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0

탐욕은 파멸을 부른다 2755

LNCK 2010. 11. 22. 14:02

◈탐욕은 파멸을 부른다.                  신8:1~4, 렘6:13~15                 10.10.22.설교녹취

 

나의 만족은 ‘물질의 소유’에서 오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소유’에서 오는가?

오늘 솔직하게 한 번 생각해 보자.

 

 

◑영화 ‘마농의 샘’ 이야기

 

‘마농의 샘’은 1986년에 상영된 프랑스 영화인데,

1988년에 영국 아카데미 각색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하면서,

아주 탁월하게 인정을 받은 영화이다.

‘프랑스 영화의 자존심을 살린 영화다’ 라고까지 말하는 영화이다.

 

▲영화의 줄거리

영화의 배경은 1920년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의 한 시골마을이다.

세자르.. 그 마을유지로서 초로初老의 남자,         

위골랭.. 세자르의 조카, 군복무를 마치고 삼촌 세자르가 사는 동네로 와서

삼촌 가까이에 집을 얻고 함께 산다.

 

조카 위골랭에게 꿈이 있었는데,

자기가 카네이션을 재배해서.. 잘 살아 보겠노라는 꿈이었다.

삼촌 세자르는, 위골랭이 시범적으로 키운 카네이션을 보고서, 흡족하게 생각하면서

조카의 계획에 동의한다.

 

그런데 문제는, 세자르와 위골랭이 사는 지역에는 물이 없었다.

물이 있어야, 카네이션을 잘 키울 터인데..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데 삼촌 세자르가, 지금은 노인이지만, 젊었을 때

한 때 플로레트 여인과 연애를 했다.

그 후에, 플로레트는 갑자기 도시로 이사갔는데,

그 후에 플로레트가 죽었다는 소식이, 그 마을에 들려왔다.

 

문제는, 그 플로레트 여인에게 속한 땅에서는 샘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세자르와 위골렝이, 플로레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플로레트의 소유지의 샘물을 시멘트로 몰래 막아버린다.

그 땅을 헐값으로 매입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외지 사람이 보면, 그곳에 샘물이 나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넓은 땅의 산기슭 한 쪽에서 나오는 샘물에 대해.. 외지인이 알 리가 없었다.

 

플로레트가 도시에서 죽은 후, 그녀의 소유지는, 아들 쟝에게 상속되었다.

런데 그 쟝은 곱추였다.

그 즈음에 쟝은 도시에서 살다가, 엄마의 고향 프로방스 자기 소유지로 이사온다.

그 엄마의 소유지에서 토끼도 기르고, 호박도 재배하면서,

쟝은 자기 아내와 딸(마농)과 함께 가난한 삶을 영위해 갔다.

 

그래서 세자르와 위골랭은

‘물도 안 나오는 쓸모없는 땅’이라며,

플로레트의 아들 쟝에게, 그 땅을 헐값에 자기들에게 넘기기를 원했다.

 

그곳에 샘이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쟝은

물이 없기 때문에,

저 아래 마을에 가서 물을 길어 와서, 농사도 짓고 하는데..

그 물 깃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쟝은, 물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다가,

지방유지 세자르에게 자기의 땅을 저장 잡히고, 그 비용을 얻어서

자기 땅에 샘물을 파기 위해서 폭파작업을 한다.

 

그 폭파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튀어나온 돌에 맞아서, 쟝은 숨을 거둔다.

쟝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저당 잡힌 땅은, 저당을 갚지 못해 세자르의 소유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곱추 쟝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

세자르와 위골랭은 기쁨의 축배를 너무 일찍 마셔 버렸다.

 

세자르와 위골랭은, 이제는 쟝의 땅이 자기 땅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사실은 샘물을 탐낸 것) 

예전에 시멘트로 몰래 막았던 산 속의 샘물로 가서, 그 시멘트를 걷어냈다.

그러니까 다시 샘물이 예전처럼 솟구쳐 나왔다. 참 기쁜 상황이었다.

