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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참 복을 - 위로 2817

LNCK 2011. 1. 6. 11:00

 

◈새해에는 참 복을 - 위로                     마5:4                   11.01.04.설교녹취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이 구절에 대한 설교문들을, 제/설교자가 여러 편 검토해 보니

대부분의 설교들이

전반부 ‘애통하는 자’에 방점을 찍고,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설교자는 후반부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에 방점을 찍고

여기서 말하는 위로가 무엇을 뜻하는지.. 한 번 살펴보려고 한다.

이 ‘위로’에 대해서는 거의 설교가 되지 않고 있어서, 더욱 그러해야 했다.

 

또한 이 ‘위로’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면

‘애통함’ 역시 무슨 뜻인지 더 정확히 파악하게 되리라고 보는데...



◑1.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위로라는 말은, 복으로 지명되기에는, 8복의 리스트에 등재되기에는

위로가 중요하지만 조금 약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까짓 것 위로 정도가, 무슨 복이 되겠는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성경을 연구해 보니, 

정말 '복 중의 복'이었다. 이제 살피게 될 것이다.

 

     위로는, 8복 중에서, ‘천국의 복’ 다음으로, 2번째로 등장하고 있다.

     대단히 중요한 복임에 틀림없다.


8복을 해석하는 틀 중에 하나는,

첫째 복과 8째 복이 동일함에 착안하여 →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래서 첫째 복과 8째 복을, 책으로 치면 앞/뒤 겉표지로 보고,

2째~7째 복을 책의 중간 내용으로 본다. (이런 해석이 있다.)


이렇게 볼 때, 8복은 ‘천국 생활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처음과 끝이 ‘천국’이니까)

그 천국생활의 내용 첫 번째가 ‘애통하는 자가 받는 위로’인 것이다.

‘위로의 복’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위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위로와 다르다.

헬라어로 파라칼레오인데,

파라칼레오란 말은 파라(~곁에), 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인데,

‘내 곁에 오라고 부르는 것, 또는 내 곁으로 오는 것’이.. ‘위로’이다.


이것의 중요성을 예를 들면, 제가 교육전도사 때,

연말이 되면, 당회원 장로님들과 교역자들이 모두 부부회동으로 함께 회식을 했었다.

송년회 겸 신년하례 자리였다.

저는 서열이 가장 낮은 교육전도사니까, 저 말석에 앉아 있었다.


담임목사님 옆에 앉을 수도 없고, 장로님들 곁에 앉을 수도 없었다.

제가 만약 담임목사님 옆에 자리 잡으면,

보통 그 자리에는 서열이 높은 교역자나, 장로님들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고,


제가 만약 장로님들 옆에 자리를 잡고, 그분들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면,

그것이 또한 담임목사님 눈에 좋게 비칠 리 없기 때문이다.


교육전도사나 부교역자에게는, 암묵적 윤리가 있는데, (※진리는 아님)

그것은 절대 장로님, 성도님들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부교역자는, ‘담임목사님이 당회원과 친한 사이’를 갈라놓으면 절대 안 된다.

그래서 회식 자리에 가서도, 사실은 제게는 그저 고역이고, 어려울 뿐이었다.


이때 담임목사님, 또는 장로님 한 분이 저를 불러 주신다.

‘아무개 전도사님, 이리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 하면서 자기 옆에 자리를 내 주신다.

(여기서 위로/파라칼레오를 연상하셔야 된다.)


꼭 교회가 아니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관장이, 특별히 공을 세운 직원을

회식 자리나, 회의석상에서, 그를 불러서 자기 곁에 앉히는 것, 자기 옆에 나란히 세우는 것 

이것이야말로, 대단한 위로이다.


위로’의 원어적 뜻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 ‘위로’와 같으면서도, 약간 다른 뜻이 된다.


우스운 것은, 요즘 TV에서 무슨 보험회사 광고 카피에

‘당신이 어려울 때, 우리는 항상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는 식으로 말하던데,

그것이 바로 ‘위로(파라칼레오)’의 성경적인 뜻이다. 정말 위로를 주는 광고였다.


예수님이 ‘(행)복’이라고 말씀하신 ‘위로’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높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서, 당신 곁에 두시겠다는 뜻이니.. 그거야 말로 정말 영광스런 ‘복’이다.


