그러한 신앙생활이 되도록

우리 모두 기도로 하나님께 부탁드리자.

 

 

◑신앙의 전통이 중요하다.               1:3, 5

 

▲3절,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5절,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랑하는 아들', 이것도 신앙적 전통이 담긴 말인데

또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하는 말도

내 신앙이,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조상 적부터 이렇게 전통적으로 전해 계승되어 오는 신앙이란 말이다.

 

이게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다.

또 디모데에게 있는 믿음도, 자기 스스로 가진 믿음이 아니다.

어머니와 외조모로부터. (아버지는 헬라 사람이다)

그들을 통해서 전해 내려옴을 통해, 얻어진 믿음이다.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가?

믿음은, 대개의 경우, 혼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렇게 전통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에 정확한 통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외국에서 나온 통계에 의하면

교회학교 아이들, 학생들이 교회 와서 뭐 장난하다 돌아가고

어떤 때는 그저 성경 한 마디도 안 듣고 가는 것같이 보이지만,

 

교회학교 다닌 아이들의 통계를 보면

나중에 커서 85%가 확실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 어렸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어른들은 열심히 들으면서도 진짜 들은 것은 없는데

아이들은 장난하면서도 다 듣는다. 그게 다른 것이다.

아이들일수록 학습능력이 크다. 그리고 어른들일수록 학습능력/기억력이 떨어진다. 

 

더구나 부모님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

또 신앙적으로 믿음의 부모님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교육은 젊을수록 효과가 있고, 30살 되기 전에 배운 것은 평생 기억한다.

 

우리의 믿음도 전통성을 가져야 된다.

내 혼자서 개혁적이니 하는 것 보다는,

조상 적부터 전해진 믿음..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 교인들에게 ‘조상적부터 내려온 믿음’은 생각할 것이 많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가톨릭, 개신교를 막론하고) 많은 순교자를 냈다.

우리 기독교 전통은, 순교하면서 전해진 믿음이다.

 

그 외에도 새벽기도, 교회의 자립(조선 선교 초기부터 외국 원조 거의 안 받음. 네비우스 원칙에 의거,

조선 사람이 헌금해서 교회당 지었음. 외국과는 다른 전통) 등 자랑스러운 전통들이 있다.

이것도 기억해야 된다.

그래서 물론 개혁도 해야 되고 새로운 것도 생각해야 되겠지만,

그러나 조상 적부터 내려온 좋은 점, 아름답고 귀한 그런 전통은

계속 이어져야 할 줄로 안다.

 

또 이것은 겸손한 마음이기도 하다. 내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

또 어머니와 외조모에게 있던 믿음,

이런 믿음 속에서, 자기 세대에 그 믿음을 또 지켜가고

또 많은 믿음의 자손들에게 이어주는 그런 <전통을 계승하는 신앙>이 되어야 될 줄로 안다.

 

▲적용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제 아이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자.

그러면 "어머니" 할 때 무엇을 생각(연상)할 것 같은가? 이를 깊이 생각해야 된다.

 

지금 나는, 자녀들에게 무슨 인상을 우리는 주고 있는 것인가?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분이지만, 그분을 생각할 때, 내 마음에 떠오르는 게 뭔가?

우리는 자녀들에게 지금 귀한 본을 보여주어야 된다.

이건 말로 되는 게 아니다. (내 등 뒤로, 자녀들은 내 등 뒤에서 보고 배운다) 깊은 인상을 주어야 된다.

 

그래서 "어머니" 하면

'아, 우리 어머니는 기도의 어머니다.'

'우리 어머니는 봉사하는 어머니다.'

'우리 어머니는 베풀기 좋아한, 그저 아낌없이 남 주기를 좋아하던 분이다.'

또한 '교회를 위해서라면 충성을 다하던 어머니요 아버지다.'

이렇게 기억되어져야 할 것이다.

 

어떤 분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있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를 본받지 않기로 맹세한 사람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본받아야 하고, 또 본받는 게 순리다.

이걸 본받지 않고 살아야 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인가?

그래서 믿음의 전통, 믿음의 본, 이건 대대손손 이어져야 된다.

 

또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도 말씀했듯이

"내가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 그런고로 나를 본받아라." 고전4:15~16

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가?

 

▲신앙의 모계적 전통(신앙과 인격은, 주로 엄마를 본받는다는 말)

디모데가 훌륭한 제자요 목회자가 된 것은, 바울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본래 유대교적인 신앙을 가진 것은

어머니와 외조모로부터 받은 것이란 말이다.

(즉 신앙의 부계적 전통은 바울을 통해서,

모계적 전통은 외조모와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둘 다 있었다.)

 

유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 특별하다.

우리는 아직도 철저하게 부계가 강한 사회다. 성姓도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것이 있다.

본래 이스라엘 사람은 성이 없다. 다 한 형제이기 때문에 성은 없다.

