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가 말하는 여호와를 아는 것 렘22:16 10.11.15.설교녹취
▲'여호와를 아는 것'은 신구약을 관통하는, 성경의 큰 주제 중 하나이다.
예레미야서 본문에서도, 이 주제를 강조하고 있는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는 것이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고 한다. ↙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22:16
◑부자나, 가난한 자나.. 존재감의 무게는 똑같다.
▲박상용 씨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에 나오는 이야기
한 부자 영감님이, 어느 날 자기 집에서 부리고 있는 종놈(종)을 데리고
서낭당을 찾아간다. 서낭당에 머물고 있는 귀신에게,
자기 목숨의 무게와, 자기 종놈의 목숨의 무게를 저울질해서,
누가 얼마나 더 무거운지를 좀 달아(분별해) 주면 좋겠다... 부탁을 한다.
내심 이 부자 영감님 생각에는,
틀림없이 내가 부자고, 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이 있으니까,
내 집안에서 자기 재산은 하나도 없이, 평생을 종노릇하고 있는 저 종놈보다야
자기 목숨의 무게가 훨씬 더 무거우려니... 하는 마음으로,
재미삼아 한 번 부탁한 것이다.
그래서 서낭당 귀신이, 두 사람의 목숨의 무게를 저울질 해 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정말 눈꼽만큼도 차이가 없이, 두 목숨의 무게가 평형을 이룬다.
부자 영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의아해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나는 돈을 무지하게 많이 갖고 있고, 땅도 넓으며,
그 재산으로 인해서, 내가 사회적으로 갖는 위치나 영향력은 정말 누구보다도 큰데..,
우리 종놈은 우리 집에서 평생 종노릇하고 있으며, 자기 땅 한뼘 없는데,
어찌 그 목숨의 무게와, 내 목숨의 무게가 같을 수가 있느냐?’
그러니까 서낭당 귀신은 이렇게 말한다.
‘정 그러면, 당신의 많은 돈을 가지고, 목숨을 서 너 개 사서 저울에 올려놓으라.
그러면 당신의 저울(천칭)이, 그 무게로 내려갈 것 아닌가!’
물론 돈으로 목숨을 서 너 개 더 사서 붙여놓을 수는 없다.
자동차 예비타이어 갖고 다니듯이, 사람의 목숨을 예비로 갖고 다닐 수는 없다.
귀신이 그냥 부자를 비꼬는 소리다.
여차여차 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서낭당 귀신이 나중에 이렇게 말한다.
'정 그렇게 무게를 달고 싶으면, 선업善業이 누가 더 무거운가 한 번 재보자!'
그래서 다시 저울로, 선업을 달아보았더니
종의 선업이, 부자 영감과 비교가 안 될 만큼 무겁게 나타났다.
부자 영감이 마지막에 혼잣말로 독백한다.
‘야, 내가 돈을 모으느라고 온갖 짓을 다 하고 살았는데,
그 돈 갖고도 내 목숨의 무게를 한 치도 더 늘일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이제 집에 돌아가서, 내 돈을 이웃들에게 나눠주면서,
한이 맺힌 사람들의 한이나 풀어주면서, 선업을 쌓아야 되겠구나!’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귀신이 ‘잠깐!’ 외치며 이렇게 말했다.
‘영감님, 저승사자가 지금 문 밖에 와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데려가려고 합니다.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
이렇게 에피소드가 끝난다.
여러분, 부잣집 영감님의 목숨의 무게가,
평생 남의 집 종노릇 하던 사람의 목숨의 무게보다.. 조금도 더 무겁지 않았다.
오늘 내가, 나름 교육도 많이 받고, 사회적으로 지위도 있으며,
내 자부심이 부자 영감에 못지 않겠지만..
그 목숨의 무게는.. 세상 모든 사람의 무게와..
특별히 내가 무시하는 사람의 목숨의 무게와.. 아무런 차이 없이, 똑 같을 수 있다.
