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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 믿음, 현실적 믿음 2754

LNCK 2010. 11. 21. 11:42

 

◈사실적 믿음, 현실적 믿음                  렘5:1~31         10.10.21.설교녹취



◑사실적인 믿음 현실적인 믿음


▲천국이 있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사실인가, 현실인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나에게 사실인가, 현실인가?

믿지 않는 사람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사실조차도 아니다.

그러니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이 존재한다는 사실

많은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망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지금 그런 사람들 얘기는 하지 말고..,


문제는 교회 안에 있는 신자인 우리들에게 한 번 물어보자.

천국이 실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아닐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실현실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주에 태양이 떠 있다. - 사실이다.

인도에 갠지스 강이 있다. - 사실이다.

그리고 천국이 있다. - 사실이다.


천국이 있다는 것은,

우주에 태양이 떠 있고, 인도에 갠지스 강이 있는 것과 별반 다름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다. 천국이 있다는 것은 사실을 뛰어넘어, 현실로 믿어야 한다.

계속 읽어보세요.)


우주에 태양이 떠 있다는 사실, 인도에 갠지스 강이 있다는 사실,

그런 나랑 동떨어진 얘기를 할 때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얘기하지만,

 

우리가 ‘내 가정의 사실’ 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내 가정의 현실이다.’

‘내 직장의 사실’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 직장의 현실..’ 이라고 말한다.


내 가정의 형편이 결코 사실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다 현실이다.

내 자녀가 처한 대학입시의 사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내 자녀가 처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내 마음을 주느냐/안 주느냐?’에 따라서 사실과 현실이 나누어진다.

어떠한 사실이라도, 내가 그것에 내 마음과 관심을 주고 있으면..

그것은 사실에서 → 현실로 바뀐다.


인도에 갠지스 강이 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가 갠지스 강과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내 아들이 인도로 출장을 가서,

갠지스 강 근처에 살게 되었다.

그러면 갠지스 강은, 그날부터 사실에서 → 현실로 탈바꿈하게 된다.


왜냐하면 내 아들이 거기에 가 있기 때문에, 갠지스 강은 더 이상 사실차원이 아니다.

이전에는 갠지스 강이 뉴스에 나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인도 소식, 갠지스 강이 TV나 신문에 나오면.. 내가 유심히 보게 된다.

그것에 내 마음과 관심을 두게 된다.

 

그러면서 갠지스 강이 있다는 사실이→ 갠지스 강이 내게 실감나는 현실로 바뀌게 된다.  


▲여러분, 천국이 여러분께 사실인가, 현실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내게 사실인가, 현실인가?

현실감이 곧 믿음이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또한 천국의 실재를

사실 정도로만 믿고 신앙생활 하고 있는 신자들이 많다.


그래서 천국과 하나님에 대해

자기 마음, 자기 관심, 자기 정성이 전혀 없는 명목상의, 이름뿐인, 신자들이 꽤 많다.


▲믿음이란.. 내 마음을 드리는 것, (사실을 믿는 수준이 아니다.)

사도신경은 신앙을 총정리한 것인데, 라틴어로 ‘크레도 credo’ 라고 부른다.

                                         *영어로 creed, 동사로는 ‘내가 믿는다’는 뜻

크레도의 어원을 추적하면, ‘내가 나의 심장을 드린다’는 뜻이다.

내 마음을 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앙고백, 믿음이란, 마음을 주는 것이다.

하늘에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 전혀 드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 자녀와 사업이, 믿음의 대상(우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 내 마음이 드려지기 때문이다.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100% 다 드리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내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닐 수도 있다.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다 드리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자기 마음을 자녀에게/사업에/정욕에 다 주고 있을 때 그렇다.


