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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0

피곤하여 지치신 예수 2711

LNCK 2010. 10. 27. 00:13

◈피곤하여 지치신 예수                요4:4~7                 10.09.19.설교녹취, 편집 

 

 

◑1.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을 똑같이 만나주신 예수님


▲기독교 엘리트주의를 경계해야!

유진 피터슨 목사는 ‘기독교 엘리트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저서「현실, 하나님의 세계」에서          *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

요3장의 니고데모와,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을 비교하고 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서로 극과 극을 달린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한 명은 사회 상류층이고, 한 명은 사회 하류층인데,

예수님은 그 두 부류를 둘 다 만나셨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요한복음 3장과 4장에 연속적으로/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그러면서 피터슨 박사는,

‘기독교가 엘리트주의로 나가다 보면, 사회 소외계층과 점점 멀어지면서, 참된 영성을 잃기 쉽다’면서,

참된 크리스천 영성은, 예수님의 영성을 본받아,

(예수님이 베다니 촌의 나사로 같은 이를 친구로 삼으신 것을 본받아)

엘리트 계층뿐만 아니라,

사회 소외계층과도 과감하게 교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의 비교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남자

   여자

   내부인 insider

   주변인 outsider

   도시인

   시골인

   전문 직업인

   비전문 직업인 혹은 실업자

   존경 받는 사람

   멸시 받는 사람

   정통 유대교인

   이단자(사마리아인)

   주도적인 사람(예수님께 찾아옴)

   수동적인 사람(예수님이 찾아가심)

   유명인사

   무명인사

   예수 믿을 경우

   자기 인간적 명성이 위험할수도..

   예수 믿을 경우

   하나님의 명성이 위태할수도..


니고데모와도 긴 대화를 하셨지만,

그런데 이 이름도 없는 무명의 여인에게, 예수님은 가장 긴 대화를 하셨다.

성경에 가장 긴 대화내용이 기록된 것은, 요4장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이다.

12사도와도 이렇게 긴 대화를 나눈 적이 (성경에는)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균형잡힌 사랑이다.



◑2. 예루살렘의 예수, 사마리아의 예수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추구하는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예수이다.

오늘날 성도들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해서, 권능을 받고, 천국이 되었던

그 ‘예루살렘의 예수’를 동경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권능의 예수, 능력의 예수, 영광의 예수이다.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13:13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히13:11


우리의 신앙생활이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기쁨과 그런 만족만 추구하는 것은

잘 하는 신앙생활은 아닌 것 같다.


화려하고 즐거움에 가득 찬 예배가 있는 곳,

예배의 기쁨이 있는 곳..

그런 사도행전적 ‘예루살렘의 예수님’을 추구함과 동시에


그런 신앙과 균형을 맞추어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겪으셨던 그 능욕을 지고,

그 예루살렘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영문: camp, 군 주둔지, 예루살렘 성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촉구한다.


오늘날 ‘오순절 예루살렘의 예수’쪽에 너무 치우쳐 있기 때문에,

‘영문 밖 예수’ 또는 ‘사마리아를 방문하신 예수’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계시록에 보면

성도들과 천사들이 노래하는 분은

‘성령의 권능의 예수님’이 아니라..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셨다.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인재는,

‘능력과 권세로 화려한 사도행전적 스타’가 아니라

어쩌면 ‘묵묵히 죽임당하는 썩어지는 밀알들’이다.


주님의 역사는.. 죽음을 통해서..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죽는 십자가 역사가 없는 곳에서는.. 기독교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감격이 약화된 채,

성령의 능력, 기쁨, 영광만을 추구한다면.. 한쪽에만 극단적으로 치우친 신앙이며,

자기가 원하는 능력, 기쁨, 영광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런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 영문밖으로 나가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용/ 껄끄러운 사마리아


▲성령을 받고도, 사마리아로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사도행전에,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행1:8 

예수님은, 분명히 사마리아 성에 나아갈 것을 명령하셨다.


그래서 몇 날이 못 되어, 약속하신 성령이 권능으로 임하셨는데,  행2장

그런데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남으로써   행8:1

사마리아로 흩어질 때까지는.. 제자들이 사마리아로 가지 않았다.


행1:8절의 약속에 따라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성령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처음에는 사마리아에 자발적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사마리아는.. 껄끄러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은.. 껄끄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고, 은혜 체험을 하고도,

껄끄러운 사람을 만나서 교제하는 것은..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사마리아 인은.. 가깝고도 먼 사이

역사적으로 보면, 유다와 사마리아는 원래 같은 (유대)민족이다.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강대국이 침입하면, 과거에 두 나라는

서로가 같은 입장에 설 수밖에 없는, 같은 민족이었다.


그런데 내부적으로 유다와 사마리아는 서로 갈등했다.

서로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서로가 이방인이나 되는 것처럼 멀리 했다.


