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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실패, 은혜로 가능하다 2553

LNCK 2010. 7. 15. 18:56

◈베드로의 실패, 은혜로 가능하다            마26:31~35        10.05.02.설교녹취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중요한가?

이 부분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베드로는 진심이었지만..


▲베드로의 실패와 예수님과의 만남 (1차)

갈릴리에서 고기 잡던 어부 베드로에게, 하루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이 날은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낙심한 날이었다.

그 때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눅5:4


이 말씀에, 베드로가 순종할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베드로는 경험한다.


베드로는 그 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 ↙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5:5              주1)


그 고백을 들으시고,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로 초청하신다.

이 초청 앞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눅5:11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베드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26~27


이 말씀을 과감하게 실천한 사람이 베드로였다.

참 보통 사람이 결단할 수 없는 그것을, 베드로는 결단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우리들중에,

누가 베드로처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후에, 베드로는

때로는 믿음이 없다고 책망도 듣기도 하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라는 심한 꾸중도 들었지만,

그는 3년 동안 뒤돌아서지 않고, 주님을 잘 따라다녔다.

그리고 예수님과 마지막 저녁 만찬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시다.

예수께서 식사를 하시다 말고,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 말씀 앞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한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른 사람들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26:33                                   주2)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26:34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26:35


그런데 베드로가 이렇게 호언장담한지 불과 2시간 후에,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설교의 맥

베드로가 어영부영 믿어서.. 주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보다도 더) 열심히 주님을 따르다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이것이 이 설교의 맥락이다.


베드로는 정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던 사람이다.

주를 향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다. 마16:16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님을 따랐던 사람이었다.

파도 치던 물 위로, 배에서 뛰어들었던 남다른 믿음의 사람이었다.


더욱이 예수님이 수난을 예고했을 때,

'내가 예수님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예수님을 지키랴?'는 갸륵한 마음으로,

그 날부터 칼을 차고 다녔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다. 그러다가 말고의 귀를 베기도 했다.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친 사람,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한 마디로, 대단한 열심 있는 제자였다. 절대로 어영부영 하지 않았다.


▲베드로의 진심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대목           주3)

 

   그런 그가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그런 그가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할 교훈은 과연 무엇인가? ←문제 제기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몰랐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직시하지 못했다... 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이 있는 줄 알았다.

자기가 예수님 제자인줄도 알았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도 알았는데,

그가 몰랐던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베드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 인간 모두는, 아담의 타락한 죄성을 유전적으로 갖고 태어난,

‘전적 부패한 인간’임을.. 베드로는 아직 절실히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바울의 고백을

베드로는 이 시점까지, 아직 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나 이럴 수 있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은

   이렇게 쉽게 자만심self-confidence에 빠진다.


   다 아시겠지만, 지금 이 이야기를, 베드로의 이야기로 들으시면 안 된다.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들어야 한다.


여러분,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고, 주님을 위해 헌신했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자기의 확신과 고백과 상관없이.. 자기가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다.


이 베드로의 모습을 살펴보면, 바로 우리의 모습과 똑같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내 시간을 드리며, 나의 물질을 드리며,

심지어 나의 생명도 드린다고 찬양하고 고백하지만,


내 당장 삶의 현장에서는,

내 시간도, 삶도, 헌신도 드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실상이다.


우리는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찬양하며

주님께 내 생명까지 드리겠다고.. 헌신하고 고백하지만,

실제 예배 마치고, 우리 삶의 현장에 돌아가면


나의 시간, 나의 삶, 나의 재능, 나의 물질까지도

아까워서 드리지 못하는 것이, 하염없이 주저하는 것이

바로 나라는 이 사실을.. 우리가 모를 수 있다.

또한 세상의 유혹 앞에서.. 쉽게 주님을 부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처럼!

 

그저 교회당 안에서는,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 같지만,

삶의 현장에 돌아가면, 한없이 무기력할 수 있다.. 는 사실을

우리가 그냥 잊어버린 채로, 덮어 두고서, 지금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그럴 기회가 오면, 우리도 언제든지 주님을 부인할 수 있다는

그런 연약한 존재임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냥 대충 대충 살아갈 수도 있다.


내가 고백한대로, 내가 선포한 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고, 맹세하고, 결심하고, 결단하는 것

이런 것을 지킬 능력이 내게 없다. 내 말하고, 내 삶하고는.. 일치하기가 어렵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진심어린 고백이었다.

거짓이 섞이지 않았고, 정말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고백과 정 반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런 신앙 생활의 실상을 평소에 깨닫지 못하다가

   그가 주님을 부인하고 난 이후에,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여러분, 우리도 베드로처럼 속고 있을 수 있다.

