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내면적 갈등이 없는/있는 성도 롬7:24 08.10.07.설교녹취, 편집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롬7:24
▲이해하기 쉽게, 먼저 주제 요약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듣기는
예수를 잘 믿고, 은혜 체험을 깊이 하면
‘늘 기쁘고,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그런 충만한 성도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사실이다. 그런 일면이 있는 반면에,
아래의 일면(자기 죄와의 갈등, 싸움, 롬7:24절 본문)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어쩌면 우리는 성경을, 또한 우리 신앙생활을.. 일면만 보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내 신앙이 정체되었다면, 그 이유는,
(내가 너무 잘 믿어서 내적 갈등이 없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가 너무 잘못 믿고 있기에.. 전혀 영적인 갈등이 없는 것이다.
아래 설교문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아무리 신앙의 깊은 경지에 올라가도.. 내적 갈등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반된다는 것이다.
갑자기 마더 테레사의 고백(그가 커다란 신앙의 내적 갈등을 겪었다는 내용)이 생각난다.
그가 겪은 갈등이, 정말 크리스천의 정직한 고백이라는 생각이 든다... /편
◑1.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 이것이 바울의 고백이 아니라는 주장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
이렇게 말하는 ‘나’, 그가 과연 누구냐 하는 논란이다.
▲바울의 고백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
주로 신학자들의 이론적 주장인데,
-본문의 나를 ‘불신자’로 본다.
-혹은 바울이 예수 믿기 전 과거 자기 모습을 돌아본 것이라고 본다.
-또는 ‘성령을 아직 받기 이전의 신자의 모습’..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본문에서 이 사람은 율법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율법을 지킬 능력은 없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도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위 19, 22절을 근거해서,
죄로부터 해방된 거듭난 크리스천이
어떻게 여전히 자기를 죄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상적인 크리스천은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믿음 좋은 바울이, 자신을 그렇게 믿음 없는 존재로 말할 리 없다는 것이다.
바울의 서신서에 보면,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이후에 굉장히 자부심을 갖고 기뻐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것과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라서.. 바울이 아닌 것으로 본다.
비슷하게, 율법을 원하고 율법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어떤 ‘어정쩡한 상태의 사람’(성령 빋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는 신학자도 있다.
(물론 이 관점◑1.을 우리는 지지하지 않는다.)
◑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 이것이 바울의 고백이라는 주장
▲현재 바울이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기 속에 죄에 대한 싸움과 갈등이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갈등하는 사람이,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 이 설교의 주제
우리가 1년 내내 교회를 다니고, 나름 열심히 예수를 믿었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갈등이 만약 한 번도 없이 한 해를 지내왔다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적일 가능성이 크다.
정리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이것은 큰 죄를 지은 사람의 고백도 되겠지만,
-열심히 날마다 죄와 싸우는 신실한 크리스천의 고백도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고백이 없는 사람은
-큰 죄를 짓지 않은 성숙한 크리스천의 삶의 고백이 되기도 하겠지만,
-죄에 대해 무감각한, 죄와 전혀 싸움이 없는, 타협하는 크리스천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설교문이 주장하는 관점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특별히 우리 삶의 현실을 볼 때,
본문 롬7:24절의 고백을, 바울의 자기고백으로 본다.
어거스틴, 캘빈도 바울의 고백으로 본다.
정상적인 신자도 충분히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라고 한탄하는 사람이, 불신자일 수 있겠느냐? 라는 주장이다.
불신자가, 자기 죄 문제에 대해서 한탄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이런 탄식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은혜를 맛 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자기 죄악에 가슴을 치면서 한탄하며,
이 끊어지지 않는.. 여전히 나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나는 그 앞에 굴복하고 마는 그 죄 앞에서 안타까워하고, 비탄에 빠지지 않겠는가!
특별히 솔직히
‘나 요즘 기도생활을 제대로 안 했더니, 기분이 영 안 좋아!’
라고 말하는 불신자 보셨는가?
‘내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어서 요즘 너무 힘들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참 신자이다. 나이롱 신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즉, 오직 신실한 신자만이, 롬7:24절의 탄식과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시험 못 봤다!’라고 말하는 학생은, 사실은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다.
다 맞았는데, 그 중에 한 두 개만 틀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부 못 하는 학생은, 아예 그런 갈등이 없다.
