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소망을 가집시다 골1:21~29 -설교 스크랩, 정리, 출처-
▲도입 예화 주1)
◑21~22절, 복음의 능력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1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2"
▲1. 원수 :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악한 행실 가운데서, 하나님과 멀리 떠나 있었어요.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는 자들이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수'였습니다.
▲2. 화목 :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자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되었어요. 죄 용서함을 받았어요.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이에요.
그것을 ‘화목케 하사’ 그랬어요.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게 할뿐만 아니라, 거기서 끝나지 않죠?
▲3. 변화 :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복음은 우리를 구원만 할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계속해서 변화시킵니다.
예수 믿고 나서 아직도 우리는 부족합니다. 아직도 많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복음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어느 날 내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마침내 나를 변화시켜, 주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나도 거룩한 자로,
그가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분이셨던 것처럼
그분을 닮아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주앞에 온전히 세워 지는 것,
복음의 능력은 거기까지 갑니다.
예수 영접했으니까, 구원 받았으니,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워지는
변화되는 자리까지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나를 구원하고, 복음이 나를 변화시켜,
지금 내가 가진 내 모습에서 느끼는 많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온전히 나를 변화시켜 내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정말 아름다운 존재로 나를 완성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소망'입니다. ←설교문 제목
이 소망을 믿으십니까, 이 소망을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야, 복음이 귀하구나!'
복음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변화될 수가 있겠는가요?
여러분! 이 복음이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다운 것인가요?
▲복음으로 변화된 사위 부족 주2)
◑23절a, 복음의 소망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가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1. 흔들리던 골로새 교회
23절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면’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골로새 성도 여러분! 굳게 서야 합니다. 흔들리지 마셔야 합니다.’
왜 이런 강조가 필요했을까요?
그러니까 굳게 서 있지 못한 성도들, 흔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바울이 골로새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견고한 일꾼으로 세워져서 주님 앞에 쓰임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바램으로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2. 복음의 소망
그들이 하나님이 쓰실 만한 참 견고한 일꾼이 되려면,
복음의 소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자 23절을 다시 보시면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복음의 소망이란, 앞서 :21~:22절에서 간단히 설명했지만,
‘복음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가 있다. 복음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사탄에게 결박된 인생들, 그 사슬을 끊어 버리고,
예수님 영접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힘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만이 진정 사람을 구원할 수가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복음만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게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소망입니다.
▲3.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런데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그런 복음을 몰라요.
그러나 교회도 하나의 조직이기 때문에,
복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세월이 흘러가니까 교회의 일꾼이 된단 말이죠.
그러면 그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될까요?
그건 복음적 교회가 아니에요. 인간 사교모임적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 냄새가 많이 나고, 직분을 감투로 여기는, 그런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세시대에 교회가 타락했습니다. 그 타락의 원인이 어디 있느냐?
많은 원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의 최대의 의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종교 개혁은 복음의 회복입니다.
종교 개혁의 3가지 강조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오직 은혜.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가 있다. 오직 은혜.
둘째로, 오직 믿음. 예수 믿는 믿음만이 인간을 구원한다. 사람을 변화시킨다.
셋째는, 오직 성경.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말씀이 아니고는 인간은 변화될 수 없다.
인간의 변화는 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변화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 복음의 능력, 이 복음의 회복, 이게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바로 복음의 회복을 통해서, 그 시대의 잠자던 교회를 회복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어요. 지금 오늘날의 교회는 어떤 자리에 있을까요?
저는 오늘의 교회의 위기를 여러 가지 면에서 진단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 복음의 위기, 복음이 약화됐어요.
이것이 교회 세속화의 원인입니다.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다시 복음의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종교 개혁은, 역사 속에 있었던 일회성의 작업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개혁은 계속 새롭게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개혁의 초점이 뭐냐?
그것은 복음의 회복이에요. 복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지고,
그 그리스도가 강조되고, 복음이 강조될 때
여러분! 교회는 교회된 역할을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23절b, 복음의 일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23b
▲복음의 일꾼
이 복음의 소망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복음의 일꾼입니다.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 :23b
여러분! 교회가 가진 가장 위대한 자산은 무엇일까요? 복음입니다.
교회의 가장 위대한 힘은 복음입니다. 초대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초대 교회는 빌딩이 없었어요. 건물이 없었습니다.
건물은 주후 300년대(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비로소 교회 건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3세기 동안은 건물도 없었어요. 프로그램도 없었어요.