주일날 우리가 예배당에 나와서 찬양과 경배 드리고

구역예배에 참석하고, 전도도 약간 하고,

식당에서 봉사도 하고, 내가 맡은 부서에서 봉사도 하고,

그러면.. 자기가 그런대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자.

지금 내가 신앙생활 하는 것,

고작 이 정도의 크리스천을 만드시려고

주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에 달리셔서 물과 피를 흘리신 것일까?



◑주님의 부르심의 본질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아마 실망하지 않으실까?

지금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

이 정도의 신앙생활을 하는 제자들을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귀한 십자가를 감당하셨는가?


물론 여러분의 섬김과 봉사는, 매우 귀하고 아름답다.

어떤 분은, 정말 자기 힘에 겹도록 주님을 섬기신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대부분은,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자.

정말 고작 이 정도의 내 신앙생활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구원하셔야 했나? (아니, 그 이상이다.)


우리는 이 시간, 심각하게,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되기를 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온 삶을 드려서 그 분과 교제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라고 수도 없이 들었지만,

여러분은 진정 그 삶을 살고 계신가?


▲예수님은, 이런 신자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셔야 했는가?

주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들어오지만

번영과 풍요의 축복을 바라며

하나님이 내 소원을 성취시켜주시는, 나의 수단쯤으로 여기지는 않는가?


진정한 하나님 섬김을, 나의 삶의 목적으로 삼고,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이 일을 위하여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심각하게 자기를 돌아보기 원한다.


정말 하나님의 비전 앞에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주님을 따르는 참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이.. 우리 중에 과연 몇 %나 될까?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름은

번영과 풍요로의 부름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것으로.. 주님이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다.

이 세상에서 내가 편안하게 살기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다.


▲1. 주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부름이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딤후2:3~4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영적 전쟁에 우리를 내보내시는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에 영적 전쟁에서 싸워야할, 그리스도의 군사로 우리를 부르셨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편히 사는.. 풍요로 부르심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군인처럼, 고난을 받는 사람이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를 군사로 부르신 그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군사로 헌신하는 삶을 산다.

여러분, 오늘 우리 가운데, 이런 성도가 과연 몇 %가 되는가?

 

여러분, 제3세계 국가들이 부패하고, 못 사는 이유는.. 군인들이 부자가 되기 때문이다.

군벌들이 권력과 이권을 독점하면서 치부하면서.. 국민 전체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 받은 자들이.. 부자 되려고 그러면.. 큰 일 난다.

부자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제자들은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다. 군사로 충성하다보니까...  


▲2. 또한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이다.

눅9:23절 등 신약성경에 가장 많은 빈도로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다.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기록된 것은, 그만큼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것은, ‘나와 함께 죽자’는 것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 가운데 주님과 함께 죽을 사람이 누구인가?

정말 주님과 함께, 죽을 자리까지 나아갈 각오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도리어 주님의 도움으로 살(축복받을) 각오한 사람이.. 대부분 아닌가?


예수의 복음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 제자들은,

다 복음의 삶에서 실패한 삶을 살고 말았다.

그들 중에 누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았는가?


어떤 분들은 대놓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교회에 왔는데, 왜 내 삶의 형편이/사업이/진로가 술술 풀리지 않는가?

과거보다 더 잘 되어야 하지 않는가? 거참 이상하다.’


여러분, 이 교회에 나오면

사업이 잘 되고

가정의 문제들이 다 해결되어지고

그렇게 하라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같이 죽자. 너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이다.


그것이 영생의 관점에서 볼 때는, 더 좋다는 것이다.

물론 현생에도, 말할 수 없는 감격과 복음의 영광이 따르지만..


▲근래에 제가 몇 번의 장례식을 집례하고 나서, 제 삶을 돌아보았다.

어떤 때는 제보다 나이가 어린 분이 돌아가신 적도 있었다.

입관예배 드릴 때, 수의를 입히고, 그 마지막 누운 모습을 보면서,

제 모습을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만약 내가 저 자리에 수의를 입고 지금 누워있다면)

참 제가,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다.

50평생의 삶을 살아오면서,

지난 50년 동안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주님이 나를 참아주시고,

주님이 나를 기다려주신 것 외에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인가?


고작 지금 이 정도의 믿음으로 살라고..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나?

고작 지금 이 정도 수준으로 살라고.. 주님이 나를 이제껏 제자로 부르셨나?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뭔가 주님이 용서하시고, 참고, 기다려주신 것에 대한

   결론을 맺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

   (주님이 내게 작정하신 목적을,

   나를 부르신 목적을 정말 이루어드리는 삶을 목표로 살아야 되겠다.. 라는 뜻)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 ‘거룩한 불만족’이 필요하다.

