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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8

악인을 대적하지 말라 2731

LNCK 2010. 11. 8. 03:56

 

◈악인을 대적하지 말라             마5:38-42               08.06.01.설교스크랩, 출처



◑서론/ 38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으나   주1)



39절,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으로 나왔던 ‘위트니스’(증인) 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무대는 아미쉬 교도들이 사는 곳입니다.

아미쉬 교도는 실제 미국에 집단으로 거주하는데

이들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며 사는 매우 경건한 무리들입니다.

기계문명을 거부하고 농경생활을 합니다.


아미쉬 교도들이 산상수훈 말씀대로 산다는 소문을 듣고

악인중 하나가 그들의 뺨을 치며 다른 뺨을 돌려대는지 시험하는 장면입니다.

아미쉬 교도들은 실제 침묵으로 반응하던지

아니면 다른편 뺨도 돌려대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머지 뺨도 돌려대겠습니까?

누가 나를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욱’하고 성질이 올라오는 우리들인데

이 말씀을 지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인터넷에 우리를 비방하는 글이나 댓글이 하나 올라와도 우리는 참질 못합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성자의 경지를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 자신의 말씀대로 오른 뺨을 맞으면 왼편 뺨도 내어주셨을까요?

 

우리가 왜 오른편 뺨을 맞았을 때, 왼편을 돌려대야 합니까?


▶1. 그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빰을 때렸는데

하나님께서 그 나머지 뺨마저 돌려대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0:6절은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데, 여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50:6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예언한 말씀이기도 하면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행한 행위들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모욕적인 행위를 하였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무례를 참고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이 덕분에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모욕적인 행위에 대해서 참는 것은

은혜를 받은 자의 당연한 반응이라 할 것입니다.


▶2. 이는 또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단순히 폭력에 굴복하는 무저항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모욕을 감수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존심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5:42~45 


복음은 이처럼 나를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은 제자의 길을 걷게 합니다.


자기에게 준 모욕을 모욕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마음에서 분노를 빼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당한 모욕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2)



40절,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두 번째 예로서는 우리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합니다.

속옷보다는 겉옷이 더 비쌀 것입니다. 그러나 겉옷은 송사할 수가 없습니다.

겉옷은 가난한 자의 이불과 같은 역할을 하기에 유대 법에 의하면

해지기 전에는 돌려주어야 합니다.


겉옷은 내가 누릴 합법적인 권리입니다.

그러나 속옷을 취하려는 자에게

주님은

내 합당한 권리인 그 겉옷까지도 주라고 합니다.

주님의 제자에게는 합당한 소유나 권리마저도 없습니다.


우리가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또한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당하고 의롭고 마땅한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죄에 대해서 심판할 권리가 있지만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소유도 없습니다. 그것을 달라고 해도 다 줍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히10:32-34)


초대교회 교인들은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했습니다.

빼앗으려는 자들에게 더 주었습니다. 왜냐고요?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았기에 자기 소유에 대한 미련이 없었습니다.


그 소유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 소유가 방해가 될 때는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또 그 소유를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우리가 미련해서 입니까? 우리가 바보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더 낫고 영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랑이 세상의 집착에서 벗어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41절,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세 번째 예는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는 자의 경우입니다.

당시 로마의 통치하에 있던 이스라엘에는 강제 징용법이 있습니다.

로마 군대는 필요하면 어떤 사람이든 붙잡아서 물자를 운반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들 수 있습니다.


의무는 오리까지만 가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리까지라도 동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제자에게는 의무의 끝이 없습니다.

여기까지 했으니 내 할 도리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들의 삶의 태도를 바꾸라는 주님의 요청입니다.

세상에는 두렵거나 마지못해서하는 일이 있고, 사랑해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일에는 기쁨이 없고, 우리 행동이 비주체적이 됩니다.

사랑해서 할 때는, 즐거움도 있고 능률도 오릅니다.


공부도 그렇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혼나기 때문에 한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하루라도 공부를 벗어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공부는 즐거워서 할 때 능률이 오릅니다.


에디슨은 1,300여개에 이르는 발명품을 내었고

전등 하나를 발명하기 위해 수천 번의 실패를 했습니다.

하루 18시간씩 일했기 때문에 45세 되던 때에 자기는 노동량으로 따지면

다른 사람의 90세 동안 해야 할 일을 한 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결코 인생에서 노동한 적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자신이 즐거워서 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분노의 원인 중 대부분은 자기는 할 만큼 다했는데 알아주지 않는다,

그에 대한 상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을 때 나타납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종이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왔으니까 이제 당연히 쉬어도 돼’ 이럴 수 있습니까?

그는 주인의 밥상을 차려야 하고 또 주인 곁에서 식사를 다 끝내기까지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10)


비유는 종의 비유이지만, 사실 이것은 주인의 태도입니다.

직장에 고용된 노동자는 집에서 편히 쉴 수 있지만 주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 회사고 자기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의무에 AS 기간이 따로 있습니까? 아닙니다. 평생입니다.

모든 것을 내주어야 합니다. 심지어 간과 쓸개까지 내어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이처럼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며,

세상의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져야 할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염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면 악인들이 우리 선함을 이용할 것이 아니냐?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은 주님의 정의가 아니냐? 하고요.