이제 아무 걱정 없이 카네이션을 재배해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멘트를 걷어내는 장면을,

산에서 양을 치며 양치기로 살던 쟝의 어린 딸 마농이

우연히 훔쳐보게 된다.

 

마농은 충격을 받고 경악한다.

 

양치기 마농은 그곳에 남아서 10년 세월이 지나서,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한다.

양치는 소녀로 계속 혼자 살아간다.

 

이제 커서, 어린아이가 아니라, 숙녀가 된 마농은

세자르와 위골랭이, 간사하게 샘물(영화제목 ‘마농의 샘’)을 막았던 사실을 기억하고,

 

결국 자기 아빠의 땅을 빼앗기고, 자기 아빠의 목숨까지 잃어버린 이유가,

바로 세자르와 위골랭 두 사람이,

샘물을 속여서 막은 일 때문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농은, 그 시골에 교사로 부임한 남자(베르나르)와 결혼한다.

그 결혼식장에 마농의 할머니 플로레트의 옛날 동네 친구가 참석하면서

영화는 대 반전이 이루어진다.

 

그 플로레트(쟝의 어머니)의 옛날 동네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옛날에 유지 세자르와 플로레트가, 그 마음에서 한때 연인 관계에 있었을 때,

 

곱추 쟝은, 거기서 생긴 아들이라는 것이다.

플로레트가 갑자기 도시로 떠나버려서, 그 사실이 감추어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쟝의 딸, 양치기 소녀 마농은, 세자르의 손녀딸이 되는 셈이었다.

이 즈음 위골랭은 마농을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위골랭은 마농의 5촌 삼촌뻘이 되는 셈이다.

 

▲탐욕으로 인한 결과는 파국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카네이션 농장을 꿈꾸던 위골랭은 자살해 버린다.

과거에 샘물을 몰래 막은 죄책감과,

또한 마농을 짝사랑했는데, 교사 베르나르에게 빼앗긴 점,

그리고  샘물을 막은 것이 결국 쟝과 마농을 괴롭혔다는 죄책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자살해 버리고 만다.

 

마농은.. 할아버지 세자르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관계가 되어버린다.

 

노인 세자르는, 플로레트가 남긴 유물인 머리빗 등을 만지작거리며,

이 잔인한 운명의 드라마 앞에서

어쩔 수 없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혼자 늙어서 쓸쓸하게 죽어간다.

 

▲영화의 교훈

세자르는 그 플로레트에 속한 땅의 샘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샘물 하나 막은 것이다.

그리고 플로레트의 아들 쟝이 돌아왔을 때,

샘물을 고의로 막은 사실을 속이고, 그대로 묻어둔다.

 

그래서 그 샘을 쟝의 폭파 사고로 거의 그저 얻었는데,

결과적으로 자기 아들 쟝을 잃게 된다.

 

또한 자기가 아들처럼 사랑하던 조카 위골랭을, 자살로 죽게 내몰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의 손녀딸 마농과는

자기가 죽을 때까지.. 원수관계가 된다.

 

    남의 샘물 하나 빼앗은 탐욕이,

    그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준.. 그런 영화작품이었다.

 

다시 말하면, 세자르와 위골랭의 마음속에 있었던 탐심이

‘마농의 샘’을 시멘트로 몰래 막아버리게 되고,

그 탐욕의 결과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 참담했다.

 

얼마든지 세자르는,

마농의 결혼식 때 밝혀진 진실로 인해,

 

쟝을 자기 아들로 삼고,

위골랭은 자기의 충직한 조카로 서로 서로 돕고,

마농은 자기 손녀딸로 삼으면서 

모두가 행복하고 사이좋게 살 수 있었는데..

작은 탐욕이.. 모든 것을 망쳐 놓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부린 작은 탐욕이, 수 십 배 커져서 부메랑으로 내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만나와 메추라기만 주신 이유

 

▲오직 하나님만 쳐다보고 살아라. 탐욕을 부리지 말라

하나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주셨다.

인간적으로 ‘너무 심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

 

쉽게 말하면, 이런 얘기다.

