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익숙한 사람 사53:3 블로그 스크랩, 출처
*원제목 : 8복 뒤집어 보기
◑‘의인의 고통 당함’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인간이 되신 것(성육신) 자체가 고통
성경은 예수님은 성육화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이 말씀 속에서 기독교 복음은 시작된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소식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이 사실을
너무 간과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리고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요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문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기도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전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신 후, 기도한 내용이다.
요17:1절을 보면 이 기도문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 라는 말로 시작된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고
기도했나 생각해 본다.
이 말은, 지금 예수님께서는 영화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전 생애가 고통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사셨다.
그런데 자신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땅히 누려야 될 영광을 포기하시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셨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신 33년의 기간이 고통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우리는 주로 예수님의 수난과 관련하여 마지막 1주간만 예수님의 고통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33년 전 생애가 고통 그 자체였다.
히5:7절을 보면
‘그는 육체로 계실 때에 자기를 능히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육체로 계실 때에’는 십자가를 지기 전의 시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일생 동안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는 말이다.
또한 이사야53:3절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간고’란.. ‘슬픔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man of sorrow
예수님은 ‘슬픔의 사람’이었다.
‘질고를 아는 자’를 영어성경은 familiar with suffering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고통에 익숙한 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고통에 익숙하셨다. 사53:3
존재론적으로 왕이신 그분이, 인간이 되신 것 자체가 슬픔이고, 고통이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죄가 가득하다는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죄가 가득한 곳에서, 의인이 그 죄를 보는 것 자체가 아픔이고, 슬픔이다.
그런데 ‘의인의 고난이.. 이 세상이 복을 받는 방법’인 것이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의인의 고통을 통해서 이 세상을 축복하시기로 결정하셨다.
의로우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으로.. 우리가 구원함을 얻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영광을 누리다가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영광을 포기하고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하나님은 의인 예수의 고통을 통해서 이 세상을 축복하신다.
나아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
그것은 ‘의인의 고난을 통해서’ 라고 말할 수 있다.
의로운 사람의 고난.. 이것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방법이다.
(이 단락에서 ‘작은 예수’인 우리 성도들도 염두에 두셔야 한다.
오늘날 세상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의롭게 살다보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무엇인가 올바른 결심을 하면, 이상하게 일이 더 힘들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왜 그런가?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악해서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통해서 막으려고 한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부터 보자.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이집트로 피신해야 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고, 사단의 시험을 받아야 했다.
3년 동안 천국의 복음을 외치는 동안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고통을 받으셨기에.. 우리가 구원함 받았고,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이전의 영화를 회복하였다.
즉, 부활의 영광도 거기에 반드시 뒤따라 온다.
◑적용
이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이러한 예수님의 삶이, 우리들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나는 오늘 마태복음에 기록된 팔복을 통해서 그 대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팔복을 보면.. 세상 복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이란 잘되는 것이다. 내가 영광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기록된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하는 8가지 특징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전혀 다른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다.
심령이 가난해 지고,
애통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왜 복인가?
정말 이것이 복일까?
오늘날 이런 복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떤 사람들은, 팔복을, ‘너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하나의 윤리적인 메시지로 본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본문이
‘너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본다.
그렇다면 이 팔복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즉, 성도는.. ‘고통 받는 의인이다’ 라는 뜻이다.
즉 본문은 ‘너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즉, 산상수훈에 기록된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라. 애통하는 자가되라.’가 아니라
‘너희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너희는 애통하는 사람이다.
너희는 온유한 사람이다. 너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다...
그런데 너희가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 를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팔복, 즉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하면서,
그 첫 번째 특징으로 ‘심령의 가난함’을 말씀하는가?
이것은 서두에서 말한 요1: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성육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셨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인간의 연약함, 즉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내려오셨다.
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경험하셨다. 히4:15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이 가난한 사람들, 아니 가난해 지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짊어지신 것처럼,
천국 백성은.. 이 땅에 이루어질 의를 위하여
스스로 가난해 지기로,
슬픔과 고통을 감당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왕궁에서 편안히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 민족의 회복을 위하여, 자신의 위치를 내려놓기로 결심을 한다.
이게 심령의 가난함이다.
▲기독교 복음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는 것이다. 빌2:5~6
이게 복음이다.
그런데 누가 이러한 것을 복음, good news라 하겠는가?
잘되는 내가 good news이고,
고지에 올라가는 것이 good news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되신 것이,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입는 것이 복이라고 한다.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복과는 다른 것이다.
