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은 팔로우십 눅22:24-30 06.03.12.설교스크랩
-지도자는 앞에서 리더하기보다는 묵묵히 따르는 자의 본을 보이는 자라는 뜻
◑리더십이 해서는 안 되는 일 두 가지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눅22:25-26a
▲1. 첫째는 사람들을 주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얘기가 무슨 얘기입니까?
‘이방인의 임금들’, 즉 세상의 권력자들은 ‘내가 말하는 대로 움직여라’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말 한 마디에 착착 움직이는 것, 이것이 세상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자기에게 영향력이 있어서 자기 말 한 마디에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기를 바란다는 거예요.
이것은 아주 짜릿합니다.
바로 이 맛에 사람들은 리더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바로 그것을 하지 말라 그러시는 거예요.
‘사람들을 주관하지 말아라, 사람들을 다스리지 말아라, 사람들을 팍팍 움직이게
하는 것, 그것을 즐기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 지금 교회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제가 전에 ‘교회 부흥’에 관한 어떤 세미나를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강사 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교회가 부흥하려면 목사가 눈빛 하나만 돌려도
그 속을 알아차리고 팍팍 움직여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얼핏 듣기에는 맞는 말씀 같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바로 그걸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지금은 좀 시들해졌지만, 한 때 조폭 영화가 영화계를 판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자칫 잘못하면, 목사인 내가 조폭의 리더십과 참 비슷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말한 대로,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그럴 수도 있는데)
제가 막 화가 날 때.. 그렇습니다.
그리고 조폭들은 오직 큰 형님 하나를 바라고 살지요.
그래서 큰 형님의 거취에 따라서 자기들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런 식으로 ‘단결’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하나 됨’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까지 세상 역사가, 큰 자 한 사람이 사람들을 다 휘어잡습니다.
사실 지난 2000년 동안의 인류 역사도 이런 흐름이었습니다.
어떤 영웅이 나와서 한 시대를 휘어잡고,
그 힘으로 나라가 강해지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그런 역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금지시킨 것을 아직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제쳐놓고라도 예수님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사람들까지,
아직도 사람들을 주관하고 다스리고 말 한 마디로 움직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진정한 리더가 되려면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목사 한 사람에게 일과 힘이 집중되는 것은 정말 피해야 합니다.
그것의 결과는 자칫, 서두에 예로 들은 ‘뱅갈 보리수나무’와 같은 결과를 가져 올 수 것입니다.
우리(해외)교회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가족과 전화통화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딸이 우리교회를 일컬어서 이상하다 그러더래요.
자기가 다니는 한국교회는 예배부터 모든 일들이
목사님의 지시에 따라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데,
우리 교회는 뭔가 자유롭다 못해 나사가 풀린 것 같아 보인다는 거예요.
예배 때도 목사님은 달랑 설교만 하지요,
임원회 때 보면 목사님은 아예 참석도 안 하지요,
교회의 다른 대소사도 주로 임원들이 다 결정을 하지요,
목사님은 별로 하는 일이 없는 사람처럼 있다는 거예요.
제가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나빴을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정 반대입니다.
“그래! 교회가 성서적으로 제대로 돌아가고 있구나!” 그랬습니다.
지금 평신도 중에는 목사보다 지식수준도 높고 경영도 훨씬 잘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인들이 해야 될 일은, 웬만한 교회 일은 다 자기들 스스로 하고,
목사는 제단 앞에, 또는 서재에 오랫동안 앉히는 일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 농도의 짙고 옅음은 있을지언정, 방향은 맞게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아직도 리더들이 사람들을 주관하고, 다스리고, 말 한 마디로 움직이려고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만큼은 그런 일을 지양(止揚)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또 하나는, 은인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리더가 되려는 사람은, 사람들의 은인이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교회성장 세미나에서 이 점에 대해서도 말을 하더라고요.
교회가 부흥하려면 목사가 기도하고 안수해서 병이 낫고 복을 받고
그래서 목사를 은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 쯤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말 역시 맞는 것 같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금지시키신 것입니다.
은인은 예수님 한 분이면 족한 겁니다.
