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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자연주의, 성경적 이신론의 영향 2791

LNCK 2010. 12. 14. 14:27

 

◈과학적 자연주의, 성경적 이신론의 부정적 영향          골1:16       10.11.14.설교녹취


 

아래 설교문은, 아침에 조용한 시간에 읽으셔야.. 이해가 됩니다.

한낮에 분주한 시간에 읽으시면.. 복잡해서 아무런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되,

눈에 보이는 세계도 창조하셨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창조하셨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보이지 않는 것들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4개는 다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 천사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1:16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위에 있는 세계다.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상식이요, 일상이다.  주1)



◑현대의 왜곡된 대표적 두 세계관 (서론)


※세계관에 관한 좋은 책 (설교자의 추천)

「능력 그리스도교」  찰스 크래프트

「하나님 나라의 삼각구조」  모어랜드


오늘날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세계관은

과학적 자연주의 세계관포스트모더니즘이다.


▲1. 과학적 자연주의 세계관

오늘날 현대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는, 과학적 자연주의 세계관이다. (줄이면 '과학')

이것은 계몽주의 때부터 시작되어 서구에 널리 퍼져서,

그동안 서구 사회 및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세계관이다.


문제는, 이 세계관이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 자연주의 세계관이란,

이것은 과학의 연구대상인 물리적 우주가,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우주가,

존재하는 전부라는 견해이다.


과학적 자연주의 세계관에 있어서 실재 Reality는 뭐냐?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이다.

물질 이상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즉,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세계(하나님, 천사, 영적세계, 도덕적 삶 등)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본문 골1:16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되,

눈에 보이는 세계도 창조하셨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창조하셨다.


이들은 (물리)과학이 그 참다운 지식을 얻는 유일한 길이거나,

적어도 가장 월등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인생경영을 잘하려면,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 이성적 지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국가도 발전하려면, 과학적 지식이 뛰어나야 선진국이 되고,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참다운 실재를 물리적인 영역만 인식하고,

더 이상의 영적인 세계를 무시하는 것은.. 여기서 신앙이 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 과학적 지식만 뛰어난다고,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전쟁이 없는 것도 아니고, 범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행복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은 과학적 자연주의 세계관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것이 최고라고 말한다.


 

▲2. 포스트모더니즘

과학적 자연주의 세계관과 더불어 오늘날 우리 삶에 모든 영역에서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세계관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있다. 양대兩大산맥이다.


이것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주의, 또는 다원주의’이다.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너도 옳고, 나도 옳고.. 모든 입장이 나름대로 다 옳다는 것이다.


이런 도덕적 상대주의로 인해, 인간에게 절대적인 진리가 사라지면..

결국에는 쾌락의 추구만 남는다. 절대 선도 없고, 절대 옳은 것도 없으니까!

(성경도 옳지만, 다른 종교적 진리도 옳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절대 진리를 버리고,

쾌락을 추구하면 할수록, 진정한 행복이 더 없어지고, 우울증만 더 늘어난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만 온다.)


인간이 절대 진리와 절대자 하나님을 떠나면.. 이성적으로는 족쇄가 사라져서,

더 자유롭고 행복해질 것 같은데.. 오히려 허무주의, 절대 불만족만 생긴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허무함, 우울증 등이다.

더 긴 설명은 주2)

 

그래서 위 2개 세계관에 질려버린 현대인들이

다시 ‘영성으로 돌아가자!’면서 영적 세계로 회귀하는데,

기독교로 회귀하는 게 아니라,

뉴에이지, 인도의 신비주의, 요가, 불교 등으로 회귀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우리 믿는 성도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는 아는데,

그래서 하나님을 믿을지 몰라도,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기적.. 이런 것들을 거의 믿지 않는다.

과학적 자연주의 세계관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을 믿지만, 점도 치고, 풍수지리도 믿는다.

그리고 절대 진리Bible Standard로 살지 않고, 세속적 상대주의로 살아간다.

요즘 개방적 성풍속도가 특히 그렇다. 신자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력 때문이다. 그래서 혼합주의 신앙으로 흘러간다.