그래서 이름만 있다. (그건 참 잘한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렇다.

이스라엘 남자와 이스라엘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

그러면 그 아이는 이스라엘 아이다. 틀림없이 이스라엘 자녀로 인정된다.

 

그러나 가령 이스라엘 남자와 이방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 하면

그 아이는 이방 사람이다. 이스라엘이 못된다.

그런데 이스라엘 여자와 이방 남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으면

그건 이스라엘 자손이다. 유대교 신앙은 철저하게 모계로 이어진다.

 

이점을 깊이 생각해 보시라.

결국은 어머니가 낳아서 키우면서

어머니의 전통을 따라서 신앙이 이어지는 것이다.

 

종교학적으로 보아도 이 감성의 문제, 혹은 세계관의 문제,

이런 것들은 모두 어머니로부터 이어진다.

더구나 성품은 정말 어머니로부터 이어진다.

생활의 자세, 그거 어머니로부터 이어진다.

그런고로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물려받는다는 사실, 이건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디모데는, 어머니와 외조모로부터,

전통적으로 이어받은 유대적인 신앙에다가

바울로부터 전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런 사람이다.

이런 전통 있는, 전통성이 확실한 그런 믿음이다.

 

 

▲관련글: 전통의 울타리를 허물지 말라

어떤 한 젊은이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부모가 평생을 땀흘려 일구어 놓은 포도밭이었다.

이 포도밭으로 인해 젊은이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가족이 먹고 사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대상이었다.

 

젊은이는 물려받은 포도밭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더욱 더 발전을 시킬 것을 다짐했다.

사방이 튼튼한 울타리로 둘러쳐진 포도밭,

이 울타리 안에는 울창한 포도나무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울타리에는 포도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울타리를 없애버리고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으면 더 많은 포도를 수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포도밭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울타리를 베어버렸다.

 

얼마 뒤, 이 포도밭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을까? 아니다.

포도밭의 포도나무들은 점점 망가져갔다. 울타리를 베어버리자

사람과 짐승들이 마음대로 포도밭에 들어와 나무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포도가 열리진 않지만

포도밭을 보호해 주는 울타리도

포도나무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위의 어리석은 젊은이처럼

   울타리보다는 포도밭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요하다.

   포도나무가 없다면 포도열매가 맺히지 않으니까.

   그러나 울타리 없이는.. 포도밭도 제대로 존재하기 힘듦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모습은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름대로 성공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시라.

그들이 과연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었을까?

아닙니다. 그를 도와준 가족, 친구, 동료,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부모님들은 고생하면서 어엿한 성인으로 길러주셨으며,

선생님들은 정성껏 지도하여 훌륭한 인재로 길러주셨다.

그리고 친구의 응원과 격려를 통해 인정과 우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능력과 재주만으로 모든 것을 일구어 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과 단죄를 얼마나 자주 행하고 있었던지?

그들을 통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보다는

그를 밟고 올라가야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고마운 분(울타리)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존재함, 그 자체로 감사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다.    <이 단락 펀 글>


 

◑처음 믿었을 때를 꼭 기억하라                     1:6

 

▲6절,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또 게다가 바울은 말한다. "내가 네게 안수했다."

바울이 안수할 때 아마 그가 큰 감격이 있었던 것 같다. 대개 그렇다.

이 안수는, 목사 안수식의 안수 같은 '특별한 안수, 처음 안수'의 뉘앙스가 있다.)

 

대개 다 안수 받을 때는 큰 감격이 있다.

정말 뜨겁게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내가 이대로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하는 그런 비상한 각오가 생긴다.

 

저도 기억하지만, 안수 받는 날 아침에 제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저는 믿고 있다.

'하나님, 나는 병원에서 죽지 않게 해 주십시오.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적으로(예를 들면 설교하다가) 죽게 해주세요.

오랫동안 앓으면서 죽지 않게 해주세요.

그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기도했다. 

(목사 안수 받을 때?) 그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

 

오늘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했다. 안수할 때 뜨거운 감격이 있고

아주 온전한 헌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에 ‘그 안수할 때에 불일듯하던 것을,

그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1:6

 

그 안수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꾼으로 (처음) 세움을 받을 때 그때의 감격,

그 순수한 마음 고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이런 뜻이다.

 

▲초심을 버리지 말아야...

사실 이 첫 사랑, 처음 감격, 이 처음 결심, 얼마나 중요한가?

그 첫 사랑, 처음 결심 그대로 살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관련글 :  정말 내가 빚진 자라면.. 중 '포도원 품꾼의 초심, 빚진자 의식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딤후1:7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라는 말씀이다.

 

지금 사도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혀 있다.(2차 투옥)

디모데는 지금 감옥 바깥에 있지만, 남의 일이 아니다. 움츠려들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럴 것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1:8

 

꼭 감옥에 있는 것만이 고난이 아니다.

순간순간 사건마다에서 언제든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이렇게 명령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