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라 마7:1~12 08.11.12. 인터넷설교스크랩, 출처, 축약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밝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위 구절, 상당히 난해한 구절입니다.
거기에 대해, 아래 설교문은 답을 주는 것 같아서.. 스크랩했습니다.
'무례한 기독교'와 관련된 설교입니다.
◑본문 설명
▶‘주장하지 말라’는 것은.. 상대방을 강요하거나
내 마음에 들도록 억지를 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내용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에 나옵니다. 마7:6
이 말씀은, 가장 귀한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 적용하곤 합니다.
이 귀한 것을 전하는 데도.. 저 개, 돼지가 진주(복음)가 뭔지 몰라 갖고
그걸 거들떠보지도 않고 거절하고, 되레 우리한테 거친 반응을 보일 때
적용하는 구절들입니다.
▶허나 여기에는 전혀 그런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겁니다.
던지는 사람이 잘못이라는 뜻인데요..
‘돼지는 진주를 못 알아보는 구나..’ 그런 방식으로 적용해라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진주를 줬다는 것 때문에 누구든지 항복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겁니다.
‘개에게 진주 줘놓고, 왜 못 알아먹느냐고 화내지 마라’ ... 이겁니다.
우리는 내가 진심을 가지거나,
내가 가치 있는 것을 준다는 입장에 서 있으면
무례해지고
상대방의 반응을 내 진심과 가치로, 상대방을 강요하려고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구절입니다. 강요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 내에서도 신앙이 앞선 이들이 신앙이
아직 어린 후배들이나 믿은 지 얼마 안 됐거나
또는 어떤 시험에 빠져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자기가 아는 정답을, 자기는 이미 건너온 경험을 근거로 해서 정답.
또는 진실함. 믿음... 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들을
내가 단칼에 그치게 만들려고 하면... 다 이 본문 말씀에 걸리는 것입니다.
▶문맥을 보십시오.
마7:6절에 이어지는
7절 이하 나오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라는 것은
상대방을 명령/강요/복종시키려 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요청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는 결론에 연결해서 이해해야 되는 대목입니다. :12
또한 마7:6절은,
마7:1절의 연장선상에서 보셔야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확대 해석하면,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어쩌면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에 티를 논하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3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이, 남에게 무리하게 강요, 비판한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요하시거나, 우리에게 무력으로 굴복시키거나 하지 않고
그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의 자발적 믿음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셨으나
우리로 하여금 자원하는 마음으로 반응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대접하는 것이요,
물론 우리도
모든 인격자와 영혼 앞에 그래야 한다고 성경의 가르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말씀의 진의를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주장/강요/복종시키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는 예수님을 아주 무례한 언사자로 오해하게 됩니다.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밝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그러니까 복음을 강요하면,
상대방에게 반발만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한다는 것은 상대방보고 문을 열어 달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문을 좀 열어 주십시오.’라고 요청하는 것이 구하라는 뜻이요,
찾으라는 것은 내가 진심을 갖고 있고 명분을 갖고 있다고 해서
'내 앞에 와라!'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은 이렇게 너 나와라 내 앞에 와라가 아니라
내가 찾아 다녀서 찾아야 합니다.
인간이.. 상대방의 독립된 인격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마저도 그런 방법을 택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지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함, 복음의 큼 때문에
우리는 사실 이 문제를 놓칩니다.
문을 두드리라!
문을 두드린다는 건
어느 문이나 빗장이 안에 걸려 있다는 것을 전제 합니다.
그러니까 당사자가 빗장을 열지 않는 한, 남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숴버리죠. 뭘로? 기도로.
그래서 우리가 굉장히 조심스러운 표현입니다마는
신앙적인 도움을 주려고 할 때, 우리가 조심해야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진심/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다려야 됩니다. 당사자가 이해하고 그 필요를 인식하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혹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마7:7~8절 구절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도에 관한 교훈'으로 알고 있으나, (그런 면이 있다고 치고)
마7:1~12절까지 단락을 형성하고 있는,
'비판에 관한 구절, 강요나, 무례하지 말 것'을 교훈하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마7:12절, 소위 황금률을 놓고 볼 때는,
마7:7~8절의 말씀도, 기도와 관련해서 연결된다기 보다는,
마7:1~11절 모두가, 비판, 강요, 무례하지 말 것과 연결되는 것이.. 더 매끄럽습니다.
◑적용
▶대표적인 것이 “아, 오해 없기를 정말 간절히 바라는데...”
진실한 얘기를 할 때 우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울면 상대방이 강요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울면.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물론 울 수 있습니다. 울 만큼 진실할 수 있고 그 진실함이 진정이라는 것 다 압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진심으로 진정을 가지고 울어도,
그런데 내 마음이 그 진심을 받아들일 수준이 안 돼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은 각각의 처지가 다른데,
운 사람은 자기의 운 것에 대한 마땅한 반응이 없는 것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울 때.. 상대방은 그 강요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한국 교회가 자주 쓰는 지금
뭐 거의 모든 교회가 쓰고 있는 우는 찬양이라는 것이
굉장히 조심해야 된다는 걸 생각해야 합니다.
