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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시바, 쁄라

LNCK 2011. 2. 25. 19:56

◈헵시바, 쁄라           이사야62:1~5          08.03.06.설교스크랩, 출처

                                                                          

 

◑서론 -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고난을 주시는가?

 

우리가 이사야서를 읽다보면 하나의 의문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게 하시고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는 비참한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위로하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시고

또 그들을 향해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위로를 하고 계십니까?

(병 주시고 약 주시는 겁니까?)

 

성경에서는 가끔 이스라엘을 하나의 개인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인의 생애로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라는 개인의 생애는 어땠습니까?

가나안 땅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애굽 땅에서 모진 학대 속에서 보냅니다.

 

그리고 청소년 시절 그 힘든 광야 길을 해매면서 겨우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보내는 그 청년시절 역시 만만한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쉬지 않고 이방민족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학대했습니다.

 

이제 장년이 되어서 잠시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맞습니다.

이 시대 역시 끊임없이 내분과 분쟁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시기에 비하면 조금 편안한 시기였습니다.

 

중년의 시기(남북분열왕국)가 다가오면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데,

전쟁이 끊일 때가 없었습니다.

 

모압, 암몬, 에돔, 아람, 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

셀 수 없는 나라가 끊임없이 침략해 오고

결국에는 이제 앗수르와 바벨론이란 나라에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고난에 찬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의 역사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 삶을 한 번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어땠습니까? 순풍에 돛단 듯이 평안한 삶이였습니까?

그러신 분이 있다면 그 분은 다행히 축복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삶은 어땠습니까? 예수를 믿기까지 힘든 고난의 삶이였으며,

예수를 믿은 후에도 결코 만만한 삶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택한 야곱의 삶이 그랬습니다.

어렸을 때는 동생으로 태어나 형과 아버지에게 억눌림과 소외감을 당하다가

형의 축복을 가로챘다는 죄목으로 얼굴도 본적 없는 삼촌의 집으로 쫓겨 갔습니다.

그 때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의 얼굴을 야곱은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또 삼촌 집에서는 무보수로 20년간 삼춘의 집에서 일하면서

온갖 속임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얻었다 것을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마자 딸 디나가 ‘불행한 일’을 당합니다.

그리고 에브랏 길 곁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라헬이 죽습니다.

노년에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마저, 오랜 기간 죽은 아들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후에 바로가 야곱을 만났을 때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냐?’

그러자 야곱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47:9

 

이 야곱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몇 년인데 험학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라는 고백이 우리들 심중에 있는 고백입니다.

 

물론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삶에서 함께 하셨고 계속해서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처럼 험악한 세월을 살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에게 왜 이렇게 험난한 역사를 주셨습니까?

 

 

◑본론 - 정결한 신부를 원하시는 하나님

 

본문 이사야62:1~5절 말씀에 그 답이 나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이스라엘의 이름이 변화됩니다.

‘버린운 자’ 와 ‘황무지’에서.. ‘헵시바’와 ‘쁄라’로 바뀌어 불리게 됩니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사62:4

 

헵시바란.. ‘내가 너와 결혼했다’는 의미이고

쁄라란.. ‘나의 기쁨이 네게 있다’ 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여호아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쁄라),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헵시바)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과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헵시바)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쁄라)  61:4~5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과 결혼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언뜻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결혼하려면 신부를 곱게 단장시켜야지,

그 고생을 시켜서 이렇게 얼굴에 고난의 주름만 늘게 하시나?’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혼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하는 결혼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보십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정결’이란 단어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결한 신부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험악한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 정결은 바로 우리의 내면이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잠시 우리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간에게 겉사람과 속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와 영혼이라는 의미와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속사람이란..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우리의 심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 이후 우리의 속사람은, 죄로 인해 오염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죄악된 속사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만을, 어떤 이는 욕심을, 어떤 이는 분노를, 어떤 이는 불평을...

 

그런데 이 속사람은 보통은 쉽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사회적 체면’이라는 겉사람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겉사람은 쉽게 변화될 수 있어도, 속사람은 쉽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조금만 선행을 해도 ‘아 저 사람이 변화됐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속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속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고, 심지어는 죽을 때 까지

타고난 속사람의 성품을 그대로 간직하고 죽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겉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정결이란.. 겉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결한 신부가 된다는 의미는

우리의 속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이런 정결한 신부가 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쉽게 드러나지 않아, 나 자신조차도 내 속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존재였나?’

‘아니 내가 이렇게 혈기 많은 사람이었나?’

‘아니 내가 이렇게 교만한 사람이었나?’

 

이렇게 우리의 속사람은 깊숙이 감추어져 있어서

쉽게 드러나지 않기에.. 고치기도, 변화받기도 매우 힘듭니다.

 

그런데 이 속사람의 실체가 언제 드러나는 줄 아십니까?

바로 사람이 궁지에 몰렸을 때 자기 속사람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당당하고 자신 만만해 하던 사업가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왜 이성을 잃고, 자살을 하는 줄 아십니까?

 

항상 인자해 보이는 저명인사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왜 자제심을 잃고 욕을 하면서 멱살을 잡는 줄 아십니까?