▲부활절 달걀과 민달걀
우리가 부활절에, 장식달걀을 선물로 서로 주고받는데,
아주 정성을 들여서 예쁘게 장식을 하고, 달걀껍질 위에다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아이들 보기에는, 아이들 마음에는,
장식한 달걀과 민달걀의 차이는 정말 엄청나다.
아마 민달걀을 여러 개 주어도 안 받지만,
예쁘게 장식한 달걀은 한 개라도 귀하게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달걀을 집에 갖고 와서,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니까
결국 껍질을 까서 소금에 찍어 먹게 된다.
그 껍질은.. 장식달걀과 민달걀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고,
아이들이 느끼는 기분도 하늘과 땅 차이처럼 크게 차이가 나지만,
그 속은.. 껍질을 까서 먹을 때 보면..
장식달걀이나, 민달걀이나.. 그 존재감의 무게는 똑같다.
오히려 물감이 속으로 스며든 장식달걀이, 더 맛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위 <부자영감과 그 집 하인> 이야기를
<장식달걀과 민달걀>의 예로, 다시 한 번 설명해 보았다.
◑본문 설명
▲누구나 영혼의 무게는 똑 같(을 수 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서, 그리고 소선지서들
남유다 멸망 즈음에 쓰여진 이 예언서들에는,
남유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망한 이유 중에
중대한 이유 한 가지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이방인/ 과부/ 고아를 학대하고, 그들에게 공평하게 대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는, 유대사회에서
전형적으로 기반이 없는 사람을 대표한다.
쉽게 말하면, 그 사회에서, 외적인 존재감의 무게가 제일 낮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태도에 대해 예언서 여러 곳에서 줄곧 분노하시는데,
저/설교자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과연 그렇게 심각한 문제일까?
(물론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되지만)
그것이 한 나라가 망하고, 그 사회에 멸망과 심판이 선포되어질 정도로,
큰 문제가 되는 일이란 말인가?
하나님이 너무 과민반응 하시는 것은 아닌가?
저는 여기서 ‘영혼의 무게는 누구나 똑같다’고 생각해 본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도,
그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자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나 높은 사람이나..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나..
그 영혼의 무게감은 똑같다. 하나님은 똑같이 대하신다.
(부자나 상류층은, 사회에서 별로 무시 받을 일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편도 안 드신다.)
그래서 우리도, 그들을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하다고, 비천하다고 차별/무시하지 말고!
▲약자를 학대하는 것을,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렘22:13 주1)
이렇게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는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은 굉장히 싫어하신다.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신24:15
여호야김 왕이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키고, 품삯을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걸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본문은, 그런 여호야김을 자기 아버지 요시야와 비교한다.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렘22:15
요시야가 진짜 ‘먹고 마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일을 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요시야가 ‘정의와 공의를 행했다’고 했는데,
이는 이방인/고아/과부 등 사회적 약자들을 잘 도와주었다는 말이고,
그래서 ‘그가 형통하였다’고 예레미야가 예언으로 말한다.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이.. 여호와를 아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는 것이, 그것이 곧 여호와를 앎이 아니냐?’ :16
여호와를 아는 것이,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아래 설교문에 자세히 논리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김계현 / 신앙의 본질, 긍휼 (강추)
여러분, 하나님을 안다(히. '야다')는 것은,
구약은 물론이요, 성경전체의 아주 중요한 大주제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어 온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이 내게 전달되면,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 곧 이방인/고아/과부를 도와주고 변호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안다는 뜻도 된다.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는,
높은 왕이나 부자나
고아나 과부의 존재 무게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하나님께는
고아에게 한 끼 먹을 빵을 준비해 주는 것이나
고관대작에게 큰 선물을 갖다 주는 거나.. 아무차이가 없다.
우리가 느끼는 세상의 존재감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하늘과 땅처럼 존재감이 크게 다르지만, (그러나 달걀 껍질에 색칠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 보실 때는, 그 존재의 무게, 목숨의 무게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다.
