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냐냐 와 도도 왕상18:21, 빌4:12~13 08.07.06.설교녹취
‘냐냐와 도도’는
이어령 박사님의 책 중에 나오는 말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줄여서 ‘냐냐’,
‘이것도 저것도’ 줄여서 ‘도도’인데,
'냐냐'를 선택하지 말고, '도도'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2개의 이질적 항목을
대립적으로 보려하지 말고, 융합적으로 보라는 것이다.
즉 ‘냐냐’가 아니라 ‘도도’로 보라는 것인데...
예를 들면
아버지는 ‘더우니까 창문을 열어라’
어머니는 ‘모기 들어온다. 창문을 닫아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창문을 열것이냐, 창문을 닫을 것이냐 .. 즉 '냐냐'가 아니라,
창문에 방충망을 달아서
창문도 열고, 모기도 안 들어오게 하는 식,
이게 ‘도도’의 해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윈원 개념이다. win win
21세기가 되면서, 세계가 지구촌화 되어가는 시대 조류에서
문화의 상대주의와 양극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냐냐’가 아니라, ‘도도’의 관점을 꼭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탁월한 식견이다.
그런데 저/설교자는 오늘, 이어령 박사님의 이런 논지를
좀 더 확장해서, 기독교 신앙과 연계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데는 ‘냐냐’이지, ‘도도’가 아니다.
▶사랑에 빠지면, ‘냐냐’가 된다. ‘도도’가 될 수 없다.
김군이, 이양과 박양이 둘 다 마음에 드는데,
결혼을 하려는데 ‘도도’가 가능한 것인가?
이양도 좋고, 박양도 좋고, 둘 다 좋아서, 한 남자가 두 여자와 결혼이 가능하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위에서는 ‘도도’가 좋다고 했지만)
사랑이 개입된 차원에서는 절대 ‘도도’가 될 수 없다.
사랑과 결혼 문제는 절대 ‘냐냐’가 되어야 한다.
‘이양도 좋고, 박양도 좋고’가 아니라,
‘이양이냐, 박양이냐’를 두고 결정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다. ‘냐냐’이지, ‘도도’가 아니다.
본문에서 엘리야는
‘여호와냐, 바알이냐 ’ 선택하라 이렇게 얘기한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왕상18:21
오늘날 문화상대주의 또는 다원주의pluralism에 편승해서
불교도 기독교도 (교회도 다니고, 점집에도 다니고)
힌두교도 기독교도
제사도 예배도 함께 할 수 있다... 점차 이런 분위기로 변하고 있다.
‘도도’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나는 그렇지 않는다고요?
그러면 아래 질문에 한 번 답해 보시라.
‘하나님이냐 재물이냐?’로 신앙생활 하는지,
아니면 ‘하나님도 좋고 재물도 좋고’ 로 신앙생활 하는지..? *재물 대신에 정욕, 명예도 들어감
마6:24절에 너희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
즉 ‘하나님이냐 재물이냐?’를 물으시는데, (냐냐)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도 재물도’ 신앙으로 바꿔버렸다. (도도)
창세기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과제는
‘하나님이냐, 독자 이삭이냐’를 결정하라 했는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도 자식도’ 즉, 도도 신앙으로 바꿔버렸다.
하나님도 믿고, 자식도 우상으로 섬기고,
그래서 기독교도 아니고, 타종교도 아닌.. 이상한 기독교가 되어버렸다.
(사도바울의 표현으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 갈1:8)
바알은 3천년 옛날 사람들의 종교인가? 아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우리 마음이 무조건 부자 되기를 원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도 믿고, 부자도 되자..
이게 바로 기독교신앙이 이상하게 변질된 것이다.
하나님이냐, 부자냐.. ‘냐냐 신앙’을,
하나님도 부자도.. ‘도도 신앙’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하나님만 먼저 섬기는 가운데, 따라오는 물질적 축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 복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물질을 하나님처럼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다.
또한 물질의 복을 못 받더라도.. 괜찮다. 그게 신앙의 본질은 아니니까!)
옛날 사람들이
바알 우상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풍요를 숭배하다보니까, 바알 우상을 숭배한 것이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니까.. 그게 뭐든지 가리지 않고.. 바알을 숭배했다.
요즘도 간혹 그런 사람 있다. 돈만 많이 번다면, 직종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사람!
◑하나님을 선택한 후에 ‘도도’의 삶
*신앙은 냐냐, 삶은 도도 (신앙과 삶을 구분해서 이해하세요!)
