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쫓아내지 못하였더라 삿1:19~2:4 인터넷설교 녹취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 입성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만 완료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무력함과 불가능함, 타락함을 낱낱이 고발하는 책이 사사기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으며, 그 자기 실력을 낱낱이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의지하고 붙들어야 한다... 이것이 사사기다.
◑‘아간 사건’ 복습 - ‘조금 남겼더라’
▲성경 읽는 관점을 180도 바꾸어야!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본문에서 내가 어떤 교훈을 얻어서, 이 훌륭한 위인들처럼 살아낼까?’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시면, 그것은 성경을 완전히 거꾸로 보는 것이다.
그게 아니다.
성경은..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 앞에서 어떻게 무력한/죄악된 자로 폭로되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그걸 어떠한 은혜로 덮으시는가?’의 관점에서 봐야지,
‘내가 성경에서 삶의 교훈을 얻어내서, 그대로 한 번 살아보겠다..’ 하면서
마치 위인전 읽듯이.. 이런 관점에서 읽으면 큰 오산이다.
성경은 그런 교훈책, 위인전, 도덕책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에 관해서만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책들과는 완전히 거꾸로 읽으셔야 한다.
▲지난 시간에 아간 사건(수7장)에 관해 공부했는데, → 아간 사건에 비춰진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는 아간의 사건을 통해서,
인간이란 존재들이 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멸망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개괄적인 답을 얻었다.
즉 인간은, 마치 아담과 같이,
절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 없는 불완전 덩어리 존재라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그 분의 뜻대로 살아야만 하는 존재였는데,
그런 하나님의 절대 의존적 존재들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에 마음을 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아간은 ‘조금’ 감추었다.
아간이 여리고 성에서, 아마 전리품을 많이 거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거의 다 바치고, ‘조금’ 자기 장막에 감춘 것이다.
수7: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외투 한 벌과, 은 2백 세겔과, 50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아간이 전쟁을 하면서 그 정도만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아간이 탈취한 전리품만 해도 엄청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일부만 조금 감춘 것이다. ↑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조금 감춘 것이다.
그 값(중)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행5:2
성경의 이런 사건들은 그 ‘조금’이 절대 용납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야고보가 가르치는 바는 이렇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약2:10
이것은 마치 법정에 선 도둑놈이
‘나는 다른 법은 다 지켰는데, 도둑질만 어겼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도 그는 그 도둑질 때문에 유죄인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들이,
다른 것들(우상)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그게.. 죄다.
그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그걸 아간의 사건이 보여준 것이다.
인간은 절대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없고, 자기 의로는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 자기 의를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다.
‘아간의 사건’에서도 그런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간이 ‘조금’ 감추었는데, 그것도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간을 죽이는 것이다. 주1)
▲그러니까 우리는 아간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간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자..’ 라는 교훈을 얻는 게 아니라,
우리는 모두 아간이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돌무더기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들인데,
그렇게 돌무더기에 불과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돌무더기에서 하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 그것이 복음이다.
바로 그 메시지를 읽어내어야 한다. 여호수아서 7장, 아간의 사건에서!
‘아간처럼 요만큼이라도 감추면 안 돼.. 정직하게 살아야지!’ 가 아니다.
사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감추는 존재다.
죽는 날까지 그렇게 자기를 사랑한다.
죽는 날까지.. 인간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죽고, 그리스도를 겸허히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인간이 원래 불완전한 존재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가? - 물론 아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한 사람에게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 천국의 삶을 '지향'(꾸준한 성장)하게 되어있다.
◑다 쫓아내지 못하고, ‘조금 남겼더라’
사사기에는 ‘가나안 거민이 이스라엘 민족아래서 사역하였더라’ 라는 구절과
‘그 거민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더라’ 라는 구절이 사사기에 반복되어 나온다. 1:19, 21, 27, 28
▲본문 삿1:19~2:4절은 ‘아간 사건’과 똑같은 일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아간이 조금 숨겼듯이,
유다 지파를 비롯한 이스라엘 12지파가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가는데,
한 지파도 빠짐없이 동일하게, 원래 거민 가나안 지파를 조금씩 남겨둔다.