 

바로 궁지에 몰리면 자신의 속사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고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마실 물이 없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돌로 쳐 죽이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마실 물이 없고 갈증이 타오르자

그들 안에 있는 원망과 불평의 속사람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 우리의 속사람이 드러나고, 이것이 변화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죄악된 속사람을 발견할 때 탄식하게 됩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분과 혈기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는 존재였구나!’ 그 탄식의 고백을 하나님을 들으시고

우리의 속사람 깊은 곳에 오셔서 우리를 치유하고 변화시키십니다.

 

그런데 이 속사람의 변화는 한 번의 회개나 은혜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연단을 통해서만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랜 연단을 통해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정결한 신부로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출세해서 하나님의 명예를 높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께 많은 헌금을 내는 것입니까?

 

물론 이런 것도 전혀 무가치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될 때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저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변화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합니다.

때로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같은 신앙인을 보고 ‘저 사람은 도저히 구제 불능이야!’

하고 미리 단정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도저히 변화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하고 미리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점점 변화되는 것을 내 눈으로 목도하면서

나의 판단하는 마음이 꼬꾸라지고, 주님의 섭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 집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그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3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변화를 통해, 이방민족에게 영광을 받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그 변화를 위해 안타까움과 연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연단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가지고 나가시려 합니다.

하나님께 봉사한 행위입니까? 하나님께 드린 물질입니까?

 

아닙니다. 그 전에 먼저 여러분의 삶을 가지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고난과 연단의 삶 가운데서 변화된 내 모습을 가지고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완전히 변화 되지 않으셨어도 됩니다. 아직도 부족해도 됩니다.

하나님은 결과를 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가 고난 중에 이만큼 밖에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까지 내 삶에서 나를 변화시켜 주시고,

나를 당신의 신부로 만들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을 가지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기도할 때, 내 속사람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기적이고 나는 교만하고 나는 실수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이런 나를 사랑하셔서 매일의 삶 속에서 상관하시고 연단하시는

그 분의 섭리를 발견하고, 그 섭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제/설교자가 군대에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입대해서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당시에 육체적으로 연약했던 저는

하루하루 훈련을 견디는 것이 고역이었습니다.

 

특히 추위에 약했는데, 가을에 입대했으니 슬슬 추위가 찾아왔습니다.

아직 난방을 하지 않을 시기라서, 온기가 없이 하루하루 추위를 견디는 것이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모든 훈련병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는데,

‘박격포 주특기’만큼은 피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 무거운 박격포를 늘 들고 다녀야 하니까, 그것만 피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박격포 주특기병은, 신체가 건강하고, 키가 큰 사람들을 주로 뽑았습니다.)

 

저 역시 논산에서 기본훈련을 받으면서 기도를 하면,

좋은 주특기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훈련이 끝나는 저녁마다 모포를 뒤집어쓰고,

훈련을 잘 마치고 좋은 주특기를 받게 해 주시며,

특히 몸이 약하기에 ‘행정병’이나 ‘군종병’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제 기본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주특기를 받는 날이 왔습니다.

모두들 좋은 주특기를 받았는데, 저만 ‘박격포’라는 주특기를 받았습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추운 논산 벌판을, 박격포를 메고 다니면서, 그 '주특기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니 매일 밤마다 모포를 뒤집어쓰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더군다나 몸이 약해서 고등학교 때 휴학까지 할 정도였는데,

‘우째 이런 일이!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이왕 받은 ‘박격포 주특기’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마지막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좋은 편한 부대에 배치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단본부에서 대기를 하면서, 자대 배치를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만약 박격포를 메고 해안부대로 배치되어 가게 되면, 거의 죽음이다!’ 

 

그러기에 사단본부에서 대기를 하면서, 또 제가 무척 기도를 했습니다.

마침 사단 인사병이 제대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인사병(행정병)으로 추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사장교가 면접을 하면서 이런 것을 묻습니다.

 

“전이병! 모든 것이 적합한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여기 서류에 보니까, 목사 아들로 되어 있는데

우리 부서는 일요일도 일이 많아서, 교회에 못 나가는데 괜찮은가?”

 

그 때 무슨 용기가 났는지, 제가 담대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는 꼭 가야 합니다!”

 

이 대답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결국 인사(행정)병이 되지 못하고,

밀리고 밀려서 서해안의 외딴 초소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교회가 없었기에 주일날 예배 나가는 것은 꿈도 못 꾸었고,

무거운 박격포를 메고 매일 해안가를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그 때부터 20년간 지켜 온 제 신앙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맞으신가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나에게만 이런 시험이 오나요?

아니, 하나님은 제 기도 안 들어주시고, 뭐 하시나요?

 

제가 그래도 목사 아들에, 개척교회에서 아버지 도와서 열심히 섬겼는데,

기도도 안 하는 동료들은 다 잘 풀리는데.. 저는 왜 항상 이 모양입니까!’

 

 

그래서 '박격포병' 생활이 너무 힘들 때마다, 하나님을 찾기 보다는,

점점 더 하나님께 반항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네가 사람하고 경주해도 피곤해 하면, 나중에 말과 어떻게 경주하겠느냐?’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저를 장차 목회자로 쓰시려고, 젊어서부터 강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렘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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