세상 사람들이야, 세속적 세계관에 의해 지배받아 사는 것은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치더라도,

문제는, 절대자와 절대 진리를 믿는 우리 성도들조차도,

믿음이 희미해지면서, 과학적 자연주의 세계관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과 영향력에

무방비로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속적 가치관/세계관에 의해

    점점 타협되고, 허물어진 기독교는

    오늘날 <성경적 이신론>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 <성경적 이신론>을 오늘 설교의 본론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적 이신론 (본론)


▲먼저 <이신론 Deism 디이즘>이란?

이신론理神論이란, 성적 관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는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믿는다.

여기까지는 성경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법칙, 자연 법칙에 세상을 맡겨두셨다는 것이다.

지금 우주와 세상은, 자연법칙 또는 사람이 발견한 과학적 원리에 의해서 운행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시계를 만든 후에는, 시계가 자기가 알아서 움직이듯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더 이상 세세하게 개입하지 않으시고,

세상은 자기 법칙에 따라서 스스로 움직여 나간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성경적 이신론>이란?

하나님도 믿는다. 성경도 믿는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도.. 과거에 정말 있었다고 믿는다.

주님의 재림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도 믿는다.


그런데 자기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그런 기적, 초자연적 역사는 믿지 않고.. 대신에 과학적 자연주의를 믿는다.


예를 들면, 성경에 나오는 5병2어의 기적은 믿는다.

그런데 똑같은 사건이 20세기에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다고 하면.. 믿지 않는다.


행12장에,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족쇄가 풀어지고, 파수대 문을 통과해서

풀려났음을 믿는다. 성경의 기적은 다 믿는다.

그런데 비슷한 사건이, 21세기 내 주변에서 일어났다고 하면.. 믿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듣는 간증들이 거짓말인 경우가 있어서 믿지 않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과학적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다.

학교, 언론, 사회에서 늘 듣고 배우는 것이 모두 과학적 자연주의 이니까

자기도 모르게 세뇌되는 것이다.


기적이나 성령의 초자연적 현상은

(사람에게는 기적이지만) 하나님께는 일상인데,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닌데, 주1)

과학적 자연주의의 영향 때문에,

21세기 성도들이,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거나, 거의 믿지 않는다. 주3)


하나님의 어떤 기적적 운행하심, 성령의 역사보다

자연법칙, 과학법칙을 더 신뢰한다.

이렇게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지만, 실제 삶에서는 <이신론>을 믿는

현대 기독교인을 가리켜 <성경적 이신론자>라 부르는 것이다.



◑빌 헐 박사의 간증


「성령의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빌 헐, 탈벗 대학교 교수 저,

이 책에 보면, 빌 헐 박사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은사중지론자들의 신학에 설득당하여, 수년간 그들의 입장에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입장을 재고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성경의 본문들을 거듭 연구한 결과,

나에게 신학적인 편견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성경은 정말 은사중지설을 가르치고 있는가?’는 질문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연구해 보았다. 특정한 가정 없이, 성경을 연구한 결과,

나는 은사중지론자들의 입장을 버리게 되었다.


나는 ‘성경적 이신론자의 고백’라는 제목의 잭 디어의 글을 읽기 전까지는

내가 갖고 있던 신학적 입장의 이름도 몰랐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성경적 이신론자’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헌법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은, 대부분 신학적으로 이신론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러나 이 땅은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법칙위에서 운영되는 것으로 믿었고,

더 이상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미국이 독립하던 18세기 당시 시대조류가 그랬다.)


그들은 (초자연적) 신적계시를 부정했으며,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했지만, 태엽을 감아놓은 시계처럼

우주가 스스로 진행하도록 만드셨다고 가르쳤다.


▲18세기 이신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숭배했던 반면,

오늘날 성경적 이신론자들은 성경(지식)을 숭배한다.


물론 이것이 성경적 이신론자들의 의도된 신앙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경은 하나이다.