왜 이스라엘이 가나안 지파들을 다 몰아내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크게 보면 2가지다.
①그들을 종처럼 부리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삿1:28
②그들의 문명, 특히 철병거가 탐이 났었기 때문이었다.
아간이 탐이 나서 전리품을 다 드리지 못하고, 얼마를 숨긴 것과 같이,
나머지 이스라엘도.. 너무 탐나는 게 많으니까, 다 쫓아내지 못한 것이다.
▲울면서도 못 쫓아냈다.
삿2장 서두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서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죽이지) 못한 이스라엘을 책망하신다.↙
2: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는 말은.. 다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엉엉 울었다고 했다. 아까워서 울은 것이다. ↙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삿2:4
자기들은 다 목적이(꿍꿍이) 있어서 남겼는데,
하나님이 자꾸 다 죽이라고 그러시니까, 이스라엘 전체가 아까워서 엉엉 울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가나안, 우상, 세상, 물질, 쾌락 .. 이런 것들.. 울면서도 못 쫓아낸다.
95% 쫓아내어도, 5%는 남겨둔다...
▲쫓아낼 의지가 부족했다.
①삿1:28절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들에게 사역을 시키기 위해
다 쫓아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삿1: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1:28~36절까지, 12지파가 모두 다 마찬가지였다.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②다른 곳에서는 쫓아내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않았다, 못했다의 구분 요)
삿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1: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1: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쫓아내지 않은 것과, 쫓아내지 못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본질은 똑같다. ‘아까워서 남긴 것’이다.
가나안 거민을 괜히 다 죽이느니,
조금 남겨서 청소, 나무패기, 잡일을 시켰던 것이고,
또 아래에 설명이 나오지만, ‘가나안의 철병거가 너무 아름다워서’ 다 진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을 다 쫓아내고, 다 죽이기가 아까우니까
괜히 ‘우리가 못 쫓아내었다’고 변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 인생에 적용해 볼 때, 내가 마땅히 쫓아내고 버려야 할 우상들을
나는 쫓아내지 못한 것인가? 쫓아내지 않는 것인가?
둘 다 이다.
쫓아내기가 사실 싫은 것이다. 너무 매력적이니까!
▲가나안의 철병거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와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1:19
‘골짜기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어서 쫓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삿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그렇다면 철병거가 여호와보다 더 강하다는 얘긴가? - 물론 아니다.
여기서 철병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서운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요즘말로 최신 유행 자동차 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직 청동기 문명이었다.
그리고 가나안에는 이미 철기 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철병거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 다 쫓아내고, 다 진멸해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매력적이었다.
(설교의 문맥, 지금 아간이 아까워서 조금 남긴 사건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 쫓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 철병거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그것을 만들 수 있는 가나안 족속을 남긴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은 그 철병거를 사용하게 된다.
본문에는 철병거만 나오지만, 다른 매력들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바알 등 우상숭배에 이스라엘이 쉽게 빠지는 이유는,
거기에는 오늘날의 무슨 광란의 축제와 같은 세상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매력이 너무 강하니까, 못 쫓아낸다. (안 쫓아낸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지 않으면,
가나안의 그 매력보다, 절대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내리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이 세상 매력을 더 사랑하게 되어 있다.
괜히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는 척 하지 마시라.
여호와와 더불어 전쟁을 치르는 유다 족속이
그 철병거가 너무 매력적이니까, '다 쫓아내라'는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 할 정도였다. 1:19~36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그들을 꾸짖었다.
‘너희가 안 쫓아내면, 나도 그들을 안 쫓아내어,
그들이 너희 옆구리의 가시와 울무가 되리라'
2:3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슬퍼서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어쨌든 엉엉 울었다고
성경에 나온다. 2:4
이게 쫓아내기 싫은 만큼 매력적이라서, 쫓아내지 못한 것이다.