기고만장이란 단어는.. 일이 너무 잘 될 때, 그 뽐내는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는 얘기다.

 

좋은 뜻으로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좋은 뜻으로 써 보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 우리가 기고만장, 기세등등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해 주시면.. 우리가 기고만장하게 된다.

이 세상의 권세들 앞에서, 내가 조금도 마음 자체가 오그라들지 않는다.


성경에 보면, 주님이 이렇게 위로 하신 경우가 종종 나온다.

-세리장 삭게오를 찾아가서 당신 곁에 두시고(위로 하시고)

-동네에서 손가락질 받던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칭찬하시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이 한 일을 기억하리라’ 하시면서 세워주셨다.


구약에서 위로의 예를 보면

이새의 8번째 아들 다윗을,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셔서, 그를 감동시켜 주셨다.

이 다윗에게, 하나님이 그의 옆에 불러 세워 주셨을 때, 

다윗이 기세등등, 기고만장(좋은 뜻으로)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감 충천이다.


골리앗이 호령 앞에서, 이스라엘이 모두 다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다윗은, 기세등등, 기고만장했다.

이것이 바로 위로(파라칼레오- 옆에 세우다)의 (행)복인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오복五福을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번 기를 펴고 살아봐야 되겠다는 심리다.

-돈이 있어야 기가 산다는 것이다.

-자녀가 일류대학 들어가야 기가 산다는 것이다.

-남편이 임원으로 승진하고, 연봉을 많이 벌어야.. 기가 산다는 것이다.


5복을 염원하는 우리 마음을 보면,

한 마디로 ‘오복이 있어야, 기를 펴고 살 수 있다’는 심리인 것이다.


제가 과거에, 어느 중견(중소)기업의 직원예배를 한동안 인도했던 적이 있었다.

그 첫날에, 그 기업의 차고를 관리하시는 수위 아저씨께서

‘이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냐?, 왜 차를 여기에 세우려 하느냐?’ 하면서

저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그럴 것이, 뭐 부교역자로서 제가 타고 다니던 차가, ‘광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직원이 주차장으로 뛰어내려 왔다.

그리고 제 차를 수신호해서, 사장님 차 바로 옆에 세우게 했다.


그 수위 아저씨가 태도가 싹 바뀌는 것이었다.

그때 제가 느낀 느낌이 바로 ‘위로’ (기세등등, 기고만장)이었다.


세상 복, 오복.. 그런 것 있으면 좋지만, 하나도 없어도 된다.

하나님이 나를 위로(당신 옆에 불러서 세우심)하시면 그만이다.

그것으로 더 크게 충분히 기를 펴고 살 수 있다. 골리앗 앞의 다윗처럼!


오늘 내 마음에 위로를 주는 것들이 무엇인가?

오늘 나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이 주는 위로에 그치고 있는가?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중요한 위로의 복이.. 그런데 아무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애통’은 팬세오인데

이 단어를 70인역에서 찾아보면

야곱이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었다는 (거짓)소식을 들었을 때,

비통하여 울 때 애통(팬세오)를 쓰고 있다.

그만큼 아주 비참하게 우는 것을 뜻한다.


또한 다윗이, 압살롬이 죽었을 때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차라리 널 대신해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자식이 죽었을 때 애통하는 것이, 마5:4절의 애통(팬세오)이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가, '하나님이 내 곁에 오시는 위로'를 받는다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이런 정도의 ‘애통’(자식이 죽을 때의 우는 심정)

과연 사람이 살아생전에 몇 번이나 경험할까?


어쩌면 우리가 이런 애통을, 평생 해 보지 못하고 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가끔 배우들을 보면, 정말 연기에 몰입해서 콧물까지 흘리면서 우는 것을 본다.

정말 훌륭한 연기다.

배우가 애절하게 애통하듯이, 우리가 그렇게 배우처럼 애통해야 한다는 것인가?

물론 둘 다 아니다.


▶내 위로의 대상들이 사라져야 한다.

내게 위로가 되는 대상(배우자, 자녀, 좋은 직장, 은행 잔고, 명예와 지위)들이

내게 세상 위로가 되니까.. 오늘 내게 애통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내가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세상적 위로가 되는 대상’이 내게서 사라질 때,

내가 요셉을 잃은 아버지 야곱처럼 찢어질 듯이 애통하게 되면서,

내게 그 소중한 하나님의 위로(파라칼레오)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가 내게 임하려면,

무슨 ‘틈새’가 있어야 되는데,

아니 ‘벌어진 공간’이 있어야, 그게 비집고 들어올 것이 아닌가.