또한 ‘불효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사실은 효자인 경우가 많다.
진짜 불효자는.. ‘효/불효’에 대한 개념 자체가 아예 없다. 그게 자기와 관련 없는 일이니까!
아주 믿음직한 크리스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죄악의 문제 때문에
여전히 힘들어하고, 버거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이런 사람들이 꽤 있다.
심지어 목회자 자신도 그러할 수 있다.
오히려 불성실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신앙에 갈등이 전혀 없다.
자기 신앙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자기가 잘 믿는다고 생각한다.
▲성 프란시스는 종종 동굴 속에 들어가서 기도했는데,
그 분이 종종 눈에 안 보여서, 하루는 제자들이 프란시스를 몰래 뒤따라가 봤다.
그는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있더라는 것이다.
무슨 기도를 하는지 들어봤더니
‘하나님, 부디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하시고,
저의 죄악됨을 절대로 잊지 말게 하시고, 나의 이 비통한 죄악이
내 속에서 계속해서 깨달아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사람이 주님의 빛 앞으로 가면 갈수록, 진리 앞에 정직하게 서면 설수록,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감사와 감격과 기쁨이 있지만,
동시에 자기 연약함, 추함, 더러움을 깨달으면서 비탄함도 동시에 있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정상적 모습이라는 것이다.
은혜의 충만과 기쁨 가운데, 비통함이 함께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비통함이 없이
일년 내내 은혜, 충만, 기쁨만 넘친다면..
그게 정상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자기 죄에 대한 갈등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성자라서가 아니라, 무감각해서 그렇다.
▲신앙의 갈등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엄연히 두 욕심 사이에서 살아가는 전쟁터와 같은 존재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사이에서
끝없이 다툼을 경험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아무리 성령충만을 받고, 삼층천에 갔다 오더라도.. 면제되지 않는다.
바울의 서신서를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눈다면
초기에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고전15:9 나는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다. 이렇게 설명했다.
중기에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는
엡3:8 나는 성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다..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의 사역 말기에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딤전1:15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라고 했다.
바울은, 자기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자신의 비천함을 더욱 깊이 깨달았던 것이다.
사도들 중에 → 성도들 중에 → 죄인 중에 괴수로 점점 더욱 낮아졌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롬7:24절의 곤고하다는 바울의 고백은,
갈5:17절의 고백과
고전15:9, 엡3:8, 딤전1:15절의 고백과 연관해서 볼 때
바울의 고백이 맞고,
또한 우리 모두의 고백인 것이다.
◑마치는 말
▲도대체 내게도 정말 쉽게 극복되지 않는 어두움들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10년, 20년, 30년 그 갈등이 계속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갈등을 이기고 극복했다’ 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갈등을 포기하고 회피해 버리는 것’이다.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물론 어느 나라처럼, 과도한 청교도주의로 나가고,
과도한 결벽주의로 나가서 (성령의 역사를 잃어버린 채로 윤리적 노력만 강조하는 것)
오히려 신자들을 ‘질리게’ 만들면 안 되지만..
오늘날 기독교의 타락을 염려하는데, 그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강단에서부터 그 ‘죄와의 갈등’이 가물에 콩 나듯.. 나오는 것이다.
목회자 자신들에게서부터 그런 ‘갈등’이 없기 때문인지,
두루뭉실 넘어가는데서..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영혼이 병들어 가고 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인가?’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사실인가?’
‘내가 주의 종이 맞는가, 혹시 가면을 쓴 것은 아닌가?’
물론 이런 갈등을 하는 이유는, 성숙과 발전과 성화를 위해서다.
정상적인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는.. 그런 갈등이 반드시 동반된다는 것이다.
(잘못되면, 더 자포자기에 빠질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안 되고..)
만약에 금년 한 해를 살아오면서,
이런 갈등 한 번 해 보지 않고 ‘잘’ 지내왔다면,
-예수를 정말 잘 믿어서.. 그럴 수도 있고,
-예수를 정말 잘못 믿어서.. 그럴 수도 있는데,
전자보다는, 후자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예수를 잘 믿으면 잘 믿을수록, (전자인 경우에도)
더 갈등도 많아지면서, 깊어지면서
그러면서 점점 더 높은 단계의 성화sanctification에 이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빛을, 그 성령의 감화를 내게 비춰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내적 갈등’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성화’도 없다는 것이다.