따라서 모든 감사와 찬송은 예수님이 받으셔야 하는데
그것을 리더들이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진정한 리더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해야 하고 그게 알려지더라도
내가 저 사람의 은인이지...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움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오직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리더를 더 리더되게 하는 것이고, 주님이 바라시는 진짜 큰 자인 것입니다.
수년 전 미국의 한 해군병원에, 딸을 데리고 온 부모가 있었습니다.
의사가 그 아이를 진찰을 해 보니까 간에 종양이 생긴 거예요.
그냥은 치료가 안 될 중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의사가 어떻게든지 이 아이 병을 고쳐주려고 고민 고민 하다가
그냥은 안 되겠어서 강력한 화학요법을 썼나 봅니다.
그래서 정성을 다해 처방을 했는데, 아! 어떻게 된 건지
이 아이가 발작을 일으키면서 죽어 버렸습니다.
그 의사는 망연자실했습니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부모를 보니까 너무나 평안한 거예요.
조용히 딸의 죽음을 받아 드리는 겁니다.
나중에 이 의사가, 의과대학 학생들에게 이 사례를 강의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강의 준비를 하면서 당시 이 아이의 차트를 보니까,
어떻게 된 건지, 자기의 실수로 환자에게 투여할 약의 양을
적정수준의 10배나 되게 처방한 거예요.
그러니까 뭡니까?
이 의사가 처방을 잘못해서 아이를 죽인 거지요.
그런데 이 의사가 어떻게 했냐 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 부모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다 얘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부모들이 하는 말이
“우리 아이를 구해 내려고 정성을 다하신 의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우리 아이는 예수님 품에 안겨서 천국생활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 살려내라! 죽일 놈 살릴 놈!’
이런 소동이나 난리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돌아갔다는 거예요.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끝끝내 자기들 이름을 밝히는 것도 원치 않았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이 의사가 고백을 했대요.
‘당신들은 제 평생의 은인입니다’ 그랬더니 오늘의 말씀을 하더라는 겁니다.
“우리의 은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이 의사가, 이 무명의 그리스도인 부부에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계기로 그 의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이 의사의 이름은 잭 템플턴입니다.
이 분이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템플턴 재단의 이사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이 재단의 이름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그 재단은 지금 미국에서 빌 게이츠 재단 다음 다음으로 큰 자선단체 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그 무명의 크리스천을 본받아서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 상이
바로 이 템플턴 부자父子가 만든 겁니다.
마더 테레사, 빌리 그레함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이 이 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세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상이지요.
딸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은인이라고 칭함 받기를 거절했던 부모는..
의사 템플턴을 정말 놀랍게 변화시켜서, 세계적인 리더가 되게 했습니다.
◑리더십이 해야 되는 일 두 가지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눅22:26
▲1. 크리스천 리더로서 꼭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큰 자는 젊은 자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잘 지켜지는 나라가 없지요?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당시 세계에서 동양보다 더 완고하게 이 장유유서가 지켜진 나라가 있었는데,
바로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크고 힘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나이 많은 사람을 최고로 쳤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나이 많은 것이 가장 큰 힘이었어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뭐냐 하면, 너희가 진짜 리더가 되기를 원한다면
‘나이 많은 사람들은 젊은 자처럼 되라(섬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에게 쓸 힘이 있어도
그 힘을 쓰지 말고 오히려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높은 지위에 있거나, 권세가 있거나 돈이 많으면 그런 사람일수록
낮은 사람을 오히려 섬기라는 겁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아래 위가 확실히 구분되는 것들이 있지요?
지위가 높고, 돈이 많고, 학벌이 좋고, 가문이 좋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분명히 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가르는 기준과는
완전히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자기의 껍데기가 화려할수록, 가장 초라한 사람처럼 살라는 것이
큰 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지금은 다 지나간 얘기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법은 백인위주의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흑인들은 그 ‘백인우월법’에 의해 노골적으로 차별당하고 있었지요.
바로 그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흑인 교회인 <성 시온 교회>에서 고난일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이 예배 때 특별한 행사를 계획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것같이,
평소에 자기가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을 불러다가 발을 씻겨주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당일 날, 이 교회에 불청객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백인 판사 한 사람이 온 거예요.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판사로서, 대법원장에 내정된 사람이었습니다.