일례로, 교회에서
높은 지도자의 존재감이나, 낮은 과부의 존재감은
하나님 보시기에 별로 다르지 않다. 똑같다.
그런데 신자들은,
이방인/고아/과부는 무시해서 나몰라라 하고
교회 지도자에게 과도한 선물을 보내는 것은..
(그러면 좋긴 하지만)
만약 이방인/고아/과부는 무시해서 나몰라라 하는 가운데서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일이 되는 것이다. 렘22:16
그래서 여호야김이 망하고, 유대사회가 망했다는 것이다.
‘여호와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껍질에 불과한 존재감을 너무 무겁게 여기고,
가난한 자와 약자를 무시한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마치 당신을 무시한 것처럼 진노하신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과거에 세상에 라이온스 클럽, 석세스 클럽,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회합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클럽에 한 번 초대 받기를 원하며,
연말 송년회에, 그런 명사들의 모임에 한번이라도 끼어보기를 원하는데..
또 우리가 그렇게 성공하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여러분, 사실로 말씀드리면,
거기서 호화로운 송년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이나 (이것은 부러운 일이다.)
그 호텔 아래, 땅 밑 지하철에서 밤에 노숙하는 노숙인들이나,
영혼의 무게, 그 존재감에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다. 별로 다를 게 없다.
그 모임을 경호하기 위해서 이중으로 경호원을 세우고.
그 모임을 취재하기 위해서 방송 카메라가 동원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는 존재의 무게감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이런 영혼의 무게를 바라보는 영적 시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다른 게 있다면,
평소에 자기가 얼마나 남모르게 선행을 행하는가에 달려 있다.
노숙자도, 자기 끼니를, 이웃 노숙자와 나눠먹으면서
얼마든지 선행을 행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빈자가, 욕심 많은 부자보다도,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그 영혼의 무게감이 더 중할 것이다.
내가 이방인/고아/과부를 돌아보지 않고 2010년을 지내왔다면,
그것은..
아무리 넓은 집에 살고, 빛나는 차를 타고 다니고,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더라도,
그 영혼의 무게와 존재감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그들의 존재감을 존중하면서도, 제대로 보고 있었다.
그들이 화려한 왕복을 입고,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그것이 ‘부활절 달걀 껍질’에 무늬 입힌 것에 불과 하다는 것을
바울은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구약 성경전체의 큰 맥인데,
렘22:16절에서 그것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려면 신앙의 본질, 긍휼 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도와줄 때,
그들의 영혼의 무게감이나, 나의 영혼의 무게감이 똑같다.. 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고, 내 영혼의 무게감이 더 무겁고,
가난하고 궁핍한 영혼의 무게감이 더 가볍고 비천하다고 생각할 때..
그런 마음으로 내미는 도움의 손길은,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내 스스로도 교만의 죄를 짓는 ‘못된 선행’이 되고 말 것이다.
...................................
주1) 위 렘22:13절은, 문맥을 보면, 여호야김 왕에 대한 말씀이다.
(물론 광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으로도 볼 수 있지만)
여호야김 왕이 한 일은,
애굽왕 느고가 자기에게 왕위를 허락하자
그 왕위에 앉아서 사치를 일삼았다는 것이다.
자기의 왕궁을 확장공사를 하고, 백성들을 끌어다가 공사와 노역을 시켰는데,
품삯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호야김은 애굽의 바로 느고에 의해 세워지는데,
바로 느고는, 자기 아버지 요시야 왕을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시킨 원수다.
그리고 자기 동생(여호아하스)을 폐위시킨 왕이다.
그런 애굽의 느고에 의해서, 자기가 왕으로 세워졌는데,
그런 애굽의 느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못하고,
오히려 그 느고의 혜택을 누리고 향유하면서,
대신에 연약한 백성들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강자에겐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강했던.. 그런 존재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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