.................................... 더 읽으실 분 ..................................
▲요즘 들어 깨닫고 묵상하는 것이 있다.
‘성화’에 관련해서 기독교에 양극단이 있는데,
①한 쪽은 ‘이신칭의’로 의롭게 되었으니, 아무 내적갈등과 싸움이 없다는 개념이다.
그런 죄와의 갈등과 싸움을 해 봐야.. 되지도 않으니.. 포기하거나 덮어두는 것이다.
이신칭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라는 뜻인데, 거기서 더 나가면 안 된다.
거기서 더 나가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니, 죄와 싸울 필요 없다’는 큰 잘못이다.
②다른 쪽은 ‘성령충만’하고 은혜의 체험을 하면.. 완전성화에 이른다.
그래서 죄지을 욕구도 없어지고, 죄와의 싸움도 없어진다... 이것도 극단이다.
(과거에 이 블로거에서 이런 논지를 폈던 적이 몇 번 있었던 것 같다. 죄송합니다.)
물론 거듭남과 새로워짐의 능력은 굉장한 것이다. 내면과 본질이 변하는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선언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자기 내면이 변화되어, 과거처럼 죄지을 마음이 활활 불타오르지 않고, 그게 싫어진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너무 커서, 우리를 아담 타락 이전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것도 사실이다. 거듭남은 내면의 본질적 변화인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이 블로거에서 이런 논지를 강조했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왜 ‘죄의 유혹’이 완전히 내게서 사라지지 않는가?
어제는 성령충만 했는데, 오늘은 왜 또 그것이 식는가?
예수님의 보혈과 속죄의 능력이, 완전하지 못하고 부분적이란 말인가?
굳이 신학적으로 대답을 찾으면, ‘이미 아직 already, not yet’이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 내 죄의 속죄, 내면의 새사람으로의 변화..
그게 지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이미 아직 already, not yet’이다.
(이 개념에 대한 설명은 목사님께 물어보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에서,
아무리 은혜 체험, 거듭남, 성령충만, 믿음충만 하더라도,
여전히 롬7:24절의 갈등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바울처럼, 마더 테레사처럼!
‘내가 깊이 은혜 체험하고, 성령충만을 받았으니, 이제 다 되었다!’
이렇게 마음 푹 놓고 있다가는.. 사탄에게 크게 당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평생 ‘갈등’만 하고 살 것인가? 롬7:24절의 바울처럼?
그런데 그 대답은 롬8장에 있으므로, 8장을 더 깊이 연구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도입 이야기, 나 자신에 대해 객관적이 되기 어렵다.
우리가 누군가와 논쟁을 벌이다가,
내가 말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꽤 설득력 있게 상대방에게 들려지도록 하기 위해서
잘 쓰는 말이 ‘객관적’이란 표현이다.
‘나 지금 굉장히 객관적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거든!’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한다.
그런데 사실은, 수학공식 외에, 객관적인 상황은 과연 뭐가 있을까?
심지어 객관적 사실이라는 과학도,
과학자의 어떤 개인적 가치관이나 세상을 보는 눈에 의해서,
사실fact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다.
‘내가 객관적이 되기’란 참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본인의 경험, 성향, 어려서부터 배웠던 문화적 가치관,
세상을 바라보는 틀.. 이런 것들을 깨뜨리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내가 굉장히 객관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해도
사실 말 그대로 ‘객관적’이 되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하다.
이런 사실을 전제로 해서,
오늘 가급적 최대한 객관적으로..
우리 각자 자신을 한 번 들여다보고자 한다.
▲7:24절의 ‘나’를 ‘우리 모두’를 빗대어 말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내용은 아님)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말하는데,
그 ‘나’가 7:7절부터 시작된다.
7:6절까지는 ‘우리’라고 표현하다가, 7절부터 ‘나’로 바뀌었다.
바울이 지금 자기를 빗대어 뭔가를 설명하고 싶어하는 데,
이 ‘나’는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고,
자신을 빗대어, 자신의 안타까운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 모두의 연약함을 대리 표현하는
그런 표현은 아닐까? ▣ 죄, 복된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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