이 올리버 판사가, 시온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세족식의 광고를 어떻게 들은 거지요.
그 교회엔, 자기 집에서 일을 하는 흑인 메이드(하인)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날 이 올리버 판사는 바로 그 여종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겼을 뿐만 아니라
그 검은 발에 입을 맞췄지요. 예배당 안은 온통 숙연해졌습니다.
그리고 올리버 판사가 간증을 합니다.
"마르다는 내 집 하인으로서, 오랜 세월 내 아들 딸들을 돌보았으며,
내 자식들의 발을 씻어 준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 소식이 삽시간에 전 나라에 퍼졌습니다.
백인들이 가만히 있었겠어요?
결국 내정되었던 대법원장 자리가 취소된 것은 물론이고
판사직까지 박탈당했습니다.
시온 교회 목사가 그 올리버씨를 위로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판사직도, 사회의 다른 지위도 무덤에 갈 때는 먼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먼지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중요합니다.
제가 마르다의 발을 씻기고 그 발에 키스를 하는 순간에야
저는 처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섬기고 낮아지는 기쁨이 이렇게 큰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저는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 안 것 하나로 너무나 행복 합니다 "
이 올리버 판사가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 저는 자세히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를 더 큰 자로 쓰셨을 겁니다.
화려한 자로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일은 쉽지 않지만,
진정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섬기는 길을 택하라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2. 리더가 되기 위해서 꼭 해야 할 두 번째 일은, 두목은 섬기는 자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인이 종처럼 되라는 겁니다.
그래서 종이 상전에게 하듯이 주인이 종을 떠받들어라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풍습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말씀이지요?
당시 로마제국에는 5천만 명의 종이 있었는데, 이 종은 동물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종은 일생 동안 주인의 소유물일 뿐이었어요.
따라서 그들에겐 도덕도 윤리도 인격도 없었어요.
무조건 주인에게 복종할 뿐만 아니라, 팔려가기도 하고 팔려오기도 했습니다.
동물에게 무슨 인권이 있겠으며, 무슨 사정이 있겠으며, 무슨 의지가 있겠어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두목일수록, 리더일수록 종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뭘 하라는 거냐?
섬기라는 겁니다.
종처럼 모든 허드렛일을 다 하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추상화시키면 안 됩니다.
“기도하는 거나 설교하는 거나 찬양하는 것도 다 섬기는 것이다”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두목일수록, 리더일수록 궂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 줄로 말씀드리면 ‘리더십은 곧 followship이다’ 이것입니다. ←이 설교문 제목
지도력이란 게 뭐냐?
섬기는 정신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리더십leadership이 아니라, followship입니다.
한국교회가 그렇게 많은 성도들을 보유하고도 힘이 없는 이유는
리더십은 있지만, 이 followship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연약한 이유 역시, 이 followship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섬기는 자가 크다’라고 했는데,
실제 우리 현실은, ‘세상에서 높은 자가 크다’는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인본주의가 되었지요. 그러면서 교회의 능력이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면
‘예수님은 힘이나 권력자체를 정죄하신 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력 자체나 리더십 그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권력 없이 평등주의로 나가라? ... 그게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권력 자체를 쓸 데 없는 것으로 여기셨다면
제자들에게 “너희는 권력이나 지도력 따위는 애당초 생각도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링컨이나 윌버포스가, 권력을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주1)
권력 자체를 갈망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더 큰 봉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큰 헌신, 더 큰 섬김을 위해 권력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분들은, 권력 자체를 터부시 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의 반격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했던 리더십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그 리더십만, 참된 진리에 기초한 리더십입니다.
세상 리더십은.. 겉으로는 잘 되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곪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에 유교의 가부장적 가정에서
남편이 절대적으로 무엇을 명령합니다.
그러면 아내나 자녀는 겉으로 어쩔 수 없이 순종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감정의 반격’이 뒤따릅니다.