①그래서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틈새’를 만들기도 하신다.

욥처럼, 사도바울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신약의 사도들처럼,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내게 위로가 되는 대상(배우자, 자녀, 좋은 직장, 은행 잔고, 명예와 지위)들을

거두어 가 버리시는 경우다.


그래서 그들이 애통할 때,

강권적으로, 그 빈 공간, 틈새에,

하나님의 위로를 채워주신다.

 

 

②그런데 현실적으로,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나를 수술하시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면서 자발적으로

마음속에서, 십자가를 묵상하며,

내 위로의 대상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도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애통하는 틈새로

하나님의 존재를, 그 분의 위로를 초청해 드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내가 다 ‘끼고 있을 때’(죄송한 표현)..

그래서 애통하지 않고, 희희낙락할 때는,

절대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지 않는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내게 위로가 되는 것들을, 내가 다 끼고 있으면서

거기에 덤으로, 하나님의 위로까지 받으려 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내가 실제로, 그것들을 다 끊어버릴 수는 없으니,

그저 마음으로, 십자가에 나 자신을 죽이면서, 애통하는 것이다.

애통이 있을 때라야, 반드시 위로가 임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세등등, 기고만장하게 되고, 자기 마음이 붕붕 뜨게 된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신년에, 내 자식/내 위로의 대상들을 끼고 있으면서,

그 우상들을 더 밀착되게 끼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로 부르짖으면..

‘애통’할 틈이 전혀 없게 된다.

   

그때 세상 위로는 받을 수 있을는지 모르나

(그러나 그것도 못 받는다. 하나님이 내 우상을 치신다. 빼앗으신다.)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는 받지 못한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있는가? 

내가 기세등등한지/아닌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②당신은 오늘 오복이 있어야 하고, 그것으로 당당하신가?

아니면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로 인해서 당당하신가?  

이것은 정말 엄청난 복이다.

 

가장 비참한 것은, 오복도 못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도 못 받는 경우이다.


③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낡은 복(세상의 오복) 쫓아다니며 애쓰지 않는가?


④오늘 나는 애통하면서, 너무 슬퍼하고만 있지는 않는가?

거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파라칼레오)를 발견하고 있는가?


..............................................


▲이해를 돕는 예화

옛날에 우리나라에 땔감이 부족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래서 당시에, 쇠똥, 말똥, 염소똥을 주워서, 집안에서 땔감으로 사용하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에 자식이 많은 집이 ‘복 받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자식이 많은 집은, 아침에 일어나면 자식들이 바깥으로 나가서,

길에 떨어진 쇠똥, 말똥, 염소똥을 많이 주워와서,

그것을 집 마당이나 헛간에 잔뜩 쌓아놓고, 흐뭇했던 것이다. 

‘이제 나는 부자다!’ 하면서... 이때는 자식들이 많은 집이 유리했다.


그런데 그 부자라고 자랑하고, 안심하는 것이

사실은 집에 ‘똥’을 가득 쌓아놓고, 자족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요즘도 마찬가지다.

아프리카 등지에 가면, 짐승의 배설물(똥)은 중요한 자원이 된다.

그래서 그것을 모아서 자기 집에 쌓아두거나, 벽에 붙여두고, 자랑하고 흐뭇해 한다.

물론 시장에서 매매도 한다.

 

오늘날 우리 한국인이

아프리카 광야의 부잣집(똥 많이 쌓아 놓은 집)에 초대를 받아서,

거기서 ‘부자’로 계속 살아라고 그러면... 아무도 원치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배설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천국에서, 이 지상을 내려다 볼 때,

오늘날 한국의 부자들이, 부자라고 자기 집에 쌓아놓은 것이

어쩌면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집에 쌓아놓은 배설물들과 똑 같을 수 있다.


그것이 아무리 소중한 것이더라도

천국의 보화에 비교하면.. ‘배설물’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 천국의 보화를 다 경험하시고 아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복(천국의 관점에서 보면 배설물)을 주시지 않고,

‘위로’를 주기 원하시는 것이다.

새해에는 우리도 천국의 관점을 갖자.                       ▣ 크리스천 리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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