놀랍게도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하여, 성령의 기쁨이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은, 사마리아와 즉시로 화해를 일으키지 못한 것 같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도 ‘사마리아’가 있는데,

    나랑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정서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같은 사무실에 꼴 보기 싫은 동료 아무개,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기 싫은 누구,

    심지어는 가정에도 ‘사마리아’가 있을 수 있다.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사람이.. 오히려 누구보다 먼 거리감을 느끼니까.. 괴로운 것이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요4:4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가야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영어성경에는 must, have to를 쓰고 있다.

예수님은 ‘반드시 가야하겠다’고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껄끄러운 그 곳에 ‘반드시 가야 하겠다’고 하셨다.

오늘 우리도 ‘껄끄러운 장소, 껄끄러운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한다must는 뜻이다.


▲껄끄러운 사람이 많은 교우 관계

제/설교자가

미국 이민사회에서 목회한지 7년이 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어떤 분이 우리 교회에 오셨다가

‘저 사람이 이 교회에 있네’ 하고는,

다시는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을, 제가 몇 차례나 경험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혼율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때문에 이혼의 사유가 더 늘어나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인간관계의 갈등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이 점점 더 늘어나서,

심지어는 시내 식당에 밥 먹으러 갔을 때,

넌 크리스천들보다, 크리스천들에게, 껄끄러운 관계가 더 많다는 것이다.


식당에 가서도, 꼴 보기 싫은 교인이, 저쪽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어서

밥맛을 다 잃어버리는, 혹은 그 식당을 나와서 다른 식당으로 간다면

‘내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하겠다.


현대교회는, 죄사함은 있지만, 화해는 힘들다.

속죄제는 있지만, 화목제는 어렵다.

우리들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성경을 살피며,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살피며,

내 삶에 속죄제와 화목제가 둘 다 있기를 바란다.

(저/설교자도 아직도 용서가 깨끗하게 안 되는 목회자가 2사람 남아 있다.)



◑3. 권능의 예수, 피곤하여 지치신 예수


예수께서 행로에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요4:6

놀라운 것은, 위 본문에 예수님이 ‘피곤하여 지치셨다’고 나와 있다.


어쩌면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몇 안 되는 구절 중 하나이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유대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셨는데,

그 때도 ‘피곤하여 지치셨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주리셨다’라고만 헀다.)


걸어서 사마리아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우물가에 도착해서, ‘그대로 앉으시니’  4:6

피곤해서 그냥 우물가에 도착하자마자 털썩 주저앉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낯선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부탁하셨다. 요4:7


요4장에 나오는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신적인 예수님이 아니다.

우리처럼 나약하신 예수님이시다.

행로에(여행 중에) 피곤하고 지쳐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신 예수님

지치신 예수님..

목말라서 물 좀 달라고 부탁하시는 예수님..

 

▲제/설교자가 젊어서 방황할 때, <피곤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젊은 시절, 제 인생의 문제가 너무 산적해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더 꼬이고,

이제 더 이상 노력도 할 수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럴 때

주님의 능력과,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주님이 주시는 문제 해결, 기도 응답...

이런 것은 제게 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제 문제가 너무 커서 그랬는지)

주님이 주신다고 하는 예배의 기쁨조차도.. 저는 느끼기 어려웠다.

사람들이 기뻐하며 찬송하는 그 예배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좌절되었다.


전능자,

우리에게 기쁨과 승리를 주시는 주님을..

나도 찾았지만,

그런 주님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만나지 못했다.


그 당시 제 모습은,

마치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사마리아 여인의 삶처럼,

메마르고, 삶의 욕심(의욕, 만족)은, 그 무엇으로도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행로에 곤하여 지치신 예수님을 만났다.


    승리자, 전능자 예수님이 아니라..

    곤하여 지치신 예수님,

    오히려 나도 지쳐 있는데 내게 물을 달라며 다가오시는 주님!


우리가 사마리아 여인처럼 인간관계가 다 파괴될 때,

기쁨이 다 새어나가고, 메마르고 어려운 시기를 지낼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들은, 능력의 주님을 만나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나보다 더 지치신

우물가의 예수님, 겟세마네 예수님, 골고다의 예수님을 만난다.


그 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좀 도와주겠니?”


내가 인생 행로에 곤하여 지쳐서 교회에 왔는데,

내가 힘을 얻기 위하여 교회에 왔는데,

오히려 예수님이 그러신다.

“내가 더 힘드니, 나를 좀 도와다오”

(다른 표현으로, 십자가에서 피곤하신 예수, 겟세마네에서 지치신 예수이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잊어버린 예수(의 일면)이다.

    능력의 주, 기쁨의 주가 아니라, 피곤하여 지치신 예수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피곤하여 지치신 예수님의 모습이

    내게 힘을 주고, 은혜를 주신다.

    나를 구원하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셨으면.. 예수님이 기진맥진 다 지치셨을까!


    거기서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발견했다.

