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의미 딤후4:6~8 01.12.10.설교스크랩/출처
저는 죽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무엇보다 죽음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디모데후서는, 바울 사도가 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
AD67년경에 로마의 감옥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기록한 서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리스천들의 죽음의 의미를 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1. 죽음은 떠남입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딤후4:6
▶이렇게 바울 사도가 고백합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이 왔다.’
그렇습니다. 죽음이란 떠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육체를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 보시면
성경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이 떠남이라는 단어는
결코 어떤 의미에서도 허무나 종말을 뜻하지 않습니다. 소멸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죽음은.. 결코 비극적 종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본문 딤후4:6절에 사용된 ‘떠남’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departure(출발)로 쓰여져 있습니다만,
희랍어에는 ‘아날루시스’ 라는 단어가 쓰여집니다.
그런데 본래 이 희랍어는 2가지 용도로 쓰여졌던 단어라고 합니다.
①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천막을 가지고 다녔어요.
그래서 한 장소에 도착하면 천막(장막)을 칩니다.
그러다가 다시 일정한 기간이 지난다음에, 다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하게 되면
천막을 매고 있었던 줄을 풀 때, ‘푼다’는 것이 바로 ‘떠난다’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②또 하나, 배가 항구에 매여 있다가 이제 출발을 하게 되면,
배와 항만 사이를 연결하고 있던 닻줄을 풀 때.. 즉 배가 떠날 때 이 단어가 쓰여집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이 출발/떠난다는 단어는
그 의미가 종말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여행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여행의 출발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죽음은 결코 소멸의 뜻으로 사용된 일이 없습니다.
기독교 주변에서 죽음을 소멸로, 없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결코 소멸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새로운 출발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어렸을 때, 소풍을 갈 때는
그 소풍에 대한 흥분 같은 것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성인이 된 지금도, 어떤 낯선 미지의 장소를 향해서 여행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가벼운 흥분이 우리를 들뜨게 만듭니다.
저는 이것이 정상적 크리스천이
죽음을 기다리는 죽음의 경험일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약간의 들뜸과 흥분 말입니다.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자요 지도자였던 본 회퍼 목사가
반 나치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죠?
그리고 마지막 교수형을 받기 위해서, 간수가 "나갑시다!"라는 신호를 주었을 때
직감적으로 그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을 때
본 회퍼 목사는 감옥에 같이 있었던 동료 수인들에게
이런 인상 깊은 인사를 남겼습니다.
"친구 여러분, 이제 저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결코 저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저는 새로운 여행을 위해서 출발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당당한 죽음 앞에서의 고백 이였는지요.
성경이 가르치는 죽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죽음은 떠남인 것입니다.
◑2.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죽음은 다시 만남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깊숙한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단절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더 이상 저들을 볼 수 없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 이것이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이번 미국의 911 참사사건 때도 보면 (2001년 911사태 몇달 뒤 시점의 설교)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가장 안타까운 사연들은
그들의 최후를 절감한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겼던 전화 메시지들이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핸드폰을 가지고
그들은 최후를 절감하며 전화했고, 많은 사연들이 지금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그들은 애인이든, 어머니든, 남편이든, 아내든
그들에게 마지막 사랑의 고백을 하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여보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연기가 차오르고 있어요. 큰 일이 생긴 모양이에요.
그러나 사랑했어요!"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사랑의 인사를 남기고 싶어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슬픔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결코 마지막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시 만남의 약속이 확인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의 확신이요,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의 확신이었습니다.
▲빌1:3절에, 바울은 이런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 삶과 죽음사이에 끼였다는 말이죠.
“떠나서” ...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무덤에서 영원히 잠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행처럼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라.”
떠나는 것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만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다른 성도들과 함께 있는 것도 포함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도
예수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경험이에요. 마치 그것은 거울을 통해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죽음을 통해 주님 앞에 서는 날
거울을 통해 봄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온전하신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죽음의 경험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찬양하던, 사모했던 그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왔던 모든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에게는 결코 Good bye~ 라는 인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Good bye : 멀리 떠나보낼 때, 앞으로 오래 동안 안 보게 될 때 하는 인사.)
▲죽음은 떠남이지만, 동시에 죽음은 만남입니다.
여러분, 주께는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습니다.
내 부모가, 나보다 약 50년 먼저 천국에 간다고 가정해 봅시다.
혹은 내가, 내 자녀들보다, 50년 먼저 천국에 간다고 해도 마찬가집니다.
그 50년.. 길게 느껴질 것 같지만, 천국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다’고 생각하면,
(천국에서는 지금 우리가 쓰는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잠시만 기다리면, 온 가족이 다 상봉하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은 단 하루도 안 걸립니다!
◑3. 죽음을.. 어린아이처럼 맞이하세요!
▲여러분, 죽음의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인간적으로 어떤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지’ 라는 어떤 감정 말입니다.
그러나 이때에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면
그와 같은 무력감을, 하나님께 대한 의존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가 죽음을 준비할 때 가장 좋은 태도는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성경적 교훈이라고 생각해요.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그랬는데
그 천국에 들어갈 때 가장 좋은 자세는,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기로서 출생할 때
또 아기로서 방금 태어나 자라날 때.. 우리는 무력하지요. 어쩔 수 없어요.
우리는 다만 우리를 돌보는 그 부모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의존하면.. 아버지가 안아 주십니다.
심지어 우리 예수님도 그런 태도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하나님을 간절히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삶이란 무엇일까요?
