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을 깨는 것이 회개 렘3:1~25 10.10.19.설교녹취
*주형(틀) : 뜨거운 쇳물을 부어서 어떤 제품을 만들 때, 그 쇳물을 붓는 통. cast
그 주형(틀)의 모양에 따라, 자동차 엔진도 나오고, 각종 부속품이 나온다.
여기서는 마음의 틀을 의미함
◑하나님 말씀을, 내가 아전인수 격으로 받아들인다.
*아전인수 我田引水 : 자기 밭에 물 끌어대기
▲사람의 마음에는 주형(틀)이 있다.
주형에 쇳물을 부르면, 주형(틀)의 모양에 따른 제품이 나오듯이,
사람의 마음에도 어떤 틀이 있다.
이 틀이 한 번 형성되면,
어떤 말씀을 (쇳물을 붓듯이) 갔다 부어도,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형성되어 있는 그 마음의 틀에 따라서
어떤 모양을 만들어낸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자기 틀에 따라 이해한다.
▲내 마음의 틀은, 내가 사랑하고 집착하는 모양을 따라서 만들어진다.
내가 돈을 사랑하고 집착하면.. 내 마음에 ‘탐욕의 틀’이 딱 생기면서
성경을 읽어도, 부자 되는 말씀, 물질 축복에 관한 말씀만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정욕을 사랑하고 집착하면.. 내 마음에 ‘정욕의 틀’이 딱 형성되면서,
성경을 읽어도, 정욕을 버리라는 말씀은.. 가급적 비껴서 피해가게 된다.
결국 내 마음이 사랑하는 모양에 따라서
내 마음의 틀이 형성된다.
여러분, 붕어빵 기계를 연상하셔도 된다.
붕어빵 틀에, 반죽을 부으면.. 붕어빵이 나오고,
국화빵 틀에, 반죽을 부으면.. 국화빵이 나오고,
계란빵 틀에, 반죽을 부르면.. 계란빵이 나온다.
땅콩 모양도 있다.
이처럼 내 마음의 어떤 틀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밀가루 반죽처럼) 부어주실 때,
우리는 그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이해한 뜻에 따라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틀에 따라서,
부어지는 말씀의 반죽은 똑같은데,
어떤 사람은 붕어빵으로,
어떤 사람은 국화빵, 계란빵, 풀빵으로..
각기 다르게 해석, 적용해 버린다.
내 틀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전혀 엉뚱한 모양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바로 이 내용이 본문 렘3장에 나와 있는데.. 그걸 살펴보려고 한다.
◑본문 설명 : 피상적 회개
▲본문은 하나님과 유다 백성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에 행음, 간음, 음란이란 말이 계속 나온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아내 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말고, 다른 대상에 집착하고, 다른 것을 붙잡고,
다른 것에 매여 있는 상태.,. 이것을 영적 간음이라고 말한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우상 숭배, 영적 간음을 뉘우치고 회개하지만,
우상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자기 마음의 틀’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회개했다는 것이다.
그런 회개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수박 겉핥기 식, 피상적 회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회개는, 내 잘못된 마음의 틀을 바꾸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서두에서 '주형/쇠로 만든 틀'로 설명한 것은,
그 인간의 '마음의 틀'이 무쇠처럼 단단해서, 좀처럼 깨기 어렵다는 뜻이다.)
▲렘3장 본문의 배경은,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이다.
요시야 왕에 앞서
므낫세, 아몬 왕이 있었는데,
이 두 왕은 남유다 역사에서, 바알 우상숭배가 가장 극에 달한 시기였다.
그런 가운데서 왕위를 물려받은 요시야는,
종교적으로 개혁을 단행하는데
그 일환으로 성전을 수리하다가, 성전 한 구석에서 율법서 두루마리를 발견한다.
그러면서 그의 종교개혁이 한층 더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발견된 율법서를 낭독하게 되고,
율법서를 낭독하는 가운데 회개하게 되고,
그래서 대대적인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럼, 이 개혁운동과 회개운동을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떤 상태였느냐? 살펴보면..
3:3절에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지는 재난을 주시자’,
가뭄이란 절박한 상황에서
또한 발견된 율법서 말씀으로 깨달음을 얻고서
(요시야 때) 백성들이 회개를 하는데,
그 회개의 내용이 뭐냐 하면,
3:4~5절에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그들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머 회개했었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느냐..’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관계의 회복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난 날에, 어떻게 자기들을 사랑 했었는가를 기억해 내게 된다.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회개가 잘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분명히 회개를 했다. ↑
회개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는데..
그러나
자기들 마음 밑바닥에 형성되어 있는 마음의 틀을 바꾸지 않은 채,
여전히 마음의 우상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피상적인 회개를 한 것이다.
