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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8

하나님과 숨바꼭질 2701

LNCK 2010. 10. 20. 20:32

◈하나님과 숨바꼭질                    행16:12~32                        08.03.02.설교녹취/편집

 


‘꽁꽁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아이들이 숨으면, 술래가 찾아낸다.


이처럼, 우리 크리스천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잘 ‘숨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러 오신다는 것인데,

또한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우리를 먼저 숨겼다가, 숨바꼭질처럼 다시 찾아주기도 하시는데..

무슨 말인고 하면...



▲먼저 서론으로/ 요즘 기독교가 혼란을 겪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통하여 또는 행사를 통하여

신앙을 추구하는 원래 목적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얻는 것이다.


이나 형통은,

기독교가 크리스천들에게 주는 핵심적 선물이 아니고,

핵심적 선물은 하나님을 찾게 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인데,

그것을 이루고 나면, 마치 ‘떡고물’처럼,

복과 형통을 어떤 부산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이 본질은 아니다.


기독교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서 얻게 되는

참 행복, 참 기쁨, 참 만족,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 등이다.

물론 영생도 포함한다. 이 땅에서 시작되어, 영원까지 계속되는 영생.


요즘 기독교가 혼란을 겪는 이유는,

원래 기독교 신앙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론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한 자기계발,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것도 아닌데,


성경말씀의 실생활에서 적용이 너무 강조된 나머지, 도가 지나쳐서,

지난 반세기동안 기독교는, 2천년 역사에 유래 없이

실용적인 방법론, 성공주의, 자기계발을 강조해서 가르치는 경향이 있어왔다.

(이 모든 흐름의 시조를, 노만 빈센트 필 박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 전에는 이런 흐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하나님 그 자신 이외의 것을 찾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한정식집에 와서 자장면 찾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기독교가 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인데,

하나님을 찾게 하고,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찾는 척하면서, 다른 것을 내 놓으라고, 주님께 으름장을 놓고 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바라는 것이 불고기가 아니고, 자장면이라면,

굳이 한정식집(비유로 교회)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중국집(비유로 점집)에 있다.


바로 이 ‘기독교 신앙의 추구 목적’이 혼란을 겪는 가운데,

오늘날 우리 개신교가 대체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사촌 격에 해당하는 가톨릭에서는,

   그런 문제로 인한 혼란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헌금이 형편없이 안 들어온다나..?

   복 받는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니, 신자들이 헌금도 많이 내지 않는다.)


하나님 갖고 싶은 이유/교제하고픈 이유 말고는,

교회에 올 필요가 없고, 교회에서 다른 뭘 가르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일부 목회자들이,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경우가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실족하게 될 것이다.


교육적 차원에서, 선택과목으로, 그런 지식도 교양으로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메시지의 필수과목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필수과목은 반드시 ‘복음’이 전파되어져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한 분을 찾게 해 주고,

하나님 한 분을 만나서 교제하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을 필수과목으로 끌어드리는 것은

더 심하게 말하면 ‘바알 산당’을 세우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하나님은 나를 숨기시고, 또한 나를 찾아내신다.


숨기시고, 또한 찾아내신다는 것은.. 역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권적으로 숨기기도 하시고,

또한 나를 강권적으로 찾아서 만나 주기도 하시는데...


본문에 사도바울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다.

풀어줄 때, 바울은, 내가 로마 시민인데, 나를 죄도 묻지 않고,

자기를 막 때렸다고 항의한다. 행16:37


우리가 이 본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의문은,

그렇다면 자기가 로마 시민권자라는 사실을,  

왜 매 맞기 전에, 사전에 밝히지 않았을까?


사태가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서, 그런 것을 밝히고, 또한 확인할 경황이 없었든지,

아니면 감옥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말을 애당초 믿지 않았든지.. 둘 중 하나다.


어쨌든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바울이 높아지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매를 맞게 하시고, 감옥 지하 깊은 곳에 던져지도록 허락하신 후에,

다시금 바울을 뜨겁게 만나주신다. (숨기시고, 찾아주신다.)


그래서 옥터가 흔들리고, 차꼬가 다 풀어지고,

빌립보 감옥에 일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


▲높이 올라갔다가, 아래로 깊이 떨어진다.

사태의 발단은 이랬다.

바울이 빌립보 성에서 길을 가는데, 귀신들린 여자아이가 바울을 향해

‘저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마구 떠들었다.


    행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익을 주는 자라


     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다'

맞는 말인데, 바울이 뭐가 그리 심기가 불편했을까?

세간에 인정받는 점쟁이가, 자기를 인정해주면, 좋은 것 아닌가?


