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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1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눈

LNCK 2011. 3. 26. 23:24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눈              행7:55~57             설교 스크랩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7:55~57


신자는 평생을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머리 둘 곳이 없더라도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의 최종 목표를 골고다로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땅에서 가진 것 모두 바쳐 주님의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좋은 의도이며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쉽게 간과해버리는 큰 약점이 있습니다.

스데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보지 못하면서,

십자가만 지려고 하니까.. 신앙생활이 늘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스데반은, 순교하기 전에, 돌 한방도 맞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먼저 보았습니다.


우리가 돌 맞아 죽어가면서 하늘 영광을 본 양 착각하는 것과는 달리 말입니다.


그가 하늘의 영광을 보노라고 말하자 사람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내 신앙의 최종목표지점도, 스데반과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설교, 전도할 때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돌에 맞아 순교할 것을 아시고,

이 또한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계획 속에 있음을,

당신의 영광을 그에게만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미리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변화산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내 눈에 ‘하나님의 영광’이 지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 내가 크게 감당할 사명이 없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요..)


▲또 생각해 볼 것은, 스데반은 평소에 천국에 대한 소망을 열렬히 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천국에서 주님과 맞대면 하는 영광을 누리고자

간절히 소원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천국을 실제로 엄청나게 사모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주님과 지셨던 것과 똑 같은”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기뻐하며 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내 삶에 충만하게 드러나게 해달라고 열망하면

십자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나는 혹시 십자가만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는 ‘환란’을 의미

그러나 원래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동반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눈에 하나님의 영광이 안 보이는 이유는,

내가 십자가의 한쪽(고난 쪽)만 바라보고 있거나,

아니면 내가 십자가를 아예 지고 가지 않는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과거의 상처를 ‘감사’로 보는 눈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에 발목이 잡혀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과거를 아름답게 보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어려서 아주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서,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늘 엄하고 무섭게 양육 받은 것이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나서’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니,

그 엄한 아버지 때문에.. 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되었고,

그래서 사회성이 계발되지 못했기에.. 더 혼자 연구하는 시간이 많게 되어서,

오히려 그런 ‘과거’를 감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아서, 늘 아픈 청소년도 마찬가집니다.

남들은 신나게 운동하며 놀 때, 그는 조용한 교회에 앉아서 기도하게 됩니다.

몸이 너무 아프니까요..


이제 어른이 되어 과거의 아픔(자기 질병)을 되돌아보니, 

그게 감사요.. ‘주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어려서부터 ‘기도훈련’을 받았던 것이지요..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에서 못 벗어나는 이유는,

자기 과거의 상처를.. 흉측스럽게만 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상처를 ‘감사’로 바꾸어 보십시오.


‘과거의 상처’라 할지라도,

거기에 감사할 꺼리는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니까요!


문제는 우리가 ‘후회 꺼리’만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감사'로 보기 시작할 때

어쩌면 그 상처를 치유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징계를 인정하는 눈         단9:11~12


“참으로 온 이스라엘이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주님의 율법을 어기고 벗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벌과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큰 재앙을 내리셔서,

우리와 우리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에게 하신 (성경의) 말씀들을 이루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내린 것과 같은 재앙은, 하늘 아래 그 어느 곳에서도 없던 것입니다.” 단9:11~12


다니엘이 우리와 다른 위대성은, 그가 하나님을 더 깊이 정확히 알았다는데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재앙을 내려 벌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큰일(큰 역사)’이었다고 고백했지 않습니까? :12 그런 뉘앙스입니다.


이스라엘이 당신께 불순종하며 우상숭배를 하고 죄악으로 타락했기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 요컨대 큰 벌을 주셨기에.. 그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이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뉘앙스입니다.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


우리가 그의 이런 고백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 수십 년 동안 해 오면서도,

이런 고백을 진심으로 한 번 드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고백도 중요하지만,

(요즘 찬양과 경배 시간에 이런 ‘높이는’ 고백을 종종 합니다.)

징계로 받은 재앙을 두고서, 동일한 고백을 한 자는 다니엘뿐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하루에 세 번씩 그쪽을 바라보며 창문을  열어놓고 뜨겁게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루살렘에 이런 큰 재앙을 내린 것이

바로 하나님의 너무나 거룩하신 위대함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그처럼 제대로 실감하십니까?

또한 우리와 다른, 다니엘의 위대함을 이제 조금 이해되십니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슷합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은 기적으로 현실 문제가 해결되면

날아갈 듯이 기뻐하며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조금만 힘들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좋은 일에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게 큰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주께서 내게 하신 성경의 경고 말씀을 이루셨으니

내 인생에 이만큼 크게 복되고 은혜로운 일이 없으며

또 하나님 같이 위대한 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저의 모든 감사와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합니다.” 단9:12참조


언제 어디서 아무리 힘든 환난을 만나도.. 이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다니엘의 믿음과 기도를 본받은 사람입니다.                  ▣ 예화, 조각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