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결국 벧전1:9 인터넷설교스크랩, 출처
*원제목 : 믿음은 굿이 아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1:9 개역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벧전1:9 새번역
◑천국으로 가는 길은, 그 자체가 천국이다.
꼭 정상에 도달하는 것만 천국이 아니라...
▶블레이드 러너(칼날로 달리는 사람)로 불리어지는
남아공 출신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라는 청년이 있다.
그는 태어날 때, 무릎 아래 뼈가 없는 상태로 태어나, 두 발을 절단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장애를 딛고 육상 선수가 되어
100m를 10초 91로 달리는 기록까지 세웠다.
그는 남아공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참석한 육상 경기에서 2등을 차지하였고
2008년 북경 올림픽에 참가 신청을 한 상태이다.
얼마 전 육상경기연맹에서, 의족도 일종의 보조기구이므로
올림픽에 출천할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스포츠 중재 재판소에 이의를 제기하여 결국 출전권을 따기도 하였다.
100m를 10초 91로 달리는 기록은 일반인보다는 빠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올림픽 경기에서 메달을 딸만한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올림픽에 참가하여
다른 선수들과 함께 경기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예로 들면,
거북이가 자신이 토끼와 경주해서 이길 수 없음을 알고도
달리기를 한 것은.. 토끼를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그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일수도 있다.
나는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라는 이 21살된 청년이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에 나오는
거북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기기 위해서 달린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이 정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달리기도 한다.
오늘날 성공이라는 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어쩌면 ‘거북이’와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청년은
무엇인가 뒤떨어져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이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 자신이 설정한 목표, (즉 하나님의 영광)
자신이 걸어가야 할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함(사명)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길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로버트 퍼시그 역시 “미래의 어떤 목표만을 위해서 사는 삶은 깊이가 없다. Robert Pirsig
산의 정상이 아니라.. 산의 측면이.. 산의 생명을 유지시켜 준다.”고 말했다.
산을 올라가본 사람은 안다.
정상보다는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 더 많은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중간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들,
이름을 모르는 꽃들을 그냥 지나쳐 버린다.
이미 산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부터 즐거움은 시작된 것인데
정상에 도달해야만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면에서 도로시 데이의 “천국으로 가는 길은, 그 자체가 천국이다.” Dorothy Day
라는 말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면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인식이 바뀌어져야한다고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 그것은 경주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설정한 그 목표,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각자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그 길 자기사명 을 걸어가기 위함이라는 것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믿음은.. 내 소욕을 이루는 방편이 아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사단이 예수님께 던졌던 질문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너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 능력이 있지 않느냐? 돌로 떡을 만들어라.”
사실 이러한 사단의 질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예수님은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 질문이 유혹이 된 것은 4:2절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신 후 주리신 상태에서 이 질문이 던져졌기 때문이다.
사단은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사용하라고 유혹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나 크리스천에게는 이것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이지,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을, 삶의 우선순위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은,
믿음을..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으로 축소시켜 버린다.
우리가 힘들어 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우리가 시험 들었다고 할 때가 언제인가?
내 필요가 채워지지 않을 때가 아닌가?
예수님께서 기도로 말씀으로 명하셔서 집을 지우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아닌 대패질을 하면서 집을 지으신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함이 아님을
믿음은 나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나를 드리는 것임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믿음을 손 안대고 코푸는 것으로 제한하지 말자.
코는 손대고 풀면 된다.
우리의 믿음이.. 나의 편이와 소원 만족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무당이 작두위에서 굿을 하는 것이나
우리가 드리는 예배나, 찬양, 기도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사단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한다.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 그렇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적을 통해서 당신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사단은 지금 예수님께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라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는 사단의 말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사단이 한 이 말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효한 지혜를 가르쳐 준다고 보인다.
“생각해 보라. 네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 아닌가?
만약 네가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아니하면
너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 아니냐?
그러면 전도에 엄청 도움 될 게 아닌가? 그러니 뛰어내려 봐라!”
생각해 보시라.
예수님이 누구인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어디에 있는가?
◑힘의 과시.. 절대 안 된다.
▶뭔가를 보여줘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
이것이 세상의 원리이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힘이 최고라고. 힘이 있어야한다고.
힘 또는 성공만이 나를 알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갖게 한다고.
오늘날 세상은 힘을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가르친다.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먼저 힘을 가지라고 성공하라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이런저런 대답이 나오겠지만 그 핵심은 힘, 내가 가진 능력이다.
왜 정승집 개가 죽으면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데
정승이 죽으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가?
그것은 힘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들에게 말한다.