저는 가끔 본문의 이 대목에서, 엉뚱한 생각을 품었던 적이 있었는데,

정말 서울에서 인정받는 보살이나, 점쟁이가,

기업인들이 줄을 서서 찾아가는 그런 용한 점쟁이가,


그가 나를 두고서 ‘내가 꿈꿨더니, O목사가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더라’

만약 이런 말을 해 주면, 서울시내 신자들이 막 내게로 몰려올 것이 아닌가?

이런 우스개 생각을 한 번 품어본 적도 있었다.


지금 이 여자가, 비록 귀신은 들렸지만, 올바른 소리를 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 맞다.

그런데 바울은, 왜 그런 자기에 대한 칭송을 허락하지 않는가?

그게 뭐가 그리 괴로운 일이라서, 그 여자에게 들린 귀신을 내쫓아 버렸는가?

 

그 일로 인해서, 돈 벌이가 끊어져버린 점집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해서, 감옥에 갇히고, 매도 맞게 된 것이다.


▲시선과 주목은 오직 하나님만 받으셔야!

그 귀신들린 여자가, 바울에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때,

빌립보 사람들의 시선이 높으신 하나님께 쏠리는 것이 아니라,

바울 자기에게로 쏠리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불편해 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쏠리면,

반드시 하나님이 숨어버리신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고쳐준다.

그때 사람들이 너무 놀라서, 두 사도를 향해 칭송하려고 할 때,

이 때 두 사도가 깜짝 놀라서 말한다.

‘왜 우리의 경건과 능력이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으로 여겨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3:12


사람을(우리를) 주목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될 때,

그 이목을 내가 받아들이고, 인정해버리면,

문제는.. 하나님이 나에게서 숨어버리신다.

 

내가 사람들에게 드러나버리면,

(숨바꼭질의 예를 들면) 술래이신 하나님이, 더 이상 나를 찾아주지 않으신다.

 

사람들의 시선과 주목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집중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칭송받은 바울과 실라를, 더 깊이 숨겨버리셨다.

바울과 실라가 자기들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들의 자세를 낮추고, 숨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을 쫓아내어, 더 이상 자기를 칭송하지 못하게 했음)


하나님의 섭리는

바울과 실라를 더욱 깊이 숨겨버리신다.

그래서 빌립보의 지하 감옥 속에 가두어버리시고, 매도 맞게 하신다.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제대로 확인 절차도 없이, 사정없이 몰아부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숨겨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반드시 숨은 그들을 찾아내신다.

지진으로 하나님이 감옥에 임재 하셨고,

빌립보 감옥은, 빌립보 교회가 태동하는 모태가 되는 놀라운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앞서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두 사도를 신으로, 신격화했다.

바나바는 ‘제우스’로,

바울은 그 대변인인 ‘헤르메스’로 신격화 해 버렸다.

거기서 앉은뱅이 된 자가,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행14:8


물론 두 사도는, 자기 옷을 찢으면서 자신들의 신격화를 강력히 부인했다. 행14:12


아이러니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바로 그 사건 직후에, 바울이 돌에 맞아서 거의 죽는 일이 벌어진다. 루스드라에서. 14:19


세상에, 사도바울은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 한 것이다.

불과 얼마 전에 신으로 추앙받던 자기가

불과 얼마 후에 안디옥,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에 의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죽은 줄 알고 내버렸는데,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14:19


    나는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본다.

    물론 바울이 자기 옷을 찢으며, 자기를 부인했지만, 14:14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으로

    바울을 더욱 낮춰 버리셨다. 완전히 죽음을 경험하도록...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신神처럼 높아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자기가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그가 신神처럼 높아지는 일이 발생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급전직하 끌어내리신다.

그래야 그의 사역자로서의 사명을 계속 오래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가 높아지고, 칭송 받고, 시선과 주목을 받는 일은,

    철저히 내 스스로 피해야 하고,

    하나님도 강권적으로, 나를 낮추어 버리신다.

 

    그래서 철저히 낮추어지고, 감추어진 사람을

    마치 술래가 숨바꼭질하듯이, 찾아내신다는 것이다. 그제야 높이신다는 것이다.



◑적용


그런데 종종 보면,

오늘날 사역자들이, 세상 이목이 자기에게 집중되는 것을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그것을 더 장려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그런 효과가 있는지 모르나)


제/설교자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바에 의하면,

사람이 주목받고, 사람에게 이목이 집중되어지면..

하나님이 숨어버리신다. 하나님이 그를 찾아주지 않으신다.

숨바꼭질의 예를 들면, 이미 찾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가 원치 않았더라도,

사역자가 마치 신神처럼 높아지면,

하나님이 직권(주권)을 발동하셔서

그를 급전직하 낮추어 버리신다.

(그런 예를, 행14장 루스드라에서, 행16장 빌립보에서 살펴보았다.)