▶바울의 ‘도도의 삶’
바울은 풍요에도 처하고, 빈곤에도 처한다고 하면서, ‘도도의 삶’을 말한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도)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2
그러나 일반 신자들의 마음은, ‘풍요도 좋고, 빈곤도 좋다’는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도 좋고, 풍요도 좋지만,
풍요도 좋고, 빈곤도 좋다... 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 있어서는 ‘냐냐 신앙’이어야 한다.
엘리야처럼 ‘하나님이냐, 바알이냐?’를 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만 선택한 가운데서는 (냐냐의 신앙을 전제로)
사도바울처럼 ‘풍요도 좋고, 빈곤도 좋다.’ 즉 ‘도도의 삶’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좋고, 바알(풍요)도 좋고’
‘풍요냐, 빈곤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해를 돕는 예화
어떤 자매가 평소에 청국장을 너무 싫어하는데,
끓이는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서, 창문을 다 열어놓아야 하는데...
그 자매가 한 재일교포와 결혼했는데,
그 신랑이 어려서부터 청국장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자매는 남편을 아주 사랑했다. 잘 생겼단다.
그런데 문제는 청국장이다.
자매는 청국장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지만,
남편을 위해서 날마다 청국장을 끓여준다고 한다.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는 청국장 냄새가 싫어서 코를 쥐면서도
남편이 청국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눈으로는 웃음 짓는다고 한다.
자매는 부대찌개를 좋아하는데,
일본 사람은, 매운 것을 안 먹기 때문에, 부대찌개를 안 먹는다.
그래서 자매는, 자기가 좋아하는 부대찌개 안 끓이고, 재일교포인 남편에게 청국장 끓여준다.
한 남자를 선택하고 사랑하니까
빌4:13절처럼,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가 된다.
사랑하면.. 구토가 나는 청국장 냄새를 이겨낼 수 있고,
사랑하면.. 자기가 싫어하는 청국장을 남편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귀엽게 보인다고 한다.
보통 신자들은 이런 고백을 하기.. 사실 힘들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2
‘하나님도 좋고, 풍부도 좋고..’ 라고 하지
‘풍부도 좋고, 가난도 좋고..’ 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바울은 빌4:12~13절의 고백을 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치 새댁이 신랑이 좋으니까 자기가 싫어하는 청국장을 끓이듯이
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다른 그 어떤 것도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비천과 가난도..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캐나다나 미국으로 아이들을 둘, 셋씩 데리고 온 어머니들이 계신데
옆에서 지켜보면, 측은하다.
아이들 선생님이 학교에서 부르면,
학교에 가서 선생님과 상담할 때, 한 마디도 못 알아 듣고
뭔지도 모르고 계속 고개만 끄덕이며 ‘예스, 예스’만 하다가 나온다. (굴욕적이다.)
그리고 밤이면 서울에 있는 남편을 생각하면서 엉엉 운다.
그래도 그 삶을 이겨나간다.
여자가 아니라, 어머니의 힘으로 이겨나간다.
자식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의 힘으로, 그 모진 삶을 다 이겨나간다.
사랑의 힘이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래서 여러분, 능력 달라고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시는가?
아니다. 그래서 능력을 받는 게 아니다.
내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 거기서 능력이 나온다.
풍부에도 처하고, 비천에도 처할 줄 아는 능력,
풍부나 비천이 그게 그거인 능력,
부자 되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 능력!
자기가 키우는 강아지 한 마리를 사랑해도 ‘능력을 받는다.’
나는 강아지에게 2백만원 들여서 머리해주고 수술해주는 사람들 보면 이해가 안 간다.
그런데 강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한다.
강아지 한 마리라도.. 사랑하면.. 2백만 원도 기꺼이 쓰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도 사랑하고.. 물질도 사랑하고’ 한다.
‘나를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다는 결심이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을 사랑한 바울은
‘풍부에도, 비천에도’.. 그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4:12~13
▶사랑하면 자족한다.
사랑하지 않는가? 그러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불평이다.
사랑하시는가? 그러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자족함이다.
사도 바울이 궁핍한 환경에 도달하기도 전에,
반대로 풍요한 환경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사도바울은 만족/자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풍요에도 불구하고, 풍요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빈곤에도 불구하고, 자기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다.
풍요의 환경에 닫기 전에, 빈곤의 환경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자기 마음이 자족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자식 사랑을 한 번 생각해보자.
왜 자식을 사랑하는데, (만약에) 만족이 없는가?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증거는, 자식 그 자체로 만족하고 감사한다.
