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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 고후4:7~11 스크랩, 출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시작하면서
지난 시간에 우리는 바울이 처해져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며,
에베소 교회에서는 사역의 커다란 실패를 경험하여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의 사형선고를 받은 바울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그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 고백을 듣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후 2장에서 3장까지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비판에 대해 답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답변 중에서 바울을 가장 곤란하게 했던 것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비판 이였습니다.
‘과연 바울이 사도로서의 자격이 있느냐?’는 비판입니다.
그 비판의 근거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사도로서의 정통성이 없다는 것과, 그가 처해져 있는 상황 이였습니다.
◑1. 세상의 승리와 하나님의 승리
우리는 지금 바울이 어떤 비난과 싸우고 있는지 그 핵심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당시 헬라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승리주의라는 관점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시대 헬라 로마 문화는 철저하게 정복과 지배의 문화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복은 영광이었고, 지배는 정의였습니다.
심지어 전쟁에서 훌륭한 승리를 거둔 사람들은, 신으로 숭배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바울의 모습은
그들의 시각에서는 철저한 패배자의 모습 이였습니다.
그는 늙고 외소한 몸으로 천막을 지으며 가는 곳마다 배척을 받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쩌면 고린도교인들은 그 초라한 바울을
자신들의 사도라고 인정하기가 부끄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실패라는 상황 속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커다란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는 인간의 실패를 통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구하려다가 실패하고 광야로 도망간 모세,
형의 축복을 가로채려다가 실패하고 삼촌집으로 도망간 야곱,
왕으로 기름 받고 왕의 사위가 되었지만 실패하고 광야로 도망간 다윗...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들의 실패가 있었기에, 하나님의 승리가 있었다고 생각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인간의 실패와 하나님의 승리를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실패 역시 하나님의 승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실패 역시 하나님의 승리의 일부분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분은 한 때 유대인의 왕으로 불렸습니다.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모두들 그 분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인간적 삶의 마지막은, 가장 처절한 패배로 끝났습니다.
이방인들, 그것도 반역자나 극악무도한 사람들만이 지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 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인간의 관점으로 봐서는 철저한 실패였습니다.
그런데 이 실패가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에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 분이 힘겹게 십자가를 걷는 그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승리를 향한 걸음 이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로마 군병들의 조롱의 채찍과 백성들의 멸시에 찬 눈동자가
바로 하나님의 승리를 향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 모든 조롱과 멸시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오는
인류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믿으십니까?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승리의 사건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은, 단순히 전쟁에 이겨
땅을 조금 더 차지하는 것과는 차원이 틀린 이야기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승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한 실패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인간의 눈에 보이기에는 처절한 실패였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커다란 승리의 일부분이었던 것입니다.
◑3. 바울의 상황
바울 역시 이와 같은 관점으로 오늘 읽은 말씀을 적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는 고린도교인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초라하고 처절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상황을 보는 시각은 고린도 교인들과의 시각과 틀립니다.
그는 자신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비록 자신이 연약하고 초라하여 질그릇 같지만
그 질그릇 안에 보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보배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뒷 부분의 말씀에서
그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10절에서 그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번역이 잘못되어서 조금 우리가 이해하기 힘듭니다.
여기서 죽인 것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네크로시스’인데
이것은 죽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히 이 죽음은 무기력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다시금 번역하면
‘우리가 예수의 무기력한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진다’라고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뒤에 설명합니다.
이는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11절에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10절과 1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실패와 좌절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실패와 좌절 가운데서 하나님의 승리를 본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모든 게 술술 잘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과정 속에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것 같고, 답답한 일을 당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표면적으로는 실패의 연속이지만, 물밑에선 승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끝맺으면서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누구의 시선으로 보아도 이것은 실패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관점에서
나의 상황을 다시 바라보기 바랍니다.
커다란 승리가 눈 앞에 보이십니까?
이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고 있는 그 능력의 손길이 보이십니까?
우리는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 나의 상황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이 실패가 하나님의 성공의 섭리의 한 과정임을 믿음으로 눈으로 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입술로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 관련 글 ...................................
▲나의 실패와 팀의 승리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의 도는
다른 말로 '나의 실패와 팀의 승리'라는 말도 됩니다.
우리 팀이 승리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나도 승리하고, 팀도 승리하려니까.. 둘 다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자기가 죽고, 팀을 승리시킨 대표적 인물입니다.
명량해전 등에서 큰 승리를 거두지만, 결국 노량해전에서
자신이 자주 쓰던 '생즉여사, 사즉여생'의 삶을 몸소 실천해 보여주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이순신 장군이 예수를 믿었다는 기록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찌 그리 예수님과 비슷한 삶을 살으셨는지요..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으나,
크게 보면, 주님의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한 신학자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천천히 도나
잘게 갈아낸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10:29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런 주님의 섭리, 역사의 수레바퀴를 알지 못하고,
니느웨를 빨리 심판할 것을 기다리며,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도 아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욘4:11
요나는 자기 계획(니느웨 멸망)이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뜻(아끼심)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니느웨는, 하나님의 때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천천히, 느리게 움직일 필요 있습니다.
성급하면.. 종종 일을 그르칩니다.
그러면 내 뜻, 내 계획, 내 얼굴이 망하는 것 같지만.. 예, 반드시 망합니다.
그러나 다시 반드시 부활할 것입니다. /편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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