그러나 초대 교회가 그 당시 세상을 뒤집어엎었던 그 능력이 어디에 있었느냐?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
그리고 이 복음을 확신하는 일꾼들이 있었습니다.(:25)
초대 교회의 크리스천들은 구경꾼이 별로 없었고, 다 일꾼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일꾼,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1) 도입예화 참조
◑24절, 문맥의 흐름상, 아래 29절에서 같이 설명합니다.
◑25절, 교회의 일꾼
"내가 교회의 일꾼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1:25
▲1. '내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를 향한 편지 가운데서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교회의 일꾼’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단어는 어떤 계급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교회의 성직자'를 말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일꾼이라는 단어가 아니고요,
이 단어는 본래 희랍어에서는 ‘디아코노스’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집사’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 뜻은 '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의 ‘일꾼’은, 번역을 아주 잘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직자나 특별히 지도자들만 지칭하던, 그런 단어가 아니라,
매우 보편적인 용어, ‘일꾼들’ 전체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을 교회의 일꾼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편지를 쓰는 중요한 동기는,
그 당시 골로새 교회가 영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일꾼이었습니다.
‘일꾼이 부족하다. 참된 일꾼이 교회 안에 세워졌으면 좋겠다.’
이 바램을 가지고,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바울은 앞서 23절에서, 자신을 '복음의 일꾼'으로 자처했습니다.
지금 25절에서, 자신을 '교회의 일꾼'으로 천명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꾼'이 되려면, 먼저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이기 전에 복음의 일꾼이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복음의 확신,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복음에 대한 진정한 소망을 알지 못하고,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교회 나온 햇수만 오래 되었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 교회의 일꾼이 되었어요.
이런 사람일수록, 교회에서 교권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교회의 직분을 무슨 큰 계급으로 알고, 출세의 자리로 여기는 사람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참된 일꾼은,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 목표란, 복음의 능력을 아는 사람, 복음의 소망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이런 일꾼을 세워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교회의 무력화나, 세속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들이 종종 그 목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표의 상실.
우리 시대의 크리스천 언론인 가운데 말콤 머그리치라는 영향력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을 풍자하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간다. 왜 가는가?
아마도 교회에 가기 위해서 가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예배를 드린다. 왜 드리는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드리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기도한다. 왜 기도하는가?
아마도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공부한다. 왜 하는가?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서 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봉사한다. 왜 하는가?
봉사하기 위해서 하는 모양이다.’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목표를 상실하고, 종교적인 형식이나 행위만 우리가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요. 예배드립니다. 왜 예배드려요? 무엇 때문입니까?
‘예배 드렸다. 예배 드렸으니까 훨씬 내가 느낌이 좋다.
예배드리고 나가서 장사 하니까 장사가 더 잘되는 것 같다.’
이렇게 우리가 종교적 습관에 빠지다보면, 목표를 잃어버릴 때가 많아요.
▲2.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교회에서 내가 일꾼이 되었습니다. ‘왜 나를 일꾼으로 세워 주셨을까요?’
무엇 때문입니까?
25절에 보시면 계속해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내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내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의 핵심은 뭘까요?
계속되는 27절 말씀을 보시면, 그 설명이 나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비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
◑26~27절, 감취었던 복음의 비밀이 이제 나타났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6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7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6
여기서 비밀mystery이라는 말을 특별히 쓴 이유는,
복음/그리스도는.. 쉽지만.. 쉽게 깨달을 수 없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즉, 계시의 영이 임해야 하고, 하나님이 불러주신 사람만, 복음/그리스도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비밀'이란 말을 쓴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러나 '비밀'이란 말을 쓴 가장 큰 이유는,
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창세로부터 계시되어 왔지만,
그것이 이전에는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감춰져 있으면서, 조금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비밀이 완전히 알려지게 되었죠.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6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27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비밀이신 예수님을 나타내는/드러내는/전파하는 거예요.
다른 게 아닙니다. 그게 목표입니다.
‘거기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은 풍성한 것이다. 이 비밀은 소망이다. 인류의 소망이다.’
이게 사도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전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그래서 골로새 교인들이 '복음의 일꾼, 교회의 일꾼이 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28절, 각 사람을 온전한 자로 세우려 한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8
▲전파하고, 권하고, 가르침
여기 중요한 동사가 셋이 나오죠? 어떤 동사들이 나옵니까?
‘전파한다. 권한다. 가르친다.’
