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가면 갈수록 삼상7:2 모두 스크랩 글
궤가 기럇여아림에 머문 날로부터 약 스무 해 동안, 오랜 세월이 지났다.
이 기간에 이스라엘의 온 족속은 주를 사모하였다. 삼상7:2
◑세월이 흐를수록..
안수 ordaining 10년이 된 어느 성직자가 이런 고백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주의 종으로 생활하는 동안 주님은 자꾸만 작아지시고 저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사무실에서 제 목소리가 점점 커져갑니다.
존경하던 선배 종 님들이, 지금은 비난의 대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목회의 대상이.. 소외된 사람들에게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로 점점 옮겨갑니다.
초대받는 자리에 가면 으레 가장 좋은 자리에 먼저 앉습니다.
칭찬과 감사, 격려의 말보다.. 불평과 원망, 지시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타인의 말을 듣는 시간보다, 내가 말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집니다.
강의나 설교도 쓸데없는 말로 자꾸 길어집니다.
회의 때는, 나의 판단이 옳다고 우길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바빠서 못하는 이유가 자꾸 늘어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용서 받을 것들이 점차 쌓여가는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or 하나님 큰아버지
지난 해 봄에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조카딸이
휴학을 하고 우리 집에 올라 왔습니다.
자기가 목표한 대학에 다시 진학하기 위하여
서울에 있는 입시학원에 등록을 하고 상경한 것입니다.
며칠이 지나 토요일에 시집간 딸들이 와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데,
조카딸이 식사 도중에 화장실에 가서는 식사를 다하도록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도 이상해서 화장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잠시 후에 조카딸이 화장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조카딸의 눈이 퉁퉁 부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고 저희 집 식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나 우리가 조카딸에게 섭섭하게 한 것이 있는가 하고는
나중에 "왜 그랬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조카딸은 큰집 식구들이 다 모여 재미있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는
자기 엄마 아빠가 생각나고 보고 싶어서 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그렇게 따뜻하게는 못했지만
그 아이의 큰엄마인 제 아내는 자식들 보다 더 신경을 써 주었는데,
조카딸은 자기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서 운 것입니다.
조카딸에게는 아무리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잘해준다고 할지라도
자기 부모와 같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좋은 아버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큰아버지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왠지 마음이 허전하고 진정한 위로를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아버지'나 '아저씨'가 아니라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기
얼마 전 읽은 성자와도 같은 삶을 살았던
벨기에 보두앵(Baudouin1951-1993)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그를 만나면 자신을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하며,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생각으로 이끌어 줍니다.”
한 마디로, '격려의 은사'가 있었던 분이지요.
“보두앵이 당신을 바라본다면
아마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마음과 눈길을 지녔던 분이 분명합니다.
마치 지금 여기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인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쏟아 부었던 벨기에의 보두앵이었습니다.
사실 신앙이 깊어지는 수준에 오르면
그들 대부분 사랑이 이러할 것입니다.
마냥 우리를 비참하고 썰렁하게 눈길이 아니라
우리를 충만한 존재, 중요한 존재로 느끼게 하는
예수님의 눈길이요, 예수님을 본 받은 온화한 인품의 제자들의 눈길입니다.
민족의 스승이라 일컬었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 대한
피천득 선생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도산은 누굴 만나든지 정성으로 대해 주었지요.
그분은 제자도 많았는데,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선생님이 자기만 위해준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주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가톨릭 글인데, 의미심장하니 한 번 들어보세요)
제가 수도회에 첫발을 들여놓던 시절,
당시 제가 지니고 있었던 각오나 목표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꼭 성인(聖人)이 되자!’ 성인이 되는 것이 제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하루 온 종일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런 제 마음을 알아주셨던지.. 매일 주님 은총이 단비처럼 제게 내리더군요.
첫 서원을 하던 무렵, 목표치가 눈에 ‘확’ 띄게 하향조정이 되었습니다.
첫 마음이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비록 많이 부족하지만 세월이 좀 더 흐르면, 수도생활의 연륜이 좀 더 쌓이면 나아지겠지?’
열심히 노력하면 성인(聖人)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사제서품을 받던 무렵, 부끄럽지만, 목표치는 더욱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인(聖人)은 힘들겠구나.
그렇지만 아이들과 신자들에게 내 삶을 나눠주는 착한 목자는 되어야지..’