그러나 주님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12:19),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히10:30)고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 인간의 일이 아니라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 연약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갚으려고 우리 마음에 분노를 품고 있으면

우리 또한 제명에 살지 못합니다.

원수를 갚았다고 해서 잃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허탈할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원수는 내 손으로 갚을 터이니

너희는 단지 그를 불쌍히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20)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줄 아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단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안 됩니다. 


...................................


주1)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이 말씀은 출애굽기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3-25)


이 법은 동일한 것으로 복수한다하여 ‘동태(同態) 복수법’ 또는 ‘탈리온 법’이라고 합니다.

자 그런데 이것은 복수를 정당화하는 법일까요, 아니면 인권을 보호하는 법일까요?


이 법은 내가 한 대 맞았으니까 너도 한 대 맞아야 돼 하는 식의

복수를 정당화 하는 법이 아닙니다. 생명보호법입니다.

‘네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죽이거나 멸시하면

너도 똑같이 네 생명을 내놓거나 멸시를 당해야 돼’라고 함으로써

함부로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만든 법입니다.


또 사람들의 싸움이 그렇습니다.

한 쪽이 한 대 치면 다른 쪽은 이에 대한 반발로 두 대 치게 되어 있고,

또 이번엔 반대편에서 더한 보복을 하게 되고 함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이 생깁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법이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입니다.

하나의 악에는 다른 동일한 하나의 악으로 갚도록 한 것입니다.


이 법은 실제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법률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법칙입니다.

현대 사회는 폭력 행위에 대해서 직접 폭력으로 보복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국가가 형벌권을 가지고 인신을 구속하거나 벌금을 내게 합니다.


이 또한 합법화된 형태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법입니다.

이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범죄를 막기 위한 수단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이런 폭력과 복수의 법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워서 죄를 짓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이치일 뿐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은 불가피한 선택일 뿐이지 최선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복수의 원리가 아니라 사랑의 원리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복수는 근본적으로 악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습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로 복수하게 되고 이에 또 반발하게 되어, 결국 둘 다 망하게 됩니다.


또 아무리 정의를 외친다한들 이 복수법은 더 힘센 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강한 자는 한 대 더 때릴 것이요, 약자는 그 폭력에 굴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복수법은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분노를 정당화 하는 논리입니다.

이렇게 분노를 품고서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2)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제사장이, 주님이 가르치셨던 교훈이 무어냐고 묻습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서

"내가 드러내놓고 말했는데,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라는 식으로 대답하니까


그러자 곁에 섰던 하속이 손으로 예수님을 치며

감히 대제사장에게 불손하다고 책망합니다(요18:22).

예수님을 쳤다면 아마 얼굴이나 뺨을 쳤을 것입니다.


이렇게 맞는 순간 예수님은 다른 쪽 뺨을 내어놓으셨는가? 아닙니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요18:23) 하며 오히려 항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이 일치된 분이십니다.

산상수훈에서는,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대라 하시고는, 

대제사장에게 심문 받으실 때는,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가요?


 

주님께서 본문에서

오른 뺨을 맞거든 왼편 뺨도 돌려대라,

속옷을 취하려고 하거든 겉옷도 내주어라,

오리를 억지로 끌고 가려 하면 십리를 더 동행해라..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제자들이,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품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5:43~45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는 것은, 악에 대해서 외면하거나 굴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악에 대해서 투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습니다.


악인을 불쌍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그를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악을 무력화 시키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의 분노를 정당화하지 말고, 사랑으로 이 분노를 이기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복수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런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버렸습니다.

상대방의 악에 대해서 주님은 악으로 반발하지 않고 자신이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한 쪽이 폭력을 썼는데 다른 쪽이 이에 반응하지 않자, 폭력은 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자기를 침략하는 로마에 대해서

폭력의 논리로 대항하였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자기 희생과 십자가의 길을 갔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그 사랑의 힘으로 로마를 정복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국가에 대해서 저항한 적이 없습니다.

때리면 맞고 빼앗으면 빼앗기고, 모욕하면 모욕당하는 길을 갔습니다.


결국 주님의 길이 승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이 아니라

서로 사는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힘으로 분노를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현대사에서는 이런 사랑의 승리를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간디의 비폭력 운동은 영국의 압도적인 무력에 대해서

파업과 의무 수행 거부, 평화행진 등의 형태로 저항하여 결국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인도는 전쟁 없이 독립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폭력은 단지 또 다른 형태의 효과적인 저항만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비폭력이 별로 효과가 없다면 이것은 금방 폐기될 것입니다.

간디의 비폭력에는 생명 사랑의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간디의 사상을 ‘아힘사’라고 말합니다.

‘아힘사’는 적극적인 측면으로는 사랑의 법이라 부르고

소극적인 측면에서는 비폭력이라 부릅니다.


아힘사의 적극적인 면은,

인간이 가까운 관계를 가지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품고 있는 사랑을

적(敵)까지 포함하는 온 인류에게 확대시키는 일입니다.


소극적인 면은 자기 사리사욕 때문에

고의로 어떤 생물을 죽이거나 고통을 주는 것은 삼가는 일입니다.

비폭력은 결국 사랑의 힘으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 크리스천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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