    그러니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사실에 불과하게 되고,

    눈에 보이는 자녀/사업/정욕은.. 내 마음을 다 주는 현실이 될 때,


    그런 믿음으로 과연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 믿음으로 과연 오늘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사실적 믿음은.. 오늘 내가 천국을 누릴 수 없고,

    현실적 믿음이라야.. 오늘 삶에서 내가 천국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내가 과연 천국의 삶을 살고 있는지/아닌지를 살펴보면’

    내 믿음이 사실인지, 현실인지 판가름 난다.

    현실적 믿음이라야.. 천국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현실적 믿음은, 내 마음과 정성을 온전히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관념 수준이 아니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예레미야서 5장의 내용을 살펴 보면...



◑본문 설명


▲5:1절, 의인 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 선민, 특별히 남유다의 죄악상에 대해 말하는데,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1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이방 소돔과 고모라가 아니다. 선민의 도시 예루살렘이다.

그 안에는 성전이 있고, 선민들이 살고 있었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도시가 아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롭게 살고 있는 단 한 사람을 찾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10명이 아니다.)


▲2절,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데도.. 참 성도는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각하고,

아예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예루살렘에서 없어져 버렸는가? ... 아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2

 

예루살렘 거민들은, 일상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두고서 맹세’까지 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 믿음은 사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그 이름을 걸고 맹세까지 할 정도로’

그 믿음이 정말 현실이 되었더라면,

예루살렘 거리에는 의인들이 넘쳐났을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 거민들이, 하나님을 안 믿은 것이 아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안 드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그저 사실에 머물고 있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자기들의 마음과 관심을 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4~5절, 제사장과 선지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리는..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4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율법)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5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무리는 물론이요, 제사장, 선지자에게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제사장은 좀 더 나을 것 같은데, 성전에서 매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니까,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었고,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백성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제사장과 선지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그 신앙이 사실이 아니라, 현실로 살도록,

백성들을 인도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직분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제사장과 선지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현실이 아니라, 사실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바닷가에서 천막을 치고 있었는데,

해안경찰이 와서, 조금 후에 쓰나미가 몰려오니까, 천막을 걷고 피하라 그러면,

그것은 현실이니까, 그 말을 듣고 피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다 그대로 행한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망한다..’

그게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말씀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제사장, 선지자, 백성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랬다는 것이다.

모두 다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불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선민 안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다. 


▲6절, 그래서 하나님이 징계를 하셔도,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줄 모른다.

 

그게 하나님이 주신 것인줄 모른다.

하나님이 현실이 아니라, 그저 사실이요, 관념이기 때문이다.

운이 나빠서, 자기에게 불행이 닥친 줄 안다.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을 엿본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반역이 심함이니이다.  :6


그래서 예레미야서가 끊임없이 이런 ‘허울뿐인 신앙, 껍데기뿐인 믿음’의 죄악에 대해 

지긋지긋할 정도로 심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죄악의 모습을 알 때라야,

주님의 십자가가 진정으로 복음이 된다. 날마다 예레미야서를 읽어가면서,

우리가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내 죄악, 미처 깨닫지 못했던 모습을 깨닫는 것이다.



◑적용


여러분, 어떻게 하면 천국을 사실이 아닌, 현실로 살 수 있을까?

천국을 현실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풍랑 만난 배에 타신 예수님을 보면,

사실적 믿음과 현실적 믿음이 여기서 나타난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나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현실은 풍랑이었다.

그래서 벌벌 떨며 난리를 쳤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풍랑만난 그 형편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으셨다.

예수님께 현실은 아버지의 손이었다. 아버지의 손 안에 붙잡혀 있는 천국이 현실이었다. 천국이

그러므로 풍랑 만난 배위에서, 주님은 편히 주무시고 계셨다. 왜? 천국이 현실이니까!


▲그럼 예수님은 너무 완전하시니까, 예수님 말고, 사람의 예를 좀 들어보자.

베드로는, 행12장에서, 내일이면 끌려나가서 참수형을 당할 예정이었는데,

그 전날 밤에, 감옥에서 깊이 잠든 것은.. 천국이 그에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금 자기가 당하는 모든 힘든 일은, 그에게 사실에 불과했다.