-그런데 뭘 전파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권고한다. 뭘 권고할까요? '예수님 믿도록',
예수님 의지하도록, 예수님 따르도록 권고하는 거에요.
-'가르친다' 뭘 가르칩니까? 영어를 가르칩니까? 수학을 가르칩니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소망이신 그리스도, 구원이신, 생명이신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그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그렇게 전파하고 권하고 가르쳐서 마지막 목표가 어디에 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여기서 '완전하다'는 단어는 차라리 '온전하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래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완벽한 perfect'이라는 뜻은 아니거든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 이게 목표예요.
(부자 되게 하는 것,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 되게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많은 일이 있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궁극적인 목표가 이것을 달성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예수 믿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그 변화된 사람이 있는 곳에서 변화된 사회, 변화된 역사의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일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것은 다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교회 안에서 모든 사역이 소중하고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 가르치는 사역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 사람을 만드는 것,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이냐?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변화되도록 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사역에 목표, 우리가 결국 사람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세우는 것, 주께서 이 일 가운데
저와 여러분을 쓰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9절, 그 일을 위해 고난을 각오한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29
▲'이를 위하여'
'이'this가 뭐죠? 앞서 28절에서 말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믿고,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
바로 그 목표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여기서 힘을 다한다는 말은 ‘자기의 모든 에너지가 소진할 때까지,
쓰러질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최선만이 아닙니다. (고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과, 성령님의 강권하심을 따라,
나는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
그 수고 속에는 어떤 고난도,
주의 몸된 교회가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
복음의 소망을 이 땅에서 펼치는 그 일을 위하여 내가 어떤 고난을 받을지라도
나는 기쁘게 감당하겠다. 그 각오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것은 이미 24절에도 바울이 고백한 것이었죠?
◑24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4
여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니 십자가의 고난으로 다 끝나셨는데, 무슨 '남은 고난'이 또 있겠습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과 교회를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그는 자신의 입술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자신의 손으로 힘없는 사람을 만져 주시고, 병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될까요?
그 일이 계속되도록 하기 위해서, 동일한 복음이 선포되고,
동일한 치료의 사역이 이 땅에서 계속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자신을 몸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 몸이 바로 뭘까요?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동일한 복음을 계속 선포하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시던 일을 동일하게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육신의 연장입니다.’
교회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어떤 고난과 아픔을 당할 때,
주님은 자신의 고난으로 그것을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 복음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의 소망을 위해서, 복음의 발전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이 그리고 교회가 이 땅에서 아픔을 당하고 있는 한,
주님은 그것을 자신의 고통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내 육체에 채운다.'
▲고난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고갈된 현실
복음을 위해서라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라면,
내가 받는 괴로움을 차라리 나의 기쁨으로 특권처럼 여기겠다.’
요즘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주의 일을 하시는데,
오늘 우리 사회가 너무나 실용주의적 사회가 되다 보니까,
교회 생활을 너무 편하게만 하려고 그래요.
고난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고난 받으려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러나 고난의 십자가를 질려는 사람이 없을 때
복음의 역사는 이 땅에서 계속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동일하게 짊어지고, 복음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어 놓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왜 현대인들이 고난을 싫어하겠습니까? 고난을 조금 받으면 시험이 와요.
그러나 고난을 깊이 받으면 애정이 옵니다 사랑이 옵니다.
자식을 위해서 고생하는 어머니들을 생각해 보세요.
자식을 위해서 고생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식에게서 멀어지지 않아요.
더 깊은 애정,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갖습니다.
주의 몸된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 고난 속에 동참하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우신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특권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내 육체에 채운다.” :24
내가 이 괴로움을 기뻐한다.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찬송가 작시자 가운데 프란시스 헤버갈이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주3)
▲마치는 말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아 보신 적이 언제였습니까?
그가 생명을 버려 나를 구원하셨다면, 내가 새로운 생명과 영생을 얻었다면,
주님 때문에 고생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삶을 살아본 적이 언제예요?
왜 일꾼이 없어요? 왜 이 세상이 변화지 않을까요?
교회가 이렇게 넘쳐 나는데, 왜 이 세상이 변화되지 않을까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소망과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
기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
복음의 능력을 가진 일꾼을 찾습니다.