그렇게 사역자가 철저히 낮아지도록 ‘죽이신’ 다음에

(사도바울은 완전히 파르르 떨 정도로 군기가 바짝 들었을 것이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그 다음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내 주신다.

그리고 그에게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주신다.


마치 숨바꼭질에서, 아이들이 먼저 숨겨지고 난 다음에 찾아지는 것처럼,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숨기시고/낮추시고,

그 다음에 우리를 찾으신다/높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주목받을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곧바로 십자가 뒤로 숨어버려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놓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숨어야, 마치 숨바꼭질처럼,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 주신다.


    그리고 내가 필요 이상의 주목과 높임을 받았다고 생각될 경우,

    (하나님이 나를 계속 들어서 쓰실 목적이라면)

    나를 완전히 낮추어 버리신다.

    롤러코스트를 타듯이, 급전직하 나를 추락시켜 버리신다.

    그렇게 군기를 완전히 잡으신 후에, 다시 나를 찾으시고, 나를 들어 사용하신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이 매를 죽도록 얻어맞고, 감옥에 갇히고,

거기서 찬양하고 기도드릴 때,

하나님이 찾아오시는데,

감옥에 내려오신 하나님께서 지진을 일으키시고, 옥문을 열어버리셨다.


사역이 잘 되고, 승승장구할 때 그때 이렇게 말하시라.

‘어찌 이것이 내 능력과 내 경건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나를 주목하느냐?’ 행3:12

하고,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내 앞에 내세우고, 그 십자가 뒤로 숨어버리시라.


어쨌든 그렇게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지 않으면,

종종 하나님은,

나를 완전히 급전직하 추락시켜 버리신다는 것이다.

강권적 추락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철저히 스스로 추락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찾아내 주신다. 마치 술래잡기처럼,

그래서 나를 다시 위로 올려주신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나이 드신 목사님이 계신데,

이상한 것은, 미장원 같은데 가면, 여성중앙 레이디경향 같은 잡지가 있는데,

들추다보면, 목사님들 인터뷰 내용이 간혹 나온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일찍부터 방송이나 잡지 같은 미디어와의 모든 인터뷰를

일찍부터 차단하고 사시는 분이시다. 일부러.

 

아마 당신의 성향이 ‘조용히 사는 것’을 좋아하시는 취향이신가 보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목사님의 그런 성향을 좋아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반대급부로 낮아지고, 더 낮아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쓰실 사역자는, 그렇게 완전히 낮추어서 쓰신다.


    위에서 행14장, 16장에서 살펴보았거니와,

    크리스천이 필요 이상으로 주목을 받거나, 시선과 이목이 집중되면,

    행14장에서는 바울을 돌에 맞아서 죽게 하셨고,

    행16장에서는 바울을 빌립보 감옥에서 맞아 신음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 이후에 사도바울을 다시 들어서 쓰셨지만,

    완전히 납작코를 만들어 놓으신 다음에, 비로소 다시 들어 쓰셨다.


    그래도 행14장에서는 바울이 자기 옷을 찢으면서 부인했고,

    행16장에서는 바울이 그 귀신들린 여자를 제어했기에 다행이었지,

    만약 ‘자기 칭송’을 은근히 즐겼다가는, 행12장의 헤롯왕 꼴이 났을 것이다. 12:23


▲패스하기

하나님이 내게 자식을 주시면, 한나가 사무엘을 바쳐버리듯이 패스해야 한다.

한나는 그것을 자기 영광으로 삼지 않았다.


박지성 선수가 축구할 때 보니까,

공이 주어지면, 공을 오래 갖고 있지 않는다. 2초 안에 패스해 버린다.


그리고 골을 넣을 때도 보면, 절반 이상은 방향전환으로 넣는다.

흘러가는 공을, 발을 턱 대서 공의 방향만 살짝 전환시킨다.

절대로 자기가 오래도록 공으로 갖고 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게 영광이 주어지면, 얼른 하나님께 패스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골게터(골잡이)이기 때문이다.


박지성 선수에게 공이 가면,

‘야 내게 공을 주다니 땡큐!’ 하면서 공을 끼고 있으면,

금방 공을 상대선수에게 빼앗기고 만다.


주님은 나에게 사업의 성공을 주신다.

그러면 빨리 그 영광과 존경을 패스해야 한다. 하나님께 패스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저를 잘 감시해 주셔야 한다.

제가 목회자의 영광을 다 누리고 즐기는가?

아니면 십자가 뒤로 잘 숨는가?, 주님께 빨리 패스하는가?


그리고 나는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 뒤로 숨어버려야 한다.

내가 숨어버리면,

하나님이 나를 찾아내신다.

그런 복된 경험들이 다 있으시길 바란다.                       ▣ 삶의 통찰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