당장은, 아내는, 반찬을 잘 안 만듭니다. (억지로 순종했지만, 반격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남편이 늙었을 때, 또 반격합니다. 무시하고 역으로 학대합니다.
가부장적 세상 리더십이 ‘참된 리더십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자녀들도 ‘감정의 반격’을 일으킵니다.
당장은 문을 쾅 닫고 나갑니다. (그리고 억지로 그 명령에 순종하더라도)
나중에 커면,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늙은 부모를 서먹하게 대우합니다.
사람들이 권력이나 돈 앞에서는 그 힘에 눌려서 무서워하고 복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방식은, 억압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섬김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자발적으로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억압적으로 믿게 만드셨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항거하거나
아니면 ‘감정적 반격’이라도 일으킬 것입니다.
.............................................. 더 읽으실 분 ......................................
◑서론 및 본문 배경 설명
▲인도 속담에 “뱅갈 보리수나무 아래서는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뱅갈 보리수나무는, 크기로 말하면 ‘나무 중에 가장 큰 종류’라고 합니다.
이 나무가 그렇게 크게 자라는 이유는, 그 나무의 독특한 생장방식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보통 나무들은 시간이 갈수록 뿌리와 줄기가 함께 자랍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웬만큼 자라면 줄기 군데군데에 몽우리가 생긴답니다.
그리고 그 몽우리가 터져서 거기서 새 가지가 나오는데,
그 가지는 땅 쪽으로 뻗어 내려서 땅을 파고 들어가 뿌리가 된다내요.
그리고 거기서 또 새 줄기가 올라와서 원줄기처럼 커진다고 합니다.
나무 한 그루에 생기는 몽우리는 적어도 수십 개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나무가 무한정 커진다는 거지요.
그래서 제대로 자란 ‘뱅갈 보리수나무’는 천 평을 뒤덮는다고 합니다.
물론 그 나무는 크니까 새가 깃들고, 다른 동물과 사람들이 그 그늘 아래서 쉴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 나무는 세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 주변엔 어떤 식물도 살 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만약 뱅갈 보리수나무 한 그루가 죽으면
그 일대 땅은 아무 짝에도 쓸 수 없는 불모지가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나무와는 아주 대조되는 식물이 있습니다. 바나나 나무입니다.
바나나 나무는 6개월에 한 번씩 바로 옆에 새싹을 트게 한대요.
그래서 그게 12개월이 되면 원나무의 옆에 새롭게 바나나가 자라고,
18개월이 되면 열매를 맺는답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쉬지 않고 6개월마다
계속 새싹과 열매를 맺어 나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나무가 죽는다 해도
또 다른 바나나 싹으로 채워져서 지속적으로 바나나를 생산해 낸다는 거지요.
그래서 바나나 농장은 사람이 손대지 않는 이상은 점점 커지지,
줄어드는 법이 없답니다.
오늘 이 두 종류의 나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지요?
하나는 크고 세력도 넓습니다.
하나는 작고 세력도 미미합니다.
그러나 영향력으로 따져봤을 때는 어떨까요?
영향력이란 것은 항상 그 실체가 사라졌을 때에야 진면목이 나타나지요?
사라져서 아수라가 되느냐,
아니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영향을 미치느냐 그 차이 일겁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어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겸손해 보이는 사람도, 내심은 크게 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욕망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다들 크게 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문제는 크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할지 그게 문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리더십 Leadership, 또는 Followship 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런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다루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늘 사건은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움이 일어났는데, ‘우리 중에 누가 제일 크냐?’ 그 문제였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권력에의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을 자기가 휘두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권력은 어디서 나오냐 하면,
지위에서 나오기도 하고, 돈에서 나오기도 하고, 인간관계에서도 나옵니다.
모택동 같은 사람은 총구멍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세계가 연결되는 것을 보면서
정보와 지식이 권력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두 제자가 구한 것을 한 번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이 두 제자가 구한 것 역시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런 종류의 세상 권력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야고보와 요한에게 다른 제자들이 분통을 터뜨리지요?
나머지 제자들도 하나 다를 게 없어요.
▲본문의 앞뒤를 읽어보면, 지금 제자들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께서도 내용을 알고 나면 마음이 착잡해지실 거예요.