엉엉 울면서도, 절대 우리가 세상을, 그 우상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못 버린다. 못 쫓아낸다.
◑해석 및 적용 - 인간은 ‘다 못 쫓아낸다!’ 조금 남기는 죄인들이다.
▲인간의 무능함과 죄악성을, 사사기를 읽으면서, 폭로 당해야 한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진멸하라고 하신 그 세상 것들이 너무 좋아서
두고두고 사용하고 사역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자발적으로 남겨둔 것임을 오늘 본문이 보여준다.
그런데 그게 결국은 옆구리의 가시와, 우상숭배의 올무가 된다. 결국 손해인 것이다. 2:3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그렇게 밥먹듯이 쉽지 않다.
너무나 매력적인 ‘가나안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울면서도 못 버리는 - 그 철병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도저히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슨 다른 방도(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마련하실 수밖에 없구나..
를 여기서 배우셔야 한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좀 더 착하게 살고/좀 못되게 살고..
이런 도덕성이,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것 갖고 여러분이 천국 지옥 안 가른다.
‘네가 네 본성적 불의를 아느냐?
그러므로 네가 내 은혜를 아느냐? 네가 십자가를 믿느냐?’ 그 믿음을 물으신다.
'너는 네 힘으로 온전함을 이룰 수 없다. 그것을 깨닫고
자신의 공로를 버리고,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 붙들어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복전쟁을 통해서
바로 이것을 가르치고 싶으셨다.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도움을 얻어서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
▲하나님께만 절대 의존성을 가져야 한다. 주2)
▲여러분이 갖고 있는 매력적인 ‘철병거’들은 무엇인가?
돈, 자식, 명예, 사업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그게 부질없고 덧없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기 원하신다.
여러분이 많이 가진 상태이든지,
혹은 여러분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이든지,
혹은 한때는 많이 가졌다가 지금은 홀랑 다 털린 상태이든지..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그것들의 부질없음을 반드시 가르쳐 주신다.
그게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저주 받은 그 애굽에서 살게 하셨다가,
광야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시면서,
애굽의 허무맹랑함, 가나안의 부질없음을 다 가르치시는 것이다.
노아 홍수 후에, 함과 그 후예는 노아에게 저주를 받았다. 창9:25~27
애굽 땅은.. 함의 땅이고 창10:6
가나안 땅도.. 함과 그 자손의 땅이었다. 창10:6
애굽과 가나안은.. 노아 때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애굽과 가나안 땅이 아무리 물질적/세상적으로 번성하더라도,
그것은 부질없이 저주 받은 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교훈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문명, 세상의 힘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임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 보내어, 또한 가나안 땅에 보내어
계속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게 오늘날 우리의 인생이다.
이 세상은 ‘함의 나라 애굽’인 것이고,
또한 ‘가나안 땅’인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세상의 부질없음을 깨달으라고.. 그걸 깨닫고 거기서 빠져나오라고 하신다.
아버지는 계속적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애굽에서 나와라’
‘바벨론에서 나와라’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라’
즉 세상에서 구별되라고 하신다.
그들과 구별되어지는 것, 곧 거룩이다.
그렇게 함과 가나안의 후예들이 세운 두 땅,
애굽과 가나안을 철저하게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지리멸렬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은,
왜 그 저주 받은 세상 나라의 원리들을 따라 살면 안 되는지를 교훈하시기 위해,
가나안 정복 전쟁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면 그걸 배우려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 동안에 어떤 모습을 '들켜야' 하는가?
가나안이 너무 좋아야 한다.
그러니까 괜히 ‘나는 이 땅이 별로 안 좋아요, 돈도 별로, 자식도 별로 안 좋아요..
그렇게 변장/외식하지 마시라.