성경이 곧 하나님이란 인식이 오늘날 절대적이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것은 맞다. 하나님의 계시도 맞다.

그러나 성경(지식)이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시다.

그런데 성경(지식)을 너무 믿는 나머지, (마치 우상숭배 하듯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적 역사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성경적 이신론자들이 믿는 신앙이다.


나도 이런 신학을 오래 동안 견지했던 자로서

나 자신이 성경적 이신론자임을 스스로 알고 있지도 못했다.

나는 당연히 하나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나는 잭 디어의 ‘성경적 이신론자의 고백’ 글을 읽고서, 드디어 깨달았던 것이다.


성경적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성경을 아는 것의 구분을 잃어버렸다.

우주를 창조하신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인데,


성경이 우리 신앙의 기준으로서 너무 너무 중요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을 알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이정표와 같은 것인데,

과학적 자연주의의 여향을 받은, 성경적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성경을 아는 것의 구분을 잃어버렸다.

(성경지식은 아는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모른다는 얘기)


이들의 모토는 ‘성경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영적 성장의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성경지식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라고 주장한다.

맞다. 이 말은 성경을 소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이,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몇 가지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참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교제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외적으로 성경의 계명 몇 가지를 (율법적으로)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인격적으로 예수를 만나기 보다는,

성경 말씀을 얼마나 많이 배우는가를 더 중요시 여긴다.

(배움을 통해서, 예수님을 깊이 알고 만나야 되는데,

배우는 데서, 지식을 얻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는 뜻)


그래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말씀을 배우는 것이 좋고,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배워서 실제 삶에서 말씀에 순종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리새 적으로 외적으로/외식적으로 지키는데 그치더라는 것이다.


즉, 성령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과 참되고 인격적인 만남이

성경공부를 통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지식으로 그치더라는 것이다.


(과거에 미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성경적인 삶, 성경공부’에 많이 치중해 왔는데,

그것으로는 이제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무슨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

성경공부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과학적 자연주의, 성경적 이신론 등의 영향으로,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면서,

하나님과 인격적 만남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반성이다.)


물론 성경적 이신론자들이,

예수님과 비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성경적 이신론자였을 때,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뜨겁고 탄탄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예수님보다,

씌어진 글(성경)에 더욱 더 집착하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성경적 이신론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와 개입에 대한 여지가 없다.

(성경이 100% 다 차지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마치 자연법칙을 만드시듯이, 성경을 써 놓으시고,

이제 우리 노력으로 성경만 잘 지키면 되는 것처럼.., 말씀하고 가셨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인도/순종도 필요하지 않고,

오직 성경을 잘 연구해서..

거기 나온 내용들만 잘 지키면.. 다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살았는데.. 이것은 잘못이었다.


그래서 직접적인 하나님의 인도/도움/간섭이 자리 잡을 수 없는

실질적으로는 이신론의 삶을 내가 살고 있었다.


(이게 과학적 자연주의, 성경적 이신론의 심각한 영향이다.

성경을 믿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이신론자와 똑같다.

이른바 ‘성경적 이신론자’의 신앙과 삶이다.)



▲마치는 말

①이게 과학적 자연주의, 성경적 이신론의 심각한 영향을 받아서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합리주의가 팽배해 있다.

성경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는 5병2어가 나타나도, 오늘날 성도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주4)


자유주의

그래서 성경의 초자연적 기적들은 일절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도덕적 교훈만 빼내서.. 가르치고 믿는다.

이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보수주의도 어떻게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성경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모든 기적을 (자유주의와 달리) 다 믿지만,

그 기적들이, 오늘날 실제 자기 삶에 있어서는 나타난다고 믿지 않는다.

과학적 자연주의 성경적 이신론의 영향력 때문이다.


 

②사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교육,

그리고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전래해준 복음과 신앙이

사실은 과학적 자연주의 성경적 이신론의 영향력이 강하게 묻어 있어서,

오직 성경 한 권만 믿고, 다른 일체의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를 무시해 버리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런 복음을, 또한 세계로 전파하고 있다.


