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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 사도바울 롬8:35~39 10.08.15.설교일부녹취
문) 사도바울이, 어떻게 그런 모질고 극심한 고난을 계속 겪으면서도,
주와 복음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는 사명자의 삶을 끝까지 살 수 있었을까?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의 거침없는 질주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인가?
답) 그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으로써.. 그는 모진 고난과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서신서인 로마서에 잘 나타나 있는데... 살펴보면...
▲흔히 성경 66권을 다이아몬드 반지에 비유하는데,
로마서를 다이아몬드, 나머지 65권을 그 다이아몬드를 감싼 링ring으로 친다.
다른 65권 성경은 억울하겠지만, 로마서가 그만큼 돋보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로마서 중에서도,
다이아의 가장 반짝거리는 핵심부분을.. 롬8장이라고 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동의한다.
이렇듯 롬8장은, 신구약 성경을 통 털어서, 복음의 진수와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 장의 마지막 부분이 어떻게 장식되어 있는지 아시는가?
오늘 설교를 통해 음미해 보려고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매일 매일, 그것도 하루 종일
죽임을 당하는 그런 자리에 이르렀다. 왜 그랬을까?
그가 피를 흘렸기 때문에,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에 그랬다.
교부 터툴리안 (160~220 A.D.)은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라고 말했다.
(경기도 양지의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에 가면, 큰 돌 위에 이 말을 새겨 놓았다.) 주1)
얼마나 무섭고 소름끼치는 말인가
그런데 사실이다.
바울은 종일 죽임을 당하고, 도살할 양처럼 여김을 받았다. 롬8:36↑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바울처럼) 종일토록 죽임을 당케 하시고,
매일 도살할 양처럼 대하신다면, 과연 (바울이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까?
내가 과연 바울처럼, 계속 복음을 전하는 사명의 길을, 잘 달려갈 수 있을까?
오늘 우리가 목회하는 것은 진짜 쉽고 행복한 축에 속한다.
어디가면, 도살할 양같이 여김 받는 게 아니라, 반대로 항상 귀빈으로 대접받는다.
항상 좋은 것 사 주시고, 좋게 대우해 주신다.
그러나 바울은,
헐벗고, 춥고, 하나님이 나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자처럼 대하셨다고..
내가 한 두 번 춥고 헐벗은 것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렇게 모질고 힘겹게 살았던 바울이건만
바울은 이 고민을 능히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 초인적인 삶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이렇게 우리에게 위대한 언어로 남기고 있다.↙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게 바울의 고민(예수 믿는데 따르는 연속적인 고통)의 해결책이었다.
하나님의 사랑!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8:31~32, 33~34는 길어서 생략.
왜 바울도 인간인데, 고민이 없었겠는가?
왜 바울에게, 도저히 풀리지 않는 난제가 없었겠는가?
오늘날 우리처럼, 그에게도 풀리지 않는 숙제가 엄연히 있었다.
그것을 고린도후서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저는 고린도후서가 성경 속에 있는 게 참 고맙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고린도후서가 없었더라면, 바울은 우리에게 신神이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를 읽으면서, 바울이 신이 아니라 인간인 것을 본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은, 거의 신이었다.
코브라가 물어도, 툭 털어버리고 지나가 버린다. 이게 인간인가?
에베소에서 바울이 설교하는데, 누가 2층 창문턱에서 졸다가 떨어져 죽었다.
그런데 바울이 곧장 기도해서 그(유두고)를 살렸다.
이게 인간인가? (神이다..)
그런데 고린도후서를 보면서,
1장부터 그가 인간의 면모를 가진 것을 본다.
“내가 아시아에서 너무 고생을 심하게 해서,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
내가 고생한 것을 꼭 알아달라는 것이다.
아니, 자기가 아무리 고생을 많이 했어도,
‘아니야, 나 고생 많이 안 했어!’ 이렇게 말해야 정상일 것 같은데..
그게 목회자의 심정일 것 같은데...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에 ‘내가 아시아에서 당한 고생을 너희가 꼭 알기를 바란다’고 편지했다.
그러면서 고린도후서에서, 자기가 고생했던 얘기를 줄줄이 쓰고 있다. 고후11:24~27 등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인간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도 우리처럼 고민했고, 아파했고, 힘들어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1:9
‘내가 이제는 영락없이 죽었구나’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 소망이 다 끊어졌다고 했다. 1:8
사도행전에서 거의 신으로 여겨지는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보니까, 이런 인간 밑바닥의 자리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바울도, 사역자의 길이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더 이상 살 소망이 다 사라지고
‘그래요, 주님, 이제 저를 죽여주세요. 이제 죽는 일만 남았군요’
그런 밑바닥에까지 내동댕이쳐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고민을 어떻게 넘어가고 있는가?
기도 중에 그는 깨달았다.
나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내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7
그냥 빠듯하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이긴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도 기도제목으로 삼기 바란다.
아들까지 주시면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인하여,
‘간신히’가 아니라, ‘넉넉하게’ 이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롬8:37 ‘넉넉하게 이긴다’고 성경에는 나와 있습니다.
이게 4차원의 신앙이죠.
그런데 우리는 4차원을 살지 못하고 3차원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4차원의 신앙이
우리 3차원의 삶에 전혀 적용이 거의 안 될 때
우리 신앙에 많은 갈등과 딜레마가 생깁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설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복음의 복은 ‘맛보기’라고요
천국에 대한 것, 앞으로 장차 누릴 영생의 모든 것이
현재는 맛보기로 약간만 이 지상의 신앙생활 가운데 주어져 있으니까
그 ‘맛보기’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전체는 아직 안 왔습니다.