그 일에, 크게 마음을 두고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빌립보 감옥에 갇혔어도 찬양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천국을 현실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처럼,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천국을 현실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여서, 전전긍긍하고 있는가?


▲정리하면

기독교 신앙은.. 이 땅에서 복 받아 부자 되자고 믿는 게 아니다.

이 땅의 현실이 → 사실로 바뀌고,

천국이 있다는 사실이 → 현실로 바뀌기 위해서..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려야.. 사실에서 현실로 된다.

이 세상과 천지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이 → 현실로 바뀌어야 한다.


내 통장에 돈이 들어와야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승진 임명장을 받아야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현실이 되면 되고,

천국이 현실이 되면 된다. (사실이 아니라)


▲이해를 돕는 예화

전철에서 여고생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고 있다.

옆에 할아버지, 아주머니가 앉아 계신다.

전화를 하면서 웃었다가 화냈다가 깔깔대다가 난리를 친다.


옆에 할아버지 앉아 계시고, 아주머니가 앉아 계신다.

앞에 대학생 서 있고.. 이게 다 사실이다.


지하철이라는 이 현장에서 전화를 할 때, 이 여고생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

마치 전화의 무선신호가 공중으로 빨려 올라가듯이,

이 여고생의 마음은,

지하철 현장을 떠나,

지금 자기와 대화를 나누는 같은 반 친구의 곁으로 날아가 있다.


자기 친구가 지금 자기에게 현실이다.

 

마찬가지다. 어떻게 내 앞에 펼쳐지는 자녀의 형편을 보면서도

내 마음이 떠나서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의 현실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떠나야 된다.


그 여고생의 마음이, 전화 거는 동안, 지하철 현장을 완전히 떠나버렸다.

마찬가지로 우리로 하여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형편을 떠나게 해 주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통해서 내 눈 앞에 보이는 자녀에게,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자녀가 있는 그 형편이,

옆에 아저씨가 앉아 있고, 아주머니가 앉아 있던 그 지하철 현장을 떠나는 것처럼,

자식이 있다는 그 현장에서 내 마음이 떠나버린다.

죽었다고 고백함과 동시에..,


그리고 어디로 내 마음을 향하는가? 하나님과 천국이다.

이 일이 매사에 반복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하나님과 천국이 내 현실이 되면서,

내 삶의 현장은 모두 사실로 바뀌어 버린다...


이것이 천국의 삶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삶, 성도의 삶의 본보기다.


▲죽기 전에 깨달으면 너무 늦다.

그렇게 기독교 신앙을 사실에 불과하게 살다가,

모든 사람이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아니면 말기암 선고를 받고서야,

기독교 신앙을 그제야 비로소 현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때가 너무 늦었다.

너무 많은 세월을 허송했던 것이다.


현장에서 있는 동안에, 누가 천국을 현실로 느끼느냐 이거다.

매일 십자가에서 죽으시라! 그러면, 어떤 성도님은 이렇게 되받는다.

‘삶의 현실 속에 뛰어 들어가서 보면,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


그들에게 삶의 정황이 현실인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저 이론이요, 사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러분, 믿음은 크레도이다.

내 마음을 주는 대상이 곧 믿음의 대상이고, 마음을 주는 행위가 믿음이다.

마음을 주게 되면 현실이 된다. 자 천국이 있다는 게 사실이다.

사실 단계에 머물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 천국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3년 뒤에 입주하게 될 아파트를 새로 청약해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낡고 후줄근해도,

불편한 모든 것을 다 참고, 기쁨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천국이 현실이다. 그러면 천국이 현실인 사람에게 있어서,

이 땅에서 그 사람을 괴롭게 하고, 슬프게 하고, 불행하게 할 수 있는

이 땅의 사건이 무엇이겠는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이면 망하고, 현실이면 구원받는다.

사실이면 지옥을 살고, 현실이면 천국을 산다.                                     ▣ 믿음론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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