세상이 말하는 복은 힘이다.
내가 잘되는 것도 힘이고, 내 직위가 올라가는 것도 힘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 힘을 버리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에 동참하는 것,
그것이 복이라고 말한다.
▲오늘 우리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 시대를 위해서 스스로 낮아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힘이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없다. 잘못된 복음에 속지 마라.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힘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마땅히 누려야할 힘을 포기 하고
스스로 가난함에 들어가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조차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힘 있는 자가 대접받는 곳이 교회가 아니다.
약한 자를 위해서 힘 있는 자가 자기의 힘을 버리는 곳이 교회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렇다. 스스로 낮아지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
왜?
이러한 우리들의 선택을 통해서.. 이 시대가 회복되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아는 사람들이다.
이 시대를 아파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있다고 하심으로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특성이 슬퍼함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자신의 문제로 인해 슬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이루어져야할 의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위해서,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서 우는 것을 말한다.
느헤미야를 다시 생각해 보자.
그가 슬퍼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나? 자기의 지위가 흔들려서? 아니다.
그는 자신의 것이 상실됨 때문에 애통하지 않았다.
그가 애통한 것은 이 세상에 있어야할 의가 없음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 애통한 것이다.
이게 진정한 애통이다.
이사야 53장에서 메시야는 ‘슬픔의 사람’이고 ‘아픔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 더 읽으실 분 ........................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애통하는 사람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스스로 낮아짐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나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와 시대의 문제 때문에 아파하지 않는다면
나의 본질에 대해서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던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산상설교는
당시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했던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이다.
‘너희가 정말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함이 있는가?’
만약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복된 자이다.
왜?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공동체와 시대를 아파하는 사람들이, 받아야할 위로는 무엇인가?
느헤미야를 보면,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에 대한 소식을 듣고 슬퍼했던 그가, 언제 위로를 받았는가?
무너진 성벽이 회복된 때이다.
그렇다. 우리가 눈물을 흘려서 만약 이 시대가 회복 된다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아끼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나의 낮아짐을 통해서 이 사회가 회복된다면
그것을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왜 아직도 이 시대가 이렇게 혼란스러운가?
그것은 누군가 나 대신 그 짐을 짊어지길 원하는 마음 때문이다.
내가 짐을 져야 한다. 공동체와 시대의 짐을 내가 지고가야 한다.
이 사회가,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만나서 복을 받는 다는 생각,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태도이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 때문에 이익을 얻을까 생각하지 마라.
어떻게 하면 나를 통해서 저 사람이 행복해 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
이게 진정한 복이다.
우리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자.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심령이 가난한 자인가? 나는 애통하는 자인가?
▶마5:13절을 보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성경은 우리들에게 소금이 되라고 하지 않는다. 소금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내가 맛을 내는 소금이냐 아니냐에 있다.
내가 맛을 내면 이 공동체와 세상이 산다.
그러나 맛을 내지 못하면 세상도 변화 시키지 못하고
나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이다.
소금의 특성이 무엇인가? 자기를 녹이는 것이다.
내가 녹아야 이 세상이 사는 것이다.
빛도 그렇다. 자기를 태우는 것이다.
나를 녹이고 태우는 것, 이것이 아픔이고 고통이다.
그러나 두려워 말자. 이게 복이다.
좁은 길처럼 보이지만 이 길이 진정 승리의 길인 것이다.
우리 성육하신 예수님처럼,
이 세상 속에 다른 사람을 위하여 슬픔과 아픔을 선택하자.
내 눈물, 내 한숨.. 흘릴 만큼 흘리고, 내쉴 만큼 내쉬어야.. 회복이 온다.
이게 바로 시편에서 말하는 울며 씨를 뿌리는 삶이다.
지금 내가 눈물을 흘려야 열매가 맺혀진다.
울음을 두려워 말라. 아픔도 두려워 말라.
오히려 당당하게 그 아픔과 슬픔을 선택하며 나가자.
이런 사람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다.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
'분류 없음 >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뗄 때, 역사가 나타난다 2920 (0) | 2011.03.17 |
---|---|
반전 反轉 2919 (0) | 2011.03.17 |
계2강 진통의 시작 2911 (0) | 2011.03.11 |
계속 성령을 받아야 하는 성경적 근거 (0) | 2011.03.11 |
십보라와 부아 / Eugene Peterson (0) | 2011.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