인간의 만족은,

‘많이 소유함’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소유함’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너희는 ‘먹고 사는 것 중심으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90%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 중심으로 살고 있다.)

먹고 사는 것에.. 인간의 참 만족, 참 행복이 없기 때문이다.

 

그 훈련시키시는데, 40년이나 걸렸다.

예수님은 멋지게 그 훈련을 통과하셨다. 마4:4, 광야 시험에서!

 

그런데 예수를 30년 믿은 사람들이,

아직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광야 이스라엘처럼, 40년이나 걸릴 모양이다.

 

인생의 사는 목적이

‘먹고 사는 일’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일에 분수를 넘어서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나는 하루치씩만 거두게 하셨다.

이틀 치를 거두면 다 썩어버렸다. 욕심도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탐욕을 부리다가 망한 이스라엘

민수기 11장에 자세한 내용이 나오므로, 설명은 생략하고요,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이 주시는 분량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탐욕을 품게 될 때,

영화 ‘마농의 샘’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탐욕을 버리는 훈련.. 40년이나 필요한가?  (질문이 아니라, 탄식)

 

욕심은 사실 누구나 가진 인간의 본능이다.

만약 욕심이 하나도 없다면.. 그건 정신병자일 것이다.

재물을 모으고, 승진을 꿈꾸며, 좋은 집과 옷을 갖고 싶은 마음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 욕심 때문에.. 인간의 문명 발전을 이루어내었고,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분수를 넘어갈 때,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을 때’

이웃을 해하는 큰 죄를 짓게 된다.

 

▲사람은 이 땅에 살 때, 하나님이 주신 분수를 따라 살아야 한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12:3

 

내 삶의 현장은,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영역이 있다.

그것이 내 연령에 따라, 또한 내 역량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노후에 작아지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지금 나에게,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고유한 영역이 있다.

그 안에서 모든 허락하심을 누리는 것은.. 축복이요, 은총이다.

 

그런데 나의 경계를 넘어가서, 이웃의 경계를 침범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정해주신 나의 한계를, 내가 독단적으로 교만해져서 넘어가고자 할 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무시하고, 무조건 내가 확장해 나가려고 할 때,

 

결국 이웃을 해하게 되고, 결국 부메랑처럼 나도 해하게 되는

탐욕의 죄에 빠지게 된다.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뛰어넘어버린다. 탐욕 때문이다.

인간이 수고하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많이 소유함을 통해 내게 만족이 온다.’ 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를 뛰어넘어서 빼앗는 것은.. 탐욕이다.

 

인간의 만족은,

‘많이 소유함’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소유함’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탐욕에 빠진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40년의 광야 훈련이 필요했다.

그것 가르쳐 주시려고, 오직 만나 한 가지만 주신 것이다.

광야에서는, 하늘에서 주시는 것만 받았다. 그것도 매일 하루치씩만!

사람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있다는 것이다. 신8:3, 마4:4

 

만나를 이틀 치 거두면 썩어버렸다. 탐욕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노력해도 더 가질 수 없었다.

오직 먹고 사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분량만 받고 살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족은, 하나님께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것을 받아서, 자족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참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사탄은,

‘네가 더 많이 가져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유혹하는데,

실제로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결코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탐욕을 품을 때, 인간관계가 엉망이 된다.

위의 영화 예에서 보듯이,

인간관계, 가족관계가 엉망으로 파괴되어 버렸다.

 

우리 주변에도,

부모 유산상속문제로.. 싸우지 않는 가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형제간에 다 서로 원수가 된다.

 

그래서 ‘유산이 없는 집이 가장 행복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싸울 꺼리(유산)가 없으니까!

 

    오늘 혹시 내 인생이 얽혀버리고, 꼬여버린 상태에 있다면,

    영화에서 노인 세자르처럼, ‘탐욕’때문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인간의 탐욕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지만..

맞다. 인간의 본능과 타고난 아담의 죄성은,

아무리 사막에서 수 십 년 수도를 닦은 성자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을 다 그대로 방치할 수 없고, 올라오는 대로 다 발산할 수도 없다.