그래서 3:5b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네가 이같이 말 회개 하여도.. 계속 악을 행하여 계속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해석 및 적용
▲본문에 회개한다고 하면서
‘아버지여, 나의 지난 날 동안 아버지의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나를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착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회개의 언어, 미사여구가 아니라,
또한 회개의 행위/열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더 밑바닥, 더 근본, 마음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분, 회개라는 것은,
내가 이제까지 했던 행동을 멈추고, 행동의 패턴을 바꾸는 차원이 아니다.
(물론 행동이 ‘회개의 열매’로 바뀌어져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본질적 회개가 아니다.
본질적 회개는 마음의 틀을 깨는 것이다. 그리고 새 틀을 짜는 것이다.
▲자식 사랑의 예
내가 자식을 우상처럼 사랑하면, 내 마음에 자식을 사랑하는 틀이 생긴다.
그 자식을 사랑하는 틀을 가진 채로
거기에 하나님 말씀이 부어지면,
내 틀에 따라, 그 말씀을 변형시켜 받아들인다.
예를 들면, <내가 자식을 일류대 보내고, 부잣집에 결혼시켜야지> 이런 틀이 있으면,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거기에 부합되는 말씀만 취하고,
그 틀에 부합되지 않는 말씀은, 아무리 진리라도, 폐기처분 해 버린다.
그래서 큐티도 위험할 수 있다. (큐티를 꼭 해야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내 틀을 깨는 회개 없이 큐티를 계속 하면
모든 성경구절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고 적용해 버린다.
심지어는 설교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래서 일부 설교자가, 본문을 ‘자기 생각/자기 가치관/자기 관념’으로 종종 설교한다.
일례를 들면 ‘남존여비, 유교 사상’의 틀을 갖고 있으면,
성경의 모든 본문을.. ‘유교 사상/가정관’의 안경으로 해석하고, 결론 내린다.
(가장 문제가 되는 성경해석은, 기복주의/자기계발/성공주의인데,
항상 이 지면에서 논의가 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 설명을 생략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 당하지 않고, 우리에게 속지 않으신다.
아무리 입으로 별의 별 노래를 다 불러도,
일이 좀 잘 될 때는 ‘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며 별 소리를 다해도
내 마음의 틀이 깨지지 않는 한,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게 아니다.
여전히 나는 10년, 20년, 30년, 40년을 ‘영적 간음, 행음, 음란’에 머무르는 것이다.
내가 입술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마음의 우상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 (마음의 틀을 바꿈 없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오히려 내 우상을 더 많이 가지게 되기를 바랄 때.. 더욱 그렇다.
자식, 재물, 건강, 배우자, 친구들, 사회적 명예, 정욕,
이런 모든 것들에, 내 마음이 가서 붙어 있고, 사랑하면서, 어떤 틀을 이루고 있다.
얼마나 깨기 어려운지 ‘견고한 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고후10:4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이 틀로 받아들여서,
자식이 잘 되고, 재물이 늘어나고,
전부 이런 용도로 말씀을 다 변형시켜 버린다. 그렇게 이해해 버린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지만,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하나님이 내 우상을 듬뿍 허락해 주시니..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한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이 실패로 끝났듯이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신다. 우리에게 절대로 속지 않으신다.
‘보라 네가 이같이 말 회개 하여도.. 계속 악을 행하여 계속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3:5b
그래서 우리의 문제는,
회개하고도, 또 같은 죄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아직 마음의 틀이 완전히 바뀌지 않고,
그 죄의 형벌이 무서워서, 임기응변으로 회개하는 것이다.
본문의 요시야 왕 때처럼..
◑새언약의 약속
예레미야서의 전체 주제는, 31:31~33절에 나오는 새언약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새언약을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의 언약’이다.
이 설교문에서는 ‘마음의 틀’이란 표현을 썼는데, 같은 것이다.
마음의 틀을 완전히 새로 바꾸는 것이, 새언약인 것이다.
예레미야서는 31:31~33절의 새언약의 선포 이전에,
서두에서 간간히 ‘새언약’ 에 관해, 영화의 예고편처럼 짬짬이 보여주고 있다.
아래 구절도 그 중 하나이다.
...................................... 쉬어 가는 곳 ..............................
▲렘3:16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않을 것이요, 생각하지 않을 것이요,
기억하지 않을 것이요, 찾지 않을 것이요, 다시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 소중하고 율법의 핵심인 언약궤를
기억도, 생각도, 언급도, 다시 만들지도 않는다고 했다.
옛언약(율법)이 지나가고, 새언약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 언약궤는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불탈 때, 실제로 없어졌다.