또 어떤 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도가 필요하고, 묵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하나님과 교제, 인격적인 관계, 그 거리가 좁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사도바울처럼
‘나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내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라고 고백했던 사도바울처럼
그 4차원의 신앙이 자기 3차원적인 현실의 삶을
완전히 장악해서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우리가 ‘간신히’ 이기고 있는가?
아직 ‘하나님의 사랑, 아들을 주신 사랑’을 깊이있게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부터, 신앙의 조상들은,
날마다 ‘십자가’를 깊이 묵상했다.
그 사랑을 깨달아야.. (바울의 고백처럼) 넉넉히 이기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중요한 인식이다.
여러분, 결국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이 인식이 없으면, 또는 부족하면,
내가 하는 신앙생활..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신앙의 길을, 사역자의 길을.. 중도에 포기해 버릴 수 있다.
그 분의 사랑이 나에게 비춰올 때,
사도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나도 온갖 고난을 다 능히/ 넉넉히 이기고도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도 ‘넉넉히 이기느니라!’ 라고 선포하게 된다. 사도바울처럼!
▲롬8:38, 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할 때, 깨달은 점이 있다.
'당신의 사랑은 당신이 최선을 다하신 사랑이다!'
그렇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으실 만큼!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해 드린다.(이 설교문의 하이라이트)
그 분께 캐리라는 딸이 있었는데, 16살 때 암에 걸렸다.
딸이 16살이면, 가장 활짝 피는 아리따운 시기인데,
그만 중병에 걸려서, 암 투병을 해야 하다니...
세상에 그런 저주와 고난도 없을 것이다.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부모 마음은, 찢어지고 또 찢어졌을 것이다.
대신 죽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이런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저와 제 가정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향해서
제 딸이 암에 걸리기 훨씬 이전부터, 굳게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떤 환경과 처지를 만나더라도
십자가에서 당신이 보여주신
그 사랑을 먼저 바라보지 않으면,
내 환경과 처지를 쳐다보지 않기로, 제가 굳게 결심했습니다.’
반드시 피 범벅된 십자가를 먼저 바라보고,
그 다음에 제 환경과 처지를 바라보겠습니다.. 라는 결심이었다.
(아니, 이런 멋있는 기도를 다 드리다니!)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은, 최선을 다하신 사랑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낙심한다.
①많은 사람들이 한 면만 우겨쌈을 당해도, 힘들어한다.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내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도, 나는 싸인 적이 없었다고.’ 고후4:8
두 면만 가로막혀도, 너무 힘들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방(사면)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이 설교문의 주제)
②우리는 조금만 힘들고 답답해도 난리 야단법석을 떠는데,
누군가 나를 조금 외면, 거절, 버리는 것 같으면,
나는 그 거절감과 소외감 때문에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데..,
바울은 말한다.
‘내가 답답한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고후4:8b
바울은 최선을 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있었다.
③누군가 나를 조금 오해해도, 나는 무지 힘들어하는데,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내가 핍박을 받아도, (수많은 누명과 배신과 배반을 당해도) 나는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고후4:9
④우리는 조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울고 불고 힘들어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내가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나는 망하지 않는다.’ 고후4:9b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더 매를 맞고. 더 고난을 당했다.
그러니까 바울이 (어쩌면) 편하게 살 수 있는 길도 있었다.
그것은 복음 전하러 멀리 다니지 않고, 그냥 복음을 전하지 않고
조용히 쥐 죽은 듯이 복지부동하면서 살면 된다.
그런데 바울의 딜레마는,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전도여행을 하면 할수록,
고난과 핍박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줄어들어야 되는데)
오히려 고난이 자꾸 더 늘어나는 것이었다.
아니,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자의 귀신을 쫓아내 주었으면, 잘 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잘한 결과가 무엇인가?
고소를 당하여, 감옥에 붙잡혀 흠씬 두들겨 맞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설교하러 가면, 식사대접 받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그런데 바울이 피를 흘려야만 교회가 세워지는 것인지..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피를 흘렸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교회를 위해서, 내 육체에 채운다고’ 골1:24
그의 피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사도바울이 흘린 피 위에, 교회를 이루고 서 있다.
그러나 그렇게 얻어터지면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고난이 자기에게 ‘최선’ best 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섭리는 무한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것을 믿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하나님의 사랑을 나에게서) 끊을 수 없느니라’ 롬8:38~39
나에게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시는가?
......................
주1)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은,
원래 터툴리안의 ‘순교자의 피는 씨앗이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그의 <변증서>에서 나온 말이다.
"the blood of the martyrs is seed" (Apologeticum, 50).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
초대교회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신앙을 위해 숱한 고문도 당하고, 죽음도 불사했다.
당시 크리스천들은, 성찬식이 사람의 피를 마시는 행위로 오해 받았고,
또한 형제, 자매간의 사랑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집단이라고 오해도 받았다.
그래서 세상은, 크리스천들을 잡아서 고문을 가하고, 죽음에도 넘겼던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이 사회에서 버려지면 질수록, 그들은 오히려 성장했다.
그런 당시 초대교회의 시대상황 가운데서,
터툴리안은 말했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the blood of the martyrs is seed" (Apologeticum, 50). ▣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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