찬양하면서 찬양하는 이들이 감격과 기쁨에
이렇게 너무 큰 표현(울음)을 쓰면..
보는 이들이 은혜 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강요를 받습니다.
그 강요가 때로는 엄청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받을 준비가 안 된 사람들에게는요...
▶(이 부분도 오해 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그 대표적인 것들이 찬양인도자들이
‘아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머리를 긁적이시며^^)
‘아... 찬송 부르며 우는 거, 저는 이런 시각에서는 조심하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럼 모두가 부담을 느끼죠. 같이 울든가, 같이 꼬꾸라지든가.. 해야 되는데,
그게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는.. 엄청 부담이 된다는 겁니다.
‘은혜 받아라’고, 상대에게 강요하는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인 것입니다.
정말 성령이 인도자를 감동하시고, 온 회중을 감동하셔서 찬양이 어우르지는 것은.. 좋지만,
냉랭한 분위기를, 인도자가 찬양 몇 곡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하는 것은,
오히려 ‘강요’가 되어서, 반발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감동해서 찬양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내 진심이나, 내 신앙이나 내 감격이라는 것으로
한 영혼을 예수 이름으로 내가 직접 찾아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가운데 꼭 끼우십시오.
그건 무슨 얘기냐 하면
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건 내 믿음이 아니라
‘예수 밖에 없다’ 라는 것을 인정하고, 한 인격을 만나러 가야되는 겁니다.
영혼을 만나러 갈 때 예수 없이 가시면 안 됩니다.
예수와 함께 가시고 그러니까, 상대방과 얘기할 때
그 상대방과 얘기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 요청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요청을 상대방에다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 오래된 이들, 쉽게 정답을 도출해 내려고 하고 또 정죄하기 쉽습니다.
“뭐 그까짓 것도 극복을 못했느냐?” 라고 정죄할 수 있고
또, “그건 이거야” 라고 답을 쉽게 얘기할 수 있고
“이렇게 이렇게 해” 라고 강요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한 인격과 영혼에 중요한 상처를 입히고
그 마음에 “니 까짓게 뭔데 그래?” 라는 반발을 일으켜서
예수를 만나는 것을 방해하게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가장 중요한 건 이겁니다.
그러니깐 교회 공동체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쉽게 손 내밀어
‘사랑합니다.’ 라고 손잡지 말라고 제가 가르쳤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쓰는 게 아니라고.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쓰려면 둘 사이의 관계가, 교제가
어느 정도의 최소한의 그 과정을 가져야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하는 법이지
뭐, 오늘 막 등록했는데 갑자기 나와서 “사랑합니다.” 그러고 껴안자고 그러면
겁나지요. 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마치는 말
▶우리는 정죄를 하거나, 비난을 하거나,
또는 진주를 들고 와서 상대방을 강요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경쟁상태가 더 익숙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을 정죄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여
우월감을 맛보는 것이 본성인 사람들입니다.
말할 때, 행동할 때, 판단할 때, 우리는 다 예수를 앞에 놓고 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우리는 ‘내가 직접 맞부딪치면 안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신앙적인 내용에 있어서 우리가 누구에게 충고할 것이 있고,
누구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내가 만든 것 같이 굴지 말라 이겁니다.
‘나는 했다.’ 이겁니다.
‘너는 안 했다.’ 이것이 자랑이 되고 안 한자를 정죄하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은 다 예수 안에서 은혜로 얻은 것이요.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열심이 본질적인 신앙의 내용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명분이 옳으면, 그리고 거기에 감격과 열심이 있으면
무조건 자신아 다 옳다/정의다.. 하며 밀어부치려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분명히 좋은 일을 하면서도, 경쟁하며 정죄하는 일이 난무하는 현실이 됐습니다.
자신이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좋은 일을 하는가? 얼마나 많이 했는가?..
이것들이
그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이 됐고 스스로의,
개인 스스로의 자신 신앙 평가도 쓸모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자기만큼 열심을 부리지 않는 자를 정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대신에 우리는 언제나 겸손히 요청해야 합니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사이면서도 예의와 대접이,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심이 어떠한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유용성의 문제도 아니요,
충성. 헌신의 경쟁도 아니요,
누가 더 진지하냐의 싸움도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믿음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만 설명되는
인격과 인격이 나누는 참으로 긴밀하고도 놀라운 관계에서의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공동체가 실천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러 함께 신앙생활하게 한 모든 믿음의 권속들을 위하여,
우리가 예수 안에서 얻은 신앙이 무엇인가를 방법과 명분에서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그, 가장 중요한 인격적 관계라는 가치의 대접에서 피력해 낼 수 있어야
참으로 기독교 신앙은
그 신앙을 영위하는 자와 그 신앙을 대면하는 자에게
막강한 힘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 크리스천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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