    주님의 위로를 발견했다. 나는 은혜를 받았다. (동병상련 이랄까?) 


이것을 적용하면,

목회자가 꼭 잘나고, 승리하고, 승승장구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목회자도,

지치고, 괴로워하고, 힘들고, 피곤해하는데, 물 좀 달라고 부탁하는데..

거기서 '사마리아 여인'들이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를 통해 주님을 발견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모든 크리스천들이 마찬가지다.

예수 믿어서 승승장구하고, 성공하고.. 그게 전도에 도움이 되겠지만, (믿으니까 잘 되잖아!)

반대로 예수 믿어서 힘들게 살고, 고생하고.. 거기서도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연약한 크리스천의 언행을 통해서..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기쁨의 예수, 고난의 예수..의 균형

우리는 너무 승리의 예수, 기쁨의 예수를 추구하기 쉽지만,

종종 예수님은 피곤하여, 지치셔서, 목마르셔서, 우리에게 다가오기 원하신다.

그리고 “나를 좀 도와주겠니? 내게 물 좀 주겠니?”하고 오히려 내게 요청하신다.


그럴 때 우리들도

더 이상 ‘기쁨의 주님’만 추구하지 않고,

‘기쁨의 예배’만 추구하지 않고,


우리가 예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 재 버리는 곳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외면당하신 곳,

그곳에 계신 주님께로 나아가자는

히13:13절 같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되시기 바란다.


▲어느 한 구절만 빼서 암송하지 말고...

우리는 이런 말씀을 잘 암송하고, 좋아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13:15

  

그러나 바로 그 앞절에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13:13

라는 말씀이 나온다.


문맥을 따라 두 말씀을 연결하면,

능욕을 지고, 영문 밖 십자가로 나아가는 성도가

찬미의(기쁨의) 제사를 드리게 된다는 뜻이다.


현대교회는,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는 말씀은 암송하고 있는데,

영문 밖 재 버리는 곳으로 그의 능욕을 지고 나아가자..는 암송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어려서는 영문밖 (서문밖) 교회 이름이 많았었는데,

그때는 어려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아리송했다.

예수님이 붉은 암송아지가 되어서, 태워지고 재가 되어서, 그 재버리는 곳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도, 구약에는 재버리는 곳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구약의 제사는, 그 짐승의 몸, 내장등을 영문 밖에서 불살랐고, 히11:11

신약의 예수님도, 자기 몸을 영문 밖에서 못 박히셨으니,  히11:13

우리도 그 발자취를 좇자고 촉구한다.


▲화려한 은혜만 찾다가는.. 그런 은혜 못 받는다.

왜냐하면,

본질상 고난기쁨이 짝pair으로 같이 가고,

영문밖 십자가의 예수와 부활의 예수가 짝을 이루는데,


우리는 둘 중에, 고생되는 것 한 개는 버리고, 영광스런 것 한 개만 취하려고 하니까,

마치 젓가락 한 개, 양말 한 개만 남은 것처럼..

우리가 원하는 기쁨과 능력의 예수를 얻지 못한다.

그 짝이 되는 고난의 영문밖 예수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분, 화려하고 즐거운 행2장의 예루살렘의 예배만 추구하지 마시고,

오히려 히11:13절의 영문밖 제사

요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이런 것들을 먼저 추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란다.

그러면 기쁨의 예배는, 그 결과로 따라온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의 성령운동은,

성령의 기쁨, 예배의 기쁨에 마치 올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계시록의 천사들의 찬양은.. 죽임당한 어린양을 예배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받은 은혜와 축복만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이 신앙이다.  롬5:3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환란 중에서 기쁨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나가면서

우리는 예루살렘이라는 화려한 종교, 예루살렘이라는 화려한 예배,

거기서 우리는 빠져나와야 한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하여 어떻게 죽었는지를 깊이 묵상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기쁨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기 보다는,

그 분을 위한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것을 우선적으로 추구할 것이다.


그런데 참된 기쁨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난 가운데 생기더라는 것이다.

기쁨을 추구한다고 기쁨이 생기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묵상할 것은

놀랍게도

해결해야 될 죄가 있고,

해결되어야 될 삶의 문제가 아직 있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 말씀하신다. ‘내가 생수를 네게 주리라!’


우리 생각에는,

뭘 다 갖추어야.. 그래야 주님이 임하시고 은혜를 주실 것 같지만,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를 보면,

목말라 갈급하는 사람에게, 아직 그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더라도,

예수님은 생수를 그에게 나눠주신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긍휼의 주님이시다.

우리가 언제나 교리적으로 ‘먼저 회개해야 돼, 그래야 성령을 받지..’

그것이 교리일 수 있다.


주님은, 생수를, 성령을

목말라 갈급 하는 사람에게.. 일단 먼저 나누어주신다.

그 사람이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차제에 할 일이고..

(이런 케이스도 있다는 것이다.)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