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부음 출39:1, 40:12 10.08.26.설교스크랩
▶출39:1,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청색 실과 홍색 실과
성소에서 섬기기 위한 정교한 옷을 만들고, 또 아론을 위한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
아론이 제사장인데 아론을 위해서 거룩한 옷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모두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아론이 거룩한 옷을 입었던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아론은 구약 시대니까, 눈에 보이는 거룩한 옷을 입었지만,
지금은 이제 신약 시대니까, 진짜 우리가 거룩으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계시록에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거룩한 옷을 안 입었다는 것입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입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3:17
▶한 벌이지만 두 겹처럼 된 예복
어떤 사람들은 옷이라고 하면, 잔치 석상의 예복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 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복이라는 것은 두 개가 하나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①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과
②성도들의 거룩한 행실,
이 두 벌이 한 벌로 연합되어있는 것입니다.
①마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그 옷의 안감이라고 한다면,
②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그 옷의 겉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것이 실제로는 하나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 옷을 입고 있는 것인데,
구원이라는 것이 칭의 일뿐만 아니라 중생입니다.
①칭의는 의롭다함이지만
②중생은 우리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칭의는 받았는데, 중생을 안 할 수는 없는 것이고
또 중생은 했으나, 칭의는 안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보혈로 내가 의롭다함 받는 것①과
그러면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②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라는 것은 칭의와 믿음에 기초한 것인데
회개라는 것은 죄를 떠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작부터 거룩함과 의롭다함은 사실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헷갈리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말하고,①
어떤 경우엔 또 흰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②
또 두루마기를 빠는(세탁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고,
깨어서 그 옷을 더럽히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도 하는 이런 말씀들을 보면,
헷갈릴 수도 있는데,
이 두 가지가 하나로 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경의 딱 어느 한 구절만 붙잡지 발고, 두루두루 골고루 봐야 합니다.)
우리가 그 옷을 입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단지 칭의만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거룩 또한 추구해야합니다.
마땅히 거룩을 추구하고, 거룩으로서 옷 입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는 복이 있나니 계22:14
우리가 벌거벗은 자가 되지 말고,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다보면 죄도 짓게 되고 옷이 더러워질 때가 많기 때문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이 되어야할 줄로 믿습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두루마기는 몸에 걸치는 것이라서, ‘행위’를 연상하게 됩니다만
실제로 성경에서 말하는 두루마기는, 우리의 마음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두루마기는 외적인 행동 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리의 중심이고, 동기입니다.
그것이 두루마기입니다. 그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두루마기를 빠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동기를 바르게 갖는 것, 마음을 청결하게 갖는 것,
하나님 앞에서 생각과 가치관을 바르게 갖는 것, 하나님 앞에서 중심이 바른 것,
허탄한데 뜻을 두지 않고 중심이 바른 것, 그런 것이 두루마기를 빠는 것입니다.
마음의 두루마기를 빨아야, 비로소 행위가 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마음과 생각을 더럽힐 수 있는 모든 유형의 죄에서 회개하고 돌아서고 깨끗하게 하는 것,
이런 것이 두루마기를 빠는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빨고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40:12, 너는 또 아론과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가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너는 또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겉옷을 입히고
그 아버지에게 기름을 부음 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
그들이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하시매...
아론과 아들들에 대해서 3가지가 나옵니다.
물로 씻기고, 거룩한 옷을 입히고, 기름을 붓습니다.
아론과 아론의 아들은 대제사장과 제사장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자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가요?
우리가, 아론의 아들들처럼, 신약의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쓰임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①먼저는 물로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는데
예수님의 보혈 공로로 죄 사함 받는 것.
또한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처럼 엡5:26
물로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물’은, 직전구절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엡5:25)
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물과 피’로 봅니다. 다시 말해서 ‘피’입니다.
②그 다음에는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서두에서 설명드렸습니다.
③기름을 부음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결국은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물로 씻는 것만으로는, 거룩하게 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쓰임을 받으려면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서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통로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기름 부음을 통해서 우리를 쓰는 것이지,
단순히 지식만 가지고 우리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기름 부음을 통해서 결국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나타나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께 쓰임 받는 주님의 종이 되려면,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증거는, 은사가 임하면서
뭔가 자기가 하는 일에 탁월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바라보면,
‘이건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일2:27
여러분, 메시지가 단순히 책 많이 읽고, 연구 많이 하면 거기서 오는 줄 알지만,
그것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지는 기름 부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말씀은 기름 부음에서 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 말씀(요일2:27)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붙잡고,
근 25년 이상 나의 기도 제목으로 삼고, 간구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말씀이 실제로 제 삶 속에 이루어짐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 스스로 한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왜 하필 "기름부음"이 우리를 가르친다고 표현했을까요? 요일2:17
그냥 “성령이” 가르친다고 해도 될 것을, 굳이 “기름부음”이 가르친다고 했을까요?