(여기에는 기적주의, 신비주의가 극단적인 역기능을 했던 이유도 있다.

그래도 과학적 자연주의 성경적 이신론의 신앙 칼라가 가장 건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자기 개인적으로 큰 문제와 시련에 봉착했을 때,

    과학적 자연주의 성경적 이신론적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금식해서, 기적적/초자연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미신쯤으로 여긴다.

    기도를 하기는 하되, 간절히 안 하고, 대신에 인맥을 동원하는 등 합리적 해결책을 찾는다.


    물론 (일례로 병원 등) 과학적, 합리적 방법을 너무 무시하는 것도 문제지만,

    신앙, 기도, 성령의 역사에 의한 방법을 너무 무시하는 것도.. 똑같은 극단이다.

    기적이나 초자연적 역사는, 성경에나 일어나는 기적이지,

    오늘날 자기 삶에 적용되는 것으론.. 믿지 않는다. 오직 합리적인 것만 믿는다.

 

    이런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영향받은 현대의 세계관에 기인한 것으므로,

    그것을 성경적 세계관으로 고쳐 나가야 한다. 

 

③ (설교자가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다.)

찰스 크래프트 박사의 말을 인용하여,

‘강의/설교 중심의 교회 모임은.. 재고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강의와 설교가 안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과학적 자연주의 성경적 이신론의 영향력으로,

교회 모임의 초점이 성경(지식)에만 있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한국에서도 ‘좋은 목사’의 기준도

    공부를 많이 해서, 학위도 받고, 성경적/이론적 지식이 풍부한 목사를

    ‘훌륭한 목사’로 친다. 이것도 과학적 자연주의, 성경적 이신론의 영향력 때문이다.


    이렇게 강의, 설교중심이 되다 보니까,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나타내 보이셨는데,

    말씀+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회복. 치료, 변화시키셨는데,

   

    오늘날 말씀사역자들은, 말씀은 전하는데,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이 회복/치료/변화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배가, 그냥 고상한 성경지식의 전달로 끝나버리더라는 것이다.

     과학적 자연주의의 영향력 때문이다.

   

    설교자 자신부터 ‘논리적 말씀 설교’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이 행하신 성령사역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성경적 이신론의 영향력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령사역이,

    성경에만 나타난 역사일 뿐,

    오늘날 우리 현실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들 믿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설교가

    ‘새로운 성경의 지식과 정보 제공’을 잘하는 설교가

    유능하고 최고의 설교인 것처럼.. 오해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회중은, 그런 설교를 듣기에 즐길 뿐, 어떤 변화/치유/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말씀사역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사역은 잘못이 없다.

    다만 거기서 끝나지 말고, 더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시간에 성령이 임하면서, 사람들이 변화/치유/회복되는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성경처럼, 초대교회처럼!

 

    (물론 과거에 성령사역 한다면서, 말씀사역을 도외시하고, 신비주의로 빠졌던 극단들이 꽤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사역 자체에 두드러기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성경은 우리 성도의 믿음과 삶 faith & practice의 기준이긴 분명하지만,

    그것이 그 ‘이론’으로 끝나버리면 안 된다.

    성경말씀이, 성령의 역사로 통해, 하나님과 대면/교제/임재하는 데까지 나가야 한다.


    그래서 말씀이, 물론 찬양과 기도와 더불어..

    사람들이 변화/치유/회복되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우리가 간절히 소원, 목표, 실현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성경적 기독교의 발목을 잡는 것이,

     과학적 자연주의, 성경적 이신론이 아닌가..

    그래서 지금 우리가 너무 이론적, 지식적으로 치우친 것이 아닌가..

    이 시간을 통해 짚어보는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찰스 크래프트의「능력 그리스도교」(?)를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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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기적이 인간에게는 기적이지만, 하나님께는 상식이요, 일상이다... 라는 논지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님께 를 클릭해서 참조하세요. 


예를 들면, 동물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이 비행기를 움직이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은.. 기적이요, 초자연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일상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기적도,

사람이 보기에는 그것이 기적이요, 초자연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이 일상인 것이다. 기적이 아니다.