사사기 전체가 이들이 얼마나 가나안을 못 버렸는지를
반복하고 반복해서 폭로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은혜를 붙드시라!
자 그렇게 그런 세상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면 안 되는 것,
그것을 교훈하시기 위해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는데,
이 세상의 매력은 너무나 치명적으로 강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다는 것을 낱낱이 깨닫게 된다.
거기에 예수의 십자가가 절실히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게 된다.
절대 가나안의 매력에 사로잡혀서,
그 포로된 자신에 대해서
너무 너무 절망하고, 완전히 항복하게 된 상태에서!
그래서 사사기도, 사사로 통해 예표된 그리스도와 십자가 이야기를 보여주는
구원의 책이다.
내가 다 잘 해버리면, 바리새인 되는 것이다.
‘지금 나 잘 믿고 있잖아?’ - 이거 안 된다. 이거 외식이다.
셈의 후예 이스라엘이
저주받은 함의 후예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오히려 더 악독하다.
이 사람들은, 가나안 세상 문화도 좋아하고, 거기에다 천국과 하나님까지
일석이조, 일거양득.. 둘 다 가지려고 한다.
세상 사람들 갖는 것 다 갖고서, 거기에다 천국과 하나님까지 덤으로 더 가지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는 세상 불신자보다 더 도둑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십자가(사사를 통한 구원)가 덮여진다.
이게 바로 이 땅에서 약속의 땅 정복전쟁을 치르게 되는 성도의 인생이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특별히 다른 대단한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똑같이 불가능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덧입혀질 때,
그 은혜가 덧입혀지지 않은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은혜가 가입한 삶(성도)은 철장으로 두들겨 맞는 삶이 되는 것이다. 히12:6, 계3:19
세상 사람들은 성경에 ‘그냥 내버려 두신다’고 했다. 롬1:28
그래서 이걸 고난이라고 그런다.
왜 오늘날의 교회가 이걸(고난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가? 그래서 ‘고난’을 무조건 폄하하는 것인가?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이지,
자신의 뛰어남과 별다름을 보이면서 나를 증명하는 것은.. 성도의 삶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성공, 내 탁월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속에서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가나안 정복 전쟁의 면면을 들여다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다 좇아내시고,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당신께서 준비하신 그 십자가의 위대함을 배워야 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 앞에 조금씩 우리는 항복해 들어가게 된다.
............................................
주1)
그렇게 아간이 그 조금을 숨긴 사건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불완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불완전한 아간 위에, 아골 골짜기(돌무더기)를 쌓아버리신다.
그런 진노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그런데 바로 그 아골골짜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진노를 몽땅 받아 대신 죽으셨고,
그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골짜기가 되게 하셨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골짜기가 된 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이다.
주2) ▲하나님만 절대 의존성을 가져야 함을 깨달으라!
하나님이 여러분의 열심과 의지를 격동시켜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마귀의 세력을 쫓아내는 게.. 인생, 신앙생활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무조건 사랑하셔서, 축복하시려고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런게 목적이었다면, 당시에 아주 좋은 옥토,
텅텅 비어있는 아주 좋은 옥토가 세계에 절반 이상 빈 땅으로 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철병거를 갖고 있는 거기로 끌고 들어가서 이 고생을 시키시는가?
하나님이 굳이 가나안으로 끌고 들어가신 이유는,
그 백성들에게 뭔가를 가르치셔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일부러 철병거와 온갖 문명의 이기로 무장하고 있는
매력적인 가나안 땅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들여보내시면서
그러한 것들의 허구성과 부질없음,
너희들이 그토록 매력 있어서 나의 말까지 거역하는,
나의 동행까지도 거부하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부질없는 것들인지
좀 보고 배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만 절대 의존의 그 삶의 필연성’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왜 철병거 같은 거 의지하면 안 되는가?’ .. 그것을 가르쳐 주신다. ▣ 삶의 통찰력
삿2강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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