요즘 제 기도제목이다.

‘제 마음에 거룩한 불만족을 부어주소서.

지금 제 생활에 대해 거룩한 불만족을 주셔서

겨우 이정도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말게 하소서. 여기서 멈추지 말게 하소서.

 

주님을 향한 ‘불만족’을 제 마음에 부어주셔서.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신 것에 대한

제가 만족을 드리는 삶을.. 이제 살게 하소서.’


   그런데 마음먹은 대로, 내가 결심한 대로 안 된다는 것을,

   위에서 <베드로의 진심어린 결심과 그 실패>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설교의 결론이다.



◑은혜로 가능하다.


내 안에 주를 향한 원함이 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행할 능력이 없다.

내 안에 주를 위한 고백이 있지만, 하나님이 은혜 베풀지 않으시면, 행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여러분, 복음은 교양이 아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그저 고상한 문화가 아니다.

이것은 생명이고, 죽은 영혼/죽은 마음을 살리는 능력이다.


그런데 우리 모습을 보면, 주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면

삶의 현장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말씀을 순종하며 따라가는 능력이 내게 부족하다.


오늘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바로 이런 우리 연약함을 자각하고, ①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②


▲만약 베드로가 은혜를 구했더라면

예수님이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자기 마음은 부인할 것 같지 않았지만,


‘그렇게 부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저는 주님을 부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불쌍히 여겨 주세요!’


만약 이렇게 베드로가 은혜를 구하며 기도했더라면

아마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 의, 자기 확신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자들이 다 주를 버릴 지언정, 저는.. 않겠습니다’ 라고 큰소리치다가

보기 좋게 미끄러지고 말았다.


   신앙 생활은 내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우리는 겸손히 늘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마26:39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기도였다.

 

‘내가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저는 잘 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안심하세요. 걱정 마십시오!’

이런 자신 있는 표현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기도하며, 은혜를 구했더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눅22;43~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실 때, 하나님은 예수님께 힘(은혜)을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고, 십자가를 온전히 잘 감당할 수 있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우리가 이 은혜를 구하고, 받아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다.

우리 공동체가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다.

내 힘만 가지고는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은 그 은혜를 주시기 원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졈손히, 간절히, 그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실패와 예수님과의 만남 (2차)

베드로는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도,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실패자였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삶의 현장에 서 있었다.


3년 동안 주님을 따랐는데, 결과는 똑같았다.

요21장에 보면, 역시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 후에 예수님 말씀을 듣고 다시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더라.’


두 번 다 그랬다. 눅5장에서 처음, 요21장에서 두 번째로.

이번에도 처음 만났던 때와 똑같았다. 

그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그물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물고기는 상징이다. 사람을 낚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훈련 받았지만,

그는 그 훈련의 마지막에도

여전히 그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 은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복음, 신앙의 본질,

이 모든 것을 우리가 다 배우고, 듣고, 외운다 할지라도,

교육이, 그 설교가 우리를 온전히 세워주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께 고백한 대로 생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평소에 우리가 그것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


주1)

‘이를 보고’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물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았다는 뜻이기보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생으로 알았던 그 분을 

주님으로 인식했다.. 그리스도로 발견했다.. 그런 뜻이다.


   이렇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게 되니까, (보게 되니까)

   자기가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죄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베드로는 단순히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한 것이 아니다.

   (고기 많이 잡힌 것을 보고 놀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표면적 이유)


베드로는, 그 이전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예수를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보니까, 비로소 자기가 죄인인 것이 깨달아졌다.


즉, 자기가 그리스도이신 분과, 아직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한 것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고백이라는 말의 이다. 


우리가 ‘죄’라고 할 때 가장 머리속에 먼저 생각되는 것이 6계, 7계, 8계, 9계 등인데,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내가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것이 죄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과 지금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음으로 자신이 죄임됨을 발견하면서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주2)

     오늘날, 이런 베드로와 함께 동역하면, 옆에 있는 다른 지체들이 다 힘들어진다.

     그냥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될 것을,

     ‘다른 사람들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라면서..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해서 자기를 높이고 있다.

     자기만 신실한 제자로 높이면서, 나머지 제자들을 다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주3)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제 눈을 멈추게 한 부분이 있었는데

최후의 만찬 때, 예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인데,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요13:6~9


이렇게 말할 만큼, 간절히 주님과 관계 맺고 싶었던 사람이다.

자기가 절대 주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간절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 은 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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