이 일 바로 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만찬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이었어요. 자신이 찢기실 몸과 흘리실 피를 생각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친히 그 피와 몸을 기념하라고 떡과 포도주를 주셨어요.
그 다음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때 당신께서 고난 받으실 것을 미리 예고하시지요?
그러나 그렇게 고난을 당할 것에 대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일에 대해서,
정말 마시기 싫은 잔을 마셔야 되는 그 일에 대해서
제자들 중 누구하나 진지하게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 작냐 싸우고 있을 동안,
예수님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저 놈을 제쳐야 내가 리더가 되지...’ 그렇게 마음먹고 있을 때
예수님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던 생각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제 밥그릇 챙길 생각만 합니다.
그래도 3년 동안이나 같이 다니고 이제는 내 뜻을 알만한데,
그래서 이 길을 함께 가고 싶은데... 제자들은 아직도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일 바로 뒤에 감람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서는
제자들은 잠이나 자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머지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이런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성정(性情)이 있으셨는데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요?
얼마나 허망하셨겠어요?
▲우리는 큰 자가 되기 전에, 리더십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십자가를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뭔지, 십자가의 깊이와 십자가의 복음이 뭔지,
나에게 십자가는 무슨 뜻이 있는지 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기 전에 리더가 되려고 하는 것은, 일의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누구든지 큰 자가 되고 싶어 하고, 또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되는 것은 아닙니다.
리더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자세나 정신, 또는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그 정신이나 힘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큰 자가 되기 위해서 -다른 말로 진정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
-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와, 꼭 해야 하는 두 가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
주1)
뉴올리언스 항구에서 한 백인 소년이,
흑인 어린 아이가 돈으로 매매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열망이 타올랐습니다.
‘언젠가는 저 흑인들을 해방시켜야 되겠다, 저 불쌍한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해야겠다’
그리고 준비했습니다. 참 오랫동안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어서 노예 해방을 시켰습니다.
그보다 십 수 년 전에 영국에 윌버포스라는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21세에 영국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그가 정치를 시작하면서 가장 심각하게 느껴진 것은 인권문제였어요.
당시에 어린아이들도 하루에 18시간을 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어린아이를 성인 취급하던 사회적인 문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흑인 노예들의 인권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선박사업이 크게 번창했어요.
해외수출업이 각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호황을 누리던 것은 노예를 잡아다가 파는 사업이었습니다.
노예선은 흑인들을 한 배에 약 500명씩 싣고 왔는데,
그들을 짐승처럼 취급하며 좁은 공간에 짐짝처럼 겹쳐서 싣고 왔습니다.
구토한 음식물과 분뇨가 범벅이 된 배의 지하실은 마치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실려 오는 동안 상당수의 노예들이 죽었고,
죽은 노예들은 바다에 던져져 상어 떼의 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크리스천이었던 윌버포스는 신앙양심상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1788년 노예제도는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국회에서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러나 즉시 조롱을 당하고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영국국회는 윌버포스가 제안한 ‘노예제도 철폐안’을 보기 좋게 부결시켰어요.
그는 굴하지 않고 다시 노예를 철폐하자는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2년 후에도 그의 제안은 또 보기 좋게 부결되었습니다.
윌버포스는 도저히 물러설 수 없었어요.
이일은 주님께서 시키신 일임을 믿었던 것이지요.
그는 국민들 앞에서 집요하게 자신의 신념을 외쳤습니다.
놀랍게도 국민들의 호응은 상당히 컸습니다.
흑인노예가 재배한 설탕을 먹지 말자는 운동에 30만 명이나 동참한 겁니다.
그래도 영국국회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윌버포스의 노예제도 철폐 안은 1797년에도 부결되었습니다.
1798년에도 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1800년에도 부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는데,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1801년에는 상원에서 노예제도 철폐 안이 통과되었고,
이어 하원에서도 283대 16으로 통과되었습니다.
그 날 영국 국회는 윌버포스의 불굴의 투쟁에 특별한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국회의원 전체가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면서 그의 노고를 치하했습니다. ▣ 리더쉽,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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