왜 자식을 보고 불만이 있고, 자식과 관계에서 불평이 나오게 되는가?
그것은 자식을, 엄밀히 말하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자식을, 내 체면과 내 얼굴 때문에, 어쩌면 끊임없이 부담을 주고 있다.
그러나 정말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명문대를 들어가면 좋지만, 전문대에 들어가더라도 실망하지 않는다.
자기만족은, (자식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오기 때문이며,
자식이 전문대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또 하나님의 섭리를 여쭈어 본다.
그리고 기다린다. 절대 자식 때문에 낙심하거나, 탄식하지 않는다.
돈이 있거나, 돈이 없거나 이미 만족한다. (심적으로) 늘 풍요하다.
풍요가 자기를 잠식해 들어가지 못한다. 돈이 있어도 돈에 잠식당하지 않는다.
이미 자기 마음에 만족이 있으니까!
빈곤도 마찬가지다. 빈곤이 와도 빈곤에 잠식당하지 않는다.
이미 주님으로 만족해 있으니까!
이게 배부름과 배고픔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뜻이다. 빌4:12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주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란다.
사랑의 특성 중에 가장 큰 특성이.. 자족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자족하지 못한다면.. 전부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돈이 없어서 불평하고.. 자식이 안 풀려서 불만이고,
몸이 아파서 실족한다면.. 전부 거짓말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아직 정말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믿고 싶은데, 아직 안 믿어지는 사람이다.
- 이게 정확한 표현이다.
하나님을 정말 믿는 사람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 웃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직 하나님을 실제로 믿고 있는 게 아니다. 관념적으로 믿는 것일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남편을 봐도 불만,
자녀를 봐도 불평,
집을 (평수를) 둘러봐도 불만..
이건 다 ‘하나님도 바알도’의 ‘도도 신앙’이다.
(믿을 만한 통계는 아니지만, ‘도도 신앙’이 약 60~70%되지 않을까?)
▶러시아 국가 문장emblem은 쌍두 독수리다. *쌍두 : 머리가 2개
한 쪽 발로는 지구를 들고 있고, 다른 한쪽 발에는 왕의 홀(지휘봉)을 들고 있다.
지구는 '선교'를 뜻하며, 왕의 홀은 '정치적 지배'를 뜻한다.
그리고 머리가 두 개다. (아래 그림 있음)
이쪽을 보면, 저쪽이 아깝고,
저쪽만 보기에는, 이쪽이 아깝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복음 선교'와 '정치적 지배'는 어쩌면 물과 기름이다.
그런데 쌍 두 독수리가, 양쪽을 다 쥐려고 한다. 이게 사람(교회)의 딜레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반드시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쪽을 버려야 한다.
쌍두머리를 갖고서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인의 흐름이
쌍두머리를 갖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나님도 믿고, 돈과 형통도 믿고,
하나님도 믿고, 자식도 우상처럼 섬기고.., (‘도도 신앙’이다.)
돈과 자식을 다 버려라는 뜻이 아님은 잘 아실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면,
자식이 잘 되든지, 못 되든지
돈이 잘 벌리든지, 안 벌리든지
모든 일에 자족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자식이 안 풀리고, 돈이 안 벌려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찾는다.
내 만족은 돈에서, 자식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사업이 잘 되어서 내가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족이 된 상태에서, 아침에 사업하러 출근하는 것이다.
▶마치는 말
오늘 크리스천들이
많이들 머리가 두 개 달린 쌍두머리 독수리 같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본래는 ‘풍부에도 처하고, 비천에도 처할 수 있다’는 뜻인데, (문맥상 그렇다.)
말씀의 진의를 왜곡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돈 많이 벌자!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식 좋은 대학 보내자!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의 변질, 다른 복음’이다.
사도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이건 상관없고
풍부냐 비천이냐.. 이것도 상관없고
배불러도 배고파도.. 삶은 ‘도도의 삶’으로 살았던 것이다. ‘냐냐의 신앙, 도도의 삶’
문제는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
찬송가에도 나오지 않는가?
궁궐이나 초막이나.. ‘궁궐도 좋고, 초막도 좋다’는 도도의 삶이다.
상황이 좋아도 감사하고/나빠도 감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삶의 다른 모든 정황은, 내 인생에, 큰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냥 자족하고 산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독수리의 한 쪽 발에는 홀이 쥐어져 있고, 다른 쪽 발에는 황금구가 쥐어져 있다.
홀은 세속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고,
황금구는 전 세계를 그리스도교화 하겠다는 상징으로
지구 위에 십자가가 놓여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 물질과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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