그걸 다 방치하고, 다 발산하는 것이 ‘탐욕’인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선언하면서

그 불쑥 불쑥 솟구치는 탐욕과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

 

성령충만을 받고, 깊은 경지에 올라가면.. 모든 욕망이 없어질까?

많이 성화되기는 하겠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욕망이 다 없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

즉 ‘도덕적 완전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극단이다.

 

반대쪽 극단도 있는데, 아무리 용을 쓰고, 애를 쓰도,

아무리 십자가에 자아가 죽고, 성령충만을 받아도,

인간의 욕망, 탐욕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므로, (그 다음날 또 생긴다.)

어쩔 수 없이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믿고서’ 다 방치하는 태도이다.

이렇게 방치하는 것도 위 완전주의와 정반대쪽의 극단이다.

 

    날마다 삼가고, 피하고, 깨끗이 하고,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날마다 회개하고, 자기를 돌아보고,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그랬고,

    사도 베드로가 ‘제어하라’ 그랬듯이...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제어해야할 탐욕을 도리어 부추길 수 있다.

오늘날 성공주의, 비전.. 이런 주제에 너무 극단적으로 빠지다 보면,

(인간의 행복과 만족이 하나님을 가지는데 있는 줄 모르고,

소유를 많이 가지면 되는 줄 알고)

설교로 ‘무한 탐욕’을 부추긴다.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면서

‘네 잎을 무조건 넓게 열라’는 식으로..

낙심한 신자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심어주기 원하고,

신자들도 그런 용기와 격려를 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레미야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렘6: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제사장과 선지자가 ‘더 큰 비전(탐욕)을 가져라’고 부추길 수 있다.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선지자가, '너희가 탐욕을 부려도 평강하다 평강하다' 설교하지만.. 거기에 참 평강이 없다.

 

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분수를 넘어서, 탐욕을 부리면.. 반드시 망한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정해주신 섭리의 영역을 침범하면서까지

무조건 경쟁에서 승리하고,

남을 밟고 올라가서라도 머리가 되어야 하며,

경쟁에서 승리한 자를.. ‘무조건 하나님 잘 믿은 결과’로 호도해 버린다.

 

    이런 모든 파행이

    인간의 행복과 만족이 하나님을 가지는데 있는 줄 모르고,

    소유를 많이 가지면 되는 줄 아는데.. 기인한다.

    참된 복음을 버리고(모르고).. 세상 논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가르친다.

 

▲지금 내게 주어진 현실이,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고 해서.. 탐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

지금 내게 주어진 현실..

(비록 죄로 인해 징계를 받아 비참한 현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내게 알아서 섭리해 주신 현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자족할 줄 모르고, 만족할 줄 모른다.

끊임없이 불평하며, 탐욕을 부린다.

그 가치관, 생각의 틀이.. 세속적이며, 물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욕을 부려서,

남의 돈을 억지로 빌려서까지 사업을 확장해 보고,

형제들과 악착같이 싸워서 부모 재산을 차지하면서 용을 써 보지만..

그렇게 해서 만족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래서 행복해진다면, 성경을 폐기처분해야 한다.)

 

    오히려 그 탐욕 때문에,

    부부 사이가 멀어지고, 가족관계가 다 깨어지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부메랑을 맞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세자르의 가정처럼...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40년 광야 훈련을 시키신다.

오직 만나 하나만 먹고 사는 훈련을.. 40년이나 시키신다는 것이다.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데.. 40년 걸린다는 것이다.

 

‘주님 제 꼴이 지금 이게 뭡니까?’

‘좀 더 많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런 탄식은 아직 '40년 훈련'이 끝나지 않아서 그렇다.

이런 우리의 탄식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요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딤전6:6 그러나 지족(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분류 없음 > 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가서 3장 주석  (0) 2010.11.24
공동체의 운명은 대언자의 사명과 직결  (0) 2010.11.24
사실적 믿음, 현실적 믿음 2754  (0) 2010.11.21
유착과 이개이동  (0) 2010.11.20
주형을 깨는 것이 회개 2752  (0) 2010.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