삶이란.. 우리의 욕망을 위해서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쥐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는 몸부림의 순간순간을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반면에 죽음은 그 몸부림을 마지막으로 포기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몸부림을 주 앞에서 깨끗이 포기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창조주 앞에 마지막 내어드리는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죽음의 순간이죠.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몸부림을 치면 부모도 편히 안아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기가 자기의 존재를 그냥 내어 놓을 때, 그냥 내어 놓을 때
아빠와 엄마는 자기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자녀를 끌어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말 그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았던 생을 마감하며,
마지막 내 존재를 아기처럼 주 앞에 내어놓는 그 순간
하나님 아버지의 완벽한 임재 안에서 우리를 끌어안아주시는 경험,
바로 그것이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이란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본문을 기록하던 바울사도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감옥에서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 감옥에 들어가서 '이번에는 마지막이다' 하는 예감을 갖고 있었어요.
그때 바울 사도에게 할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이제 기다림이 되었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더 오래 살아서, 더 많이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기고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심정으로..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울 사도의 ‘어쩔 수 없는 포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차라리 그것은 희망적인 신뢰요, 기다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4.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죽음은 상급입니다.
자, 8절의 고백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4:8
①"의로우신 재판장" ...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당시에 바울사도는 네로 황제에 의해서
그는 불의하게 체포되었고, 로마의 법정은 그를 불의하게 단죄 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의로우신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은 나를 아시고,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상급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이 순간, 바울의 고백입니다.
②“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여기서 "의"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는 불의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의해서, 또 불의한 판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순간 바울은
자기를 정당하게 판단해 주실 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그를 의의 면류관으로 상 주실 것을 기대한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 믿음 때문에, 바울은,
이 불공평해 보이는 죽음 앞에 서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죽음을 바라볼 때
혹은 우리가 사랑했던 어떤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볼 때
‘이건 정말 불공평하다, 우리 OOO가 이렇게 불쌍하게 죽어가다니..’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얼마나 많은 삶의 불공평함이 이 땅에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주장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에 의롭게 온 역사를 판단하실 의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내게만 아니라 나와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주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로 상 주실 주님을 바라보라’라고 바울 사도처럼 당당하게 고백하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을 갖는다면.. 죽음을 결코 억울하게, 불공평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5. 남은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다가올 죽음이 우리의 당당한 승리로 처리되기 위해서는
남아있는 인생을 어떻게 살까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대답은 7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①"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7
만약 여러분과 저에게 7절이 없다면, 8절은 기대할 수 없어요. 그렇죠?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었다면,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었다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면
(8절) 이제 후로는 의의 하나님 의의 면류관으로 저를 상급주실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 이 당당한 고백, 마지막 당당한 승리를 주님 앞에 누리기 위해서
여러분과 저는 다시 한 번 7절의 고백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믿음을 지켰으니...
그런데 이 "지켰다"라는 표현은
본래 아주 귀한 보물을 관리할 때 쓰여지던 단어입니다.
믿음은 보물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잘 관리해야지요.
여러분 가정에 보물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하십시다.
여러분은 정성을 다해서 관리할거에요 보험도 들고, 뭐 굉장히 관리를 할 거에요.
우리가 그런 열심으로 믿음을 지키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여정에는, 종종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어떤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적이 아닌, 다른 교훈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4:3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지키라'는 뜻으로 말합니다.
믿음을 잘 지키라고. 그러나 지키는 수세에서 끝나면 안돼요.
이 믿음을 나누십시오. 그것이 전도하는 것이지요.
②"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딤후4:5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말이 있듯이,
믿음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격적으로 전도인의 일을 할 때..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지난 금요일에 우리 서선옥 집사님의 영결예배/천국환송예배가 있었습니다.
제가 마지막 발인예배에,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성도님들이 많이 오셨어요.
‘왜 이렇게 우리 성도님들이 많이 왔나?’ 잠시 생각해 보니까
그 분이 뿌린 씨았들이었어요.
우리 서집사님은 전도폭발 훈련 받고 열심히 전도하던 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참 이런 상을 당한 어려운 가정을 위로하기 위해서
<경조 성가대>로 봉사하면서
상을 당한 사람들의 집에 늘 그 분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제 그 분이 떠나가시는 날,
그 분의 사랑과 그 분의 복음을 받았던 사람들이 와서
그 분을 환송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그 발인예배에서 ‘서 집사님의 출발은 아름다운 떠남이군요!’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은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세월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나는 나의 자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저녁 호숫가에 걸음을 멈추고"
라는 시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잠들기 전 몇 마일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내게는 지킬 약속이 있다
But 1 have promises to keep
내게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내가 잠들기 전 걸어야 할 몇 마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게 남아있는 그 몇 마일의 걸음 속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영광스럽고 당당한 인생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내 인생 여정 끝내어"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이 가시밭길 인생을 허덕이면서 갈 때에
시험과 환란 많으나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내 밟은 발걸음 마다 주 예수 보살피시사
승리의 개가 부르며 주를 찬송하리라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 더 읽으실 분 ........................................
▲도입 예화 : 죽음은.. 준비하는 사람만 편안하게 맞이한다.
미국의 부자 가운데 윌리암 할스트 라는 이름을 가진 부호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가 자기 나이 60세가 되었을 때
자기 자녀들, 친척, 친구들을 불러놓고
‘앞으로 내 앞에서는 농담이라도 절대로 죽음이란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 말아라!’
이렇게 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역사를 읽으면 로마의 한 황제는
신하들이 아침마다 자기를 알현할 때 마다
"폐하시여 죽음을 기억하시오!" 이렇게 인사를 하도록, 일부러 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윌리암 할스트라는 부자는
죽을 때 무지무지하게 고생을 하면서 고통 속에 몸부림하다가 갔는데
이 로마의 황제는 아주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죽음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만 승리를
그리고 안식과 평안을 줄 수 있다는 교훈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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