(별 게 다 궁금하지요? 하지만 별 게 다 궁금하니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궁금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말씀을 보면서 궁금해야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왜 성령이 아니라, 기름 부음이 우리를 가르친다고 했을까요?
그것을 제가 2주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참 단순한 것인데 그걸 몰랐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십니다.
거듭날 때 성령님이 제 안에 들어오시고 성령으로 세례 받을 때
성령님이 제 위에 임하시고 성령님이 제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나 항상 제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늘 읽을 때마다 진리가 깨달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묵상한다고 해서, 기도하고 얘기한다고 해서 무조건 깨달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말씀이 깨달아질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기름 부음이 임할 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거하고 계시지만, 평소엔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름부음이 임하면, 기름이 쳐지니까 머리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안 돌아가던 머리가,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임하니까,
갑자기 부드럽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막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메시지가 임하고, 분별하게 되고, 설교가 통째로 임하기도 하고,
어떤 책이 통째로 임하기도 합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아십니까? 기름 부음을 통해서 사용하십니다.
단지 내 지식과 인격 혹은 내 노력, 내 열심과 재능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국 기름 부음을 통해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특별히 말씀으로 섬기는 자들은,
기름 부음이 임함으로써 무엇을 전해야 할지 알게 되고
무슨 설교를 준비해야할지를 알게 되고, 무슨 책을 써야할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기름부음이 임함으로써 되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단지 지적이고 종교적이면 안 됩니다.
성령을 터부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지식이나 재능이나 학벌을 의존하지 않고
성령의 기름 부음을 의존해야 합니다.
기름 부음이란 것은 현재적인 것입니다. (매일, 매순간 새롭게 받아야 한다는 뜻)
기름 부음이란 것은 지금 나에게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받은 것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에게 임해있는 거여야 합니다.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주 떠나간다는 게 기름부음이 떠나간다는 거잖아요.
주 떠나가시고, 기름부음이 떠나면.. 내 생명 헛된 줄로 아시길 바랍니다.
다윗 왕 같은 사람은 얼마나 기름부음에 대해서 필사적이었습니까?
범죄하고 난 다음에 “주의 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왕위를 거두지 말라는 게 아니라, 왕위에 집착하지 않고, 성령님이 떠나실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직이니 교수직이니 이런 데 집착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주의 신이 정말 나와 함께 하는가, 기름부음이 나와함께 하는가.
기름부음이 나를 가르치고 있고, 기름부음을 통해서 주님이 나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가?
그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가 진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종’입니다.
요즘 교회마다 많은 설교가 쏟아져 나오지만, 기름부음 받은 설교는 참 드뭅니다.
책들도 홍수같이 나오는데, 기름부음 받은 책은 참 찾기가 힘듭니다.
사람들이 베스트셀러라고 한다고 베스트셀러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명설교가라고 추앙한다고 그 사람이 정말 명설교가가 아닙니다.
하늘의 관점은 다릅니다. 기름부음이 가르쳐준 설교를 하는 사람.
기름부음이 가르쳐준 책을 쓰는 사람. 그런 설교를 듣고 그런 책을 봐야 됩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하는 설교나, 쓰는 책은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을 때.. 진도가 술술 나갑니다.
(죄송하지만) 중간에 짜증나지 않습니다. 채널을 돌리지 않습니다. 고정적이 됩니다.
기름부음이 있어야 이게 스무스하게 지나가는데
기름부음이 없으니까...
기름부음에서 나온 책은 딱 잡으면 끝까지 다 읽어버립니다.
어떤 책은 그냥 읽다가, 중간 중간 읽다가, 읽다가 한 달도 가고, 두 달도 갑니다.
나중에 결국 절반 읽다가 맙니다. 이게 기름부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책도 무조건 페이지를 많이 쓰면 안 됩니다. 성령이 딱 쓰라는 것만 써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나옵니다. 베드로가 그랬잖아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 벧후1:21
여기서 ‘예언’은 미래 일을 예언하는 뜻이지만,
광의적으로 ‘설교’를 의미합니다. 신학자들이 그렇게 해석합니다.