주2)

이런 과학적 자연주의 세계관이 오늘날 대학교, 중고등학교, 언론방송에 널리 퍼져 있다.

교육계, 언론계, 연예계, 이러한 사회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집중적으로 쏟아내고 있는 가치관/세계관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존재하시더라도, 세상 현실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으시는 (주무시는) 하나님처럼,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누가 하나님을 언급하면..

아주 무식하고, 비상식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과학적인 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주 열등한 것인 것처럼,

신앙은 신화의 영역에나 속하는, 정신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그래서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과학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합리적 사고를 통해서 풀려고 노력해야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 어리석고 무식하고 비천한 자들의 행태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로 인해서, 우리 믿는 사람들마저도,  영향력으로 

신앙의 신빙성조차 흔들리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이다. 세속적 세계관의 영향 때문이다.


여러분, 그 과학적 자연주의 세계관만 하더라도, 그 바탕 핵심이 진화론이다.

진화론에 의해 우리 인생이 세워진다면,

즉,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고,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살아간다면,

절대로 평화롭고, 의미 있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갈 아무런 이유와 목표가 없는, 너무나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만다.

 


주3)

우리가 오늘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고, 또한 반드시 믿어야 하지만,

신앙생활은 <개인적 체험 중심>보다는, <말씀 중심>으로 해야 한다.

개인의 기적적인 체험은, 인정하지만, 가급적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여주봉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갖기 위한 4가지 근거 (강추)


아직은 그러는 경우가 한국에서는 없지만,

설교시간에 너무 공공연하게 간증 형식으로 드러내다가는,

<개인적 체험>이 <말씀 중심>보다 더 무게가 실리게 되면서,

종종 곁길로 나갔던.. 과거 기독교 역사를 볼 수 있다.


특히 아프리카 교회가 그런 성향이 강하면서,

극단주의로 빠질 위험성에 늘 노출되어 있다.


개인적 체험을 너무 제한하고, 믿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이 설교문의 주제)

개인적 체험을 너무 드러내고, 강조하다 보면..

(역사에 의하면) 항상 예외 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박태선 장로 등



주4)

대천덕 신부님이 한국에 오신 초기에,

태백 그곳 마을 어른들을 초대했는데,

갑자기 예상보다 몇 배 많은 동네 어른들이 와서,

사모님이 준비한 음식으로는 턱도 없이 모자랄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다함께 기도하고 같이 식사를 했는데,

찾아온 동네 어른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 단 한 번 있었다고 한다. 일종의 5병2어의 기적이다.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의 저자 멜 테리는,

동티모르에서 ‘물로 포도주를 변화시키는 기적’을 여러 번 행했고,

심지어 물이 없는 지역에서는, 더러운 구정물을 놓고 기도했는데도,

그 물이 포도주로 변하여 ‘성찬식’을 할 수 있었다고.. 책에 썼다.


그냥 재미로가 아니라, 포도주로 성찬식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가난한 밀림 속에, 포도주가 없었다... 그 상황에서 기도했더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멜 테리(동티모르인)가 미국에 초대되어 가서는,

아무리 기도해도 ‘물이 포도주로 변화 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변 마트에 포도주스와 포도주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신기한 신유사역은, 병원이나 약국이 없는 지역에서,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오직 기도로써밖에 고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는..

초자연적 역사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한국 선교사들에게서도, 아주 가끔 이런 5병2어와 같이

‘질량불변의 법칙’을 초월하는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난다고 보고되고 있다.

다만 이런 보고를 자세히 하지 않는 것은,

괜히 자기만 이상한 사람,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적에 치중하여 신앙생활 하기보다는,

그저 성경에 근거하여, 상식적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건전하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든지/안 일어나든지.. 그것이 목적이 아니고,

참된 목적은.. 삶의 변화이다.                                                                       ▣ 복음 관련   

삶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 기적은.. 거짓 기적이든지, 또는 사탄의 기적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