복음의 소망을 가진 일꾼을 찾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세상에 알릴 사람을.. 지금 하나님이 찾고 계십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주앞에 나와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고
우리를 바꾸어 주시고, 우리를 통해서 이 민족의 역사가 새로워지는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가운데 주의 성령이 임하시사
새로운 일을 시작해 주시옵소서. 복음의 역사를 이 민족 가운데 부흥케 하시고,
다시 복음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민족의 역사에 어두움, 우리 가정의 어두움은
단순히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고 있는,
복음이 없는 어두움인 것을 압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 가운데, 역사 가운데 복음의 부흥을 주시옵소서.
복음의 영광이 선포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복음의 능력을 아는 일꾼들이 일어나게 도와 주시옵소서.
기꺼이 이 복음의 능력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어 놓을줄 아는
고난을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저들을 통해서 이땅을 고쳐주시고, 역사를 고쳐주시고,
우리 가운데 새로운 일을 시작해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주1) ▲도입 예화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역마차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서부 개척 시대에 서부로 가던 주요 이동 수단으로 쓰이던 역마차에는,
조그마한 마차인데도 그 안에는 세 종류의 좌석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티켓을 살 때는 1등석과 2등석과, 3등석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1등석은, 역마차가 달리다 보면, 그 당시에는 포장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비포장 길을 달리다 보면, 두세 번씩 고장이 나기 마련인데,
어느 좌석에 앉았느냐에 따라서, 역마차가 고장났을 때 담당해야 할 임무가 달랐다고 합니다.
1등석을 산 사람은 고장이 나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2등석을 산 사람은 역마차가 고장이 나면, 마차에서 내려서 길 옆에 가서,
마차가 고쳐질 때까지 구경하는 사람, 그게 2등석입니다.
3등석은, 역마차가 고장이 나면 내려서 마부와 같이 마차를 밀고 고치는 일에
같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3등석입니다. 그런데 마부들은 이 역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3등석 좌석을 산 사람들이 누군가를 눈여겨보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3등석을 산 사람들, 그 일꾼들이 제대로 역할을 해주고 도와줄 때,
그 역마차가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3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요.
교회에서 가만히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숫자의 사람들은 구경꾼들입니다. (1등석)
저 옆에 서서, ‘잘하나 보자!’ 구경하는 사람들이예요. 구경꾼들. (2등석)
지극히 적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팔을 걷어붙이고 자신을 드리는 일꾼들이 됩니다.(3등석)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는, 이런 3등석 승객들이, 정작 1등 일꾼들인 줄 믿습니다.
주2)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된 사위 부족
인도네시아 이리안자야 지역에 부족 선교의 문을 열었던
돈 리차드슨 선교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식인종이라고 알려진 사위 족속 부락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워낙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족속이라 복음이 잘 먹혀들지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 족속은 배반을 미덕으로 아는, 아주 호전적인 전통문화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가룟 유다를 오히려 영웅으로 떠받드는,
아주 웃지못할 일까지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까 고민을 하던 리챠드슨 선교사는
어느 날 이들의 전통 의식을 바라보다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 하나를 얻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들은 두 부족이 싸우다가 한 부족이 질 경우,
싸움에 진 부족의 추장이 자기 아들을 상대 부족에게 제물로 갖다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추장의 아들이 바쳐지는 순간 전쟁은 끝나고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리챠드슨 선교사는 요3:16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평화의 아이를 주셨으니,
이는 아이가 재물로 바쳐지는 즉시 평화가 선포되는 것처럼,
그 평화의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그때부터 이 사위 족속이 복음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깨달으면서, 그때부터 호전적인 이 부족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동일한 복음이 오늘 우리 민족을 변화시킬 줄로 믿습니다.
저는 아직도 복음만이 이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이 민족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주3) ▲찬송가 작시자 가운데 프란시스 헤버갈이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영국에서 태어나 수도원장의 딸로 자란 그는 어린 시절을 아주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그녀가 독일로 유학오면서 처음으로 고생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몸에 병까지 들어 치료를 받던 그녀는 어느 날 뒤셀도르프의 작은 화랑에 들어갔다가
그림 한 점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램브란트라는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의 작품으로서
‘이 사람을 보라’라는 제목의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고 있는 그리스도를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내 생명을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주느냐?’
그림 앞에서 잠깐 생각에 잠긴 프란시스는
‘그 동안 자기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위해서
한 번도 고난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계속해서 그 그림 아래 씌여진 글귀가 십자가 위에 예수님과 겹쳐지면서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온 프란시스는 붓을 들어서 찬송시를 한편 적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185장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X2)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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