포인트는.. ‘하나님께 받아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기름부음이 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나는 안 된다’ 하고 포기하지 마시고,
‘나도 한 번 받아서 해 보자’고 결심하고, 기도하고,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받지 않으면, 나는 설교 안 하겠다(못 한다. 펑크 낸다)’는 각오로 끝까지 버티면..
대개의 경우, 작은 거라도 주십니다.
그건(예언은, 설교는) 단순히 권면일 수도 있고, 축복일 수도 있고,
그건 회개를 촉구할 수도 있고, 그것은 교리적으로 바로잡아주는 것일 수도 있고,
미래를 알려는 것일 수도 있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은 한 기능일 뿐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하는 것은,
미래의 일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를, 감동 받은대로, 다양하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 더 읽으실 분 .....................................
▶성경에 보면, 선지자 중에 최고의 예언자가 세례 요한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와서, 미래에 대해, 그리 많이 예언하지 않습니다.
개인적 예언을 많이 했는지 모르지만, 성경에는 안 나옵니다.
‘예언자’라고 부르기가 무색할 정도입니다.
‘미래사건에 대한 예언’은 거의 안 했으니까요.
그런데 세례요한의 ‘예언’의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에 대한 증거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등
-당시 사람들의 죄에 대한 지적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것이 <예언>의 정수입니다.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을 세례 요한이 전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
그런데 이런 요소들은, 오늘날의 설교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세례요한의 <예언>은
오늘날로 치면 <설교>라는 것입니다.
예언자 세례요한은, 다른 말로 설교자 세례요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벧후1:21절에서 말한 <예언>은
오늘날로 말하면 <설교>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대언한 것입니다.
그게 예언이요, 오늘날로 말하면 설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기를 ‘세례요한이 예언사역을 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예언이냐, 설교냐.. 그걸 따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고 싶은 그 얘기를 정확하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양들을 돌보는 건데 상담만하고,
심방만 하는 걸로 목회를 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해야 하지만, 거기에 목회의 승부수를 거는 게 아닙니다.
사역은 설교를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제대로 하면 상담을 할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열 개 중에 아홉 개는 설교로 끝나는 것입니다.
독특한 한 개 정도나 상담하면 되는 거지요.
설교를 제대로 하면 심방할 일이 별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보면 상담이 거의 없습니다. 심방도 저는 안 합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열심히 와가지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사역하고, 봉사하고, 집회참석하고, 은혜 받고...
그러면8~9부 능선 넘는 것입니다. 예배와 설교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아주 중요하고 핵심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역은 설교로 하는 것입니다.
설교에 신경 안 쓰는 예언사역자, 복음전하는자... 오래 못 갑니다.
설교는 기본적으로/공통적으로 중요합니다.
목회자들은 근본적으로 말씀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역이 뿌리가 깊어지고 견고해지고 알차게 되고,
힘 있고 영향력이 있고 지속적으로 번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역이 쓰러지는 이유 중의, 중요한 것 하나가 말씀이 튼튼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사도라 하면서 다른 능력과 은사는 많은데 말씀이 튼튼하지 않는 사람,
선지자라 하면서 계시는 잘 받고 천국에 왔다 갔다 하는데 말씀이 튼튼하지 않고,
복음전하는 자라서 기적, 표적은 일어나는데 말씀이 튼튼하지 않고,
목사라 하면서 사랑은 많고 심방과 상담을 잘 하고 너무 인격적이고 좋은데 말씀이 튼튼하지 않고,
교사라 하면서 지식은 많고 말재주는 뛰어나고 조직적으로 강해설교는 잘하는데
실제로는 말씀이 튼튼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역이 약하고 쓰러져 가는 것입니다. 원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역은 기름부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인격도 필요하지만 인격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가 필요한데 은사를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 기름부음입니다.
그런데 목사, 교수라는 직분에만 만족하고
교계에서 어떤 한 자리하는 것에만 만족하고
기름부음이 자기를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기름부음이 약해져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자기 설교가 기름부음에서 나오지 않고 있어도
이미 세력이 형성되어서 사람들이 듣고 있으니까 그것이 괜찮은 줄 아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름부음을 통해서 우리를 사용하고
우리는 기름부음으로 사역하고 기름부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딴 생각하지 말고
지식 재능, 학벌, 조직, 프로그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성령, 기름부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섣불리 나서지 말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면서
전심으로 기름부음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신약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 그랬습니다.
복잡한 것이 아니고 단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진지한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고,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 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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