“네 힘을 보여줘라. 그래야 사람들이 너를 인정하고, 너를 따를 것이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그것을 이루기 위한 합리적으로 보이는 방법들을 보여주며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이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성전에서 내리는 것처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룰 수 있는 합리적이고 쉽고
또 매력적이면서도 확실한 방법이 어디에 있는가?
▶사단을 늘 우리들에게 ‘최선’이라는 것을 들고 다가온다.
사단은 short cuts, (질러가는 길)
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보이는 방법들을 제시하며 우리들을 유혹한다.
이러한 유혹에 대해서
예수님은, 잘못된 방식으로 선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선언하신다.
각각의 유혹들은 선한 일들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이다.
세상의 방식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다.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힘 앞에 굴복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요, 자신을 낮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12군단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을 불러서
당신이 어떤 분인지 알려 주실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눈에 더 효과적이고 쉽게 보이는
그런 방법이 아닌.. 십자가의 방법을 선택하셨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십자가의 원리가 아닌
힘의 원리를 가지고 자신을 세상에 알리려고 한다.
미디어에서 보도가 나오면.. 피켓을 들고 시청 앞으로 나간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원리가 아니다.
우리는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섬김과 희생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다움이다.
정말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힘을 가지고 무엇을 해보려고 한다.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기도 하고,
자신의 인맥, 재력, 위치 등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이것은 세상의 방법이다.
▶난 오늘날 힘 있는 교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힘은 누리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함인데
자꾸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힘들 때가 언제 일까?
아마도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일 것이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니, 나이 많은 학생들도 많이 들어온다.
그분 들 가운데 어떤 분은 고위 공직자 한 분도 있고,
남들이 들으면 알만한 회사의 중역을 한 분도 있다.
또 외국에서 이미 다른 공부를 하고, 학위를 가진 분들도 있다.
이런 분들은 같이 공부하는 학우들과 그리고 교수들에게
자신은 그냥 학생이 아니라고
자신을 알아달라고.. 자신의 과거의 경력을 은근히 밝히기도 한다.
난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나 역시도 외국에서 피부로 인한 차별을 받았기에
이러한 분들의 아픔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사단은 바로 이러한 감정을 파고들어 이야기 한 것이다.
“네가 누구인지 밝혀라. 그러면 되지 않느냐? 속상하지 않니? 억울하지 않니?
그러니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니까? 그게 최고야.
그거로 인생 역전할 수 있어. 한방이면 되잖아.”
그런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복음 중의 복음, 성육신
▶그러므로 복음 중에 복음이, 하나님이 인간 되신 사건에 있다고 본다.
빌2:6절 말씀처럼 마땅히 누려야할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종의 신분으로 낮아지신 것 이것이 복음이다.
만약 주님께서 이러한 삶을 사셨다면,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로마의 박해를 받으며 순교하던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택한 방법이 무엇인가?
그들은 자신의 힘을 과지하지 않았다. 억울하다고 호소하지도 않았다.
묵묵히 예수님처럼, 토끼와 경주하던 거북이와 같이
자신이 걸어가야 할 그 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어리석게 보이는 방법을 선택한 이들이
로마를 변화 시켰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우리는 힘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 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신 자신을 내어주는 원리
그리고 갈보리 언덕에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원리이다.
특별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러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
저 하늘에 계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모르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성경도 주님을 ‘우리의 연약함을 같이 겪으신 이’라고 말하고 있다. 히4:15
주님은 먼저 그 가시밭길을 걸어가시면서,
세상을 얻는 방법, 진정 세상을 이기는 방법,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얻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자기 버림, 희생, 섬김은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엇이나 아무 때나 구하는 대로 얻는 것을 믿음이라고 보는가?
믿음을.. 부적처럼, 혹은 신용카드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혹시 ‘힘’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 시키려고 하지는 않는가?
그것은 세상의 방법이다.
우리의 힘은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이 있지 않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다.
이것을 알았던 다윗은
비록 골리앗이 가지고 있던 칼과 창과 단검이 없음에도 그에게 달려갔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영향력이 엄청나게 줄어든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의 힘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힘을 추구하는 것, 그것은 세상의 방법이고, 죄의 특성이다.
나는 우리가 성공 혹은 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살지 않기를 원한다.
오히려 힘들고 먼 길이지만, 사랑과 섬김의 수고를 선택하며 살아갔으면 한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며 살았으면 한다.
한 순간의 기적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정해 주신 각각의 분령대로 살아갔으면 한다.
사람들의 눈에는 더디게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 자체가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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