라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세월이 좀 더 흐르면,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이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년, 1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더욱 부끄럽지요.
요즘 각오는 ‘적어도 후배들에게,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어떻게 해서든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존재해야 할텐데...
너무 비참하고 초라해지면 안 될 텐데...’ 하는 간절한 소망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거품이 제거된 제 모습은.. 참으로 비참하기만 합니다.
결국 의지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됩니다.
그 은혜가 아니고는.. 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비둘기 같은 사람 되기
성령님은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내려왔습니다.
다른 새도 많은데, 왜 하필 ‘비둘기’였을까요?
비둘기가 사랑이 가장 많은 새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비둘기가 사랑이 많다는 것일까요?
바로 겁을 상실한 면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새를 잡으려고 사냥도 하고, 새장에 가두어놓고 관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부류에서 제외되는 유일한 새가 비둘기입니다.
유럽에는 각 집 벽 틈새마다 비둘기 집이 있을 정도로 비둘기가 사람과 가깝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걸어가면 조금만 비킬 뿐이지, 다른 새들처럼 두려움에 떨거나
산 속으로 피해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일부러 놀라게 하여도 조금 날아갈 뿐, 먹이를 뿌리면 다시 내려와서 앉습니다.
항상 사람과 함께 있기 때문에 굳이 잡을 필요도 없고
새장에 가두어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왜 비둘기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일까요?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지구의 가장 무서운 포유류인 사람도 무섭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비둘기를.. 사람들도 다른 새들처럼 대하지 않고 평화롭게 대해줍니다.
중요한 것은 악은 선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사랑으로 이기고, 미움은 용서로 이기고,
폭력은 비폭력으로 이기고, 불신은 믿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비둘기처럼.. 무서운 사람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현재는.. 구원을 점점 이루어가야 합니다.
금년(1999년 상황)이 독일이 동서독, 독일이 통일이 된지 꼭 10년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번 생각합니다. 동독 서독이 통일된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정말 통일이 된 거냐고. 그거 잘한 거냐고 못한 거냐고.
지금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통일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는 통일이 됐는데.. 의식이 아닙니다.
세계관이 아닙니다. 사는 자세가 틀립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갈등을 일으키고
지금 심지어는 통일된 것 잘못됐다는 말까지 지금 나오게 됩니다.
제가 동독을 방문하고 서독 방문했을 때도
이거 완전히 잘못된 거라고 그런 얘기하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새 신문에 비판이 나온 것을 보니까 그랬어요.
"멀고도 험한 완전한 통일의 길."
자기들이 통일 된 거 같은데 아니요.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이중식민지화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사회주의 식민화, 이렇게 비판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자, 물리적으로는 통일이 됐으나 정신적으로는 아니라 이거예요.
점점 더 어려운 갈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통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빗대어 우리 구원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분명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원받았으나..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입니까?
내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나는 어디까지 왔습니까? 제가 여러분께 이것을 묻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 혹 자동차를 타십니까? 자동차 운전을 할 때 보면
이거 뭐 운전면허 따고 자동차 내 자동차에 떡 올라탔습니다.
이거 분명히 내 자동차입니다. 내가 운전 할 겁니다.
자, 이제 운전이 마음대로 됩니까?
내가 편안하게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을 만큼 되려면
아무래도 최소한도 3년 이상 걸릴걸요?
또 어지간히 사고도 내고 이리 찌그러지고 저리 부딪치고
이래 가면서 이 운전이라고 하는 그 단순한 그것 하나를 몸에 익힌다.. 이 말이에요.
운전을 몸으로만 합니까? 기술이요, 마음이요, 정신까지 드라이빙 마인드가 있는 거예요.
이거까지 다 훈련해서, 온전하게 ‘운전’이라고 하는 것을 내 것으로 삼는데,
거기까지 도달하는데 이게 쉽지 않아요.
긴 시간의 훈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운전사가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너의 구원을 이루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현재적 구원을 말하는 겁니다.
과거의 구원을 말할 때마다 "구원 얻었느니라" 그러고요,
미래의 구원을 말할 때마다 "구원 얻으리라" 하고 말씀하고요,
현재적 구원을 말할 때는.. ‘구원을 이루라’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을 이루라!" .. 이 말씀은 현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가운데도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것도 현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과거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현재와 미래까지 동시에 함께 생각해야 하며,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이 내 몸에 마치 능숙한 운전기술처럼 딱 달라붙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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