그 뒤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있는데,
그 돌판에 율법, 행위의 율법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고 발전된 법이.. 마음에 새긴, 마음의 법(새언약)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강조하신 것이 '마음의 법'이었다.
살인하기 이전에, 마음의 미움을 먼저 해결하라는 것이다.
▲마음의 틀이 바뀌지 않은 채로 율법을 준행하면
바리새인처럼 율법주의로 빠져버린다.
‘내가 이렇게 행위로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거야, 나는 고상한 의인이야!’
이렇게 기복주의나, 자기가 의로워지는 영적 교만한 상태에서
외적 행위로 율법을 지키게 된다. .. 이게 바로 율법주의다.
자기 마음의 틀은 그대로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면서,
겉 행위만 율법을 지키니.. 백발백중 외식자가 되는 것이다. 안 될 수 없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자녀, 배우자, 사업, 재물, 정욕이라는 ‘친정’에
그대로 내 마음이 붙어서 틀을 이루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
심한 경우, 구원을 못 받을 수도 있다.
우상 숭배자는 천국에 못 간다는 성경말씀이 수차례 나와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하나님과 붙어 있다가
자녀를 만날 때는.. 자녀에게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만나야 한다.
반대로, 자녀에게 꼭 붙어 있다가,
하나님을 만날 때,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만나면..
그게 (실례되는 말이지만)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결코 좋지 못하다.
결국 내 원하는 고집과 정욕대로 자녀를 키웠을 때,
그 결과가 좋을 리가 없다. 물론 하나님도 안 도와주시고, 축복 안 해 주신다.
내가 자녀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내 정욕을 따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진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기와 하나님과 관계가 먼저 우선적인 마음의 틀이 된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흡족한 상태에서
자녀를 만나고, 자녀를 바라보고, 자녀에게 기대를 건다.(내 정욕적 기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내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의 틀을 새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새 틀(새 언약, 마음의 변화)이 만들어진 다음에는
자녀의 상황이 쇳물로 내 틀에 부어지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모양으로, 자녀가 주조(만들어지는)되어지는 것이다.
▲내가 재물을 사랑하고 있으면,
재물을 더 많이 버는 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맨날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런 욥기의 말씀만 암송한다.
이 말씀은 욥의 친구의 틀린 말이다.
외우며 암송할 구절이 아니다.
▲그래서 여러분, 3:17절에
언약궤가 없어지고,
예루살렘이 법궤 위에 임하시던 그 자리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 대치된다.
교회 시대가 오게 된다. 그 시대에 사람들이 그리로 몰릴 것인데,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에 완악한대로 그들이 행하지 않을 것이다.’
새언약은 마음의 언약이며,
예레미야를 통해 맛보기로 ‘신약의 복음/새언약’이 영화의 예고편처럼 약간 제시된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겉 행위가 아니라!
그 결과 ‘마음에 완악한 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롬12:2
▲마치는 말
이 예레미야서의 두드러진 핵심은 ‘새언약’이다. 31:31~33
그것은 ‘마음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는 ‘행동의 회개’ 차원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겉 행동의 변화는,
속 마음의 틀이 먼저 바꿔져야, 진정한 행동의 변화가 나온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어떤 범죄를 저질렀으면,
그 범죄를 두려워하고,
그 범죄를 계기로 다시는 이런 범죄를 저지르면 안 된다는 차원을 넘어서
더 깊이 들어가서
내 마음에 잘못된 틀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 마음에 잘못된 틀, 즉 하나님 말고, 세상 것에 집착하는 틀
완악함, 욕심, 음란, 탐심.. 이런 어떤 틀이 있어서,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되어 나온 것이다.
행동은 빙산의 일각이고,
그 수면 아래에 마음의 죄성, 완악한 틀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는데,
그 수면 아래, 마음의 틀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고, 새언약이 것이다.
그것을 깨는 것이 회개이지,
새 틀을 짜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지,
그저 한 번 잘못된 행위를,
내가 입으로 고백하고, 자백한다고.. 그게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새언약에 의해
사람이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으면,
'마음의 틀'을 깨는 것이, 무쇠를 깨는 것처럼 힘들고 어렵지만,
새 틀을 짜고, 마음 바탕을 바꾸는 일이 ..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게 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용서하여 주소서. 마음 깊은 곳에 가려져 있는 내 마음의 틀은
전혀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조금도 문제 삼지도 않고,
그저 그 마음의 틀을 따라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채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척 하면서 살았던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제 마음의 틀을 보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그 마음의 틀이 온전히 깨어지고,
하나님만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마음의 틀을 (새로) 만들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소서..
그 마음의 틀을 따라, 이후에 만나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
앞으로 삶이 진정한 십자가 복음의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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