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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이 올바르면

LNCK 2011. 4. 2. 14:59

◈중심이 올바르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믹6:6~8          11.02.27. 설교스크랩, 축약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외모로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외모는 얼굴 생김새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

즉 그 사람의 학위, 재산, 명예, 직위, 인격, 선행 등이 다 외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중심을 보시고 그 사람을 평가하십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그 사람의 동기를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고 중심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중심에 관심을 가지고 중심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심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중심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동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2) 겸손



◑첫 번째는 동기입니다.


동기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욕심, 명예욕, 권력욕, 야망이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가 부흥을 원하고, 집회에 바쁘게 다니고, 은사와 능력을 구하는가?’

하나님은 그 동기를 보십니다.


다윗은 중심(동기)이 바른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에게 덤빈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中心이 올발랐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서 달려가면서 한 말이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나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보셨을 때 다윗 속에 있는 올바른 동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중심을 보셨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내 뜻을 다 이루게 하겠다.” 행13:22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렘3:15


왜 이런 축복을 다윗에게만 주셨을까요?

아마 이렇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은 받지만.. 나중에는 다 변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직 중심이 바른 사람만 끝까지 갑니다.

말씀 잘 알고, 기도 많이 하고, 능력 받고, 인격이 훌륭한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언젠가는 넘어지고 변질되어서..

알맹이(중심)는 빠져나가고.. 겉모양만 남습니다.

그러나 중심이 바른 사람은.. 세월이 지나도 알맹이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심이 바른 것이 사활적,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사울처럼 왕이 되기 전에는 겸손하나 왕이 되고 나면 교만해집니다.

은사 받기 전에는 겸손하나 받고 나면 교만해집니다.

성공하기 전, 장로, 권사 되기 전에는 겸손하나 성공하고,

장로, 권사가 되면 교만해집니다.


목회자는.. 교회가 부흥 전에는 겸손하나, 교회가 부흥하면 교만해집니다.

이것이 중심이 바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일, 즉 변질되는 것입니다.


중심이 바르지 않은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변질됩니다.

중심이 바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서 서서히 변질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수많은 목회자, 신학자, 신자들에게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중심이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된 후에도 돈, 명예, 권력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그가 추구했던 것은 <오직 한 가지>이었습니다.

“전에 구했던 한 가지를 다시 구하리니, 여호와의 전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27:4


그리고 왕이 되기 전이나, 후에나.. 오직 양떼를 치는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시78:70~72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양을 지키시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돈이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내 인생의 초점을 맞추지는 마십시오.

명예가 소중한 것이지만, 거기에 내 인생을 올인 하지는 마십시오.

권력도 매력적인 것이지만, 내가 더 매력을 느껴야 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돈이 벌리든지/안 벌리든지

명예가 뒤따라오든지/안 따라오든지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 분이 아끼시는 ‘양떼를 먹이고, 치는 일에 전념’ 하는 사람은..,


다시 말해서 중심이 올바른 사람은,

오늘날에도 다윗과 같은 약속을 받을 것입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내 뜻을 다 이루게 하겠다.” 행13:22


“그런데 다윗이 범죄하지 않았습니까!”

범죄와 변질은 다릅니다.

변질은 하나님 앞에 중심이 바르지 않게 되는 것이고,

범죄는 유혹을 받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보기에는 같은 죄로 보여도

어떤 사람은 버리고, 어떤 사람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이 바른 사람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돈, 명예, 권력, 쾌락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만족하고 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심이 바른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을 살핍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변명하지 않고 인정했습니다.


중심이 바른 사람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하나님을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옵니다.

이것이 중심이 바른 자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중심이 바른 사람을 선택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중심이 바르지 않은 자들은 부, 승진, 명예, 권력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돈, 명예, 권위, 성공이 그를 변질시켜 버립니다.

중심이 바른 사람만이 변질되지 않고 끝까지 자기 길을 갑니다.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


중심이 바른 것은.. 사랑과 겸손입니다.

주님은 그 두 가지를 보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사랑과 중심을 보시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서 정말 보기를 원하는 것은

그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가 진실로 겸손한가.

이 두 가지입니다. 둘은 상호보완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5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양들을 맡기시기 위해서, 사도로 세우시기 위해서

주님이 물어보실 때,

“설교 잘하느냐? 믿음이 크고 능력이 나타나느냐, 충성되게 할 수 있느냐?”

이런 것을 물으시지 않고


집요하게 3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 한 가지만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제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니까

“됐다. 합격이다. 다른 거 볼 것 없다. 됐다.”

그 다음에 “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게 주님이 보시는 것입니다. 이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심입니다. 뭐라고요?

‘예수님을 사랑해서 양떼를 먹이는 것’입니다.

‘내양을 치라’는 .. ‘내양을 먹이라 feed my sheep’는 뜻입니다.


오늘날, 양떼가 꼴을 충분히 먹고 있는지/없는지.. 관심 없는 목자가 있다면,

또한 양떼에게 지속적으로 좋은 양식을 공급하는 책임감이 없는 목자가 있다면,

-그 중심이 올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 중심이 올바른 베드로 같은 목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므로, 양떼를 열심히 먹입니다!’

그 일에 늘 관심을 갖고, 매일 매시간 힘씁니다.

그 일에 자기 인생의 사활을 겁니다.


(그런데 중심이 올바르지 못하면, 자꾸 뭘 크게 벌이려고 합니다.

자꾸 사람들 불러내어, 북적거리게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사랑과 겸손이 왜 상호보완적인가 하면,

위에서 베드로 사도에게서 보듯이,


주님을 사랑해서, 양떼를 먹이는 일이.. 자기가 할 일이지만,

자기를 통해서, 자기 속에서, 주님이 하실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주도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겸손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16:9


하나님의 눈은 온 지구를 두루 살피면서 그런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성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 마음이 자기에게로 향합니다.

내 지혜, 내 지식, 내 재능, 내 학벌, 프로그램, 수단, 노력, 인격!

이것 가지고 목회하는 사람들 너무 많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게 다 교만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눅10:21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것은 교만의 의미로, 어린아이는 겸손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왜 지혜와 슬기가 교만의 의미로 쓰였는가요?

자기 지혜를 의지하기 때문에, 자기 슬기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노력이나 성실성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교만입니다.


왜 어린아이는 겸손한가요? 어린아이는 자기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의존적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밥 먹는 것, 옷 입는 것, 생활하는 것 모든 면에서 부모에게 의존적입니다.

그게 겸손입니다.


미가 6:6~8절 말씀에서, ‘겸손’이  또다시 재 확증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1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먼저 기본적으로 요구하신 게 뭐예요? ‘공의를 행하는 것’.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여기 머물렀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여기 머물렀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거 원하십니다. 우린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깊은 게 있습니다.

그것은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1서 4:20절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다.” 그랬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게 ‘바리새인의 의’를 뛰어넘는 수준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게 뭐예요?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의를 행해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사랑이고 겸손입니다. 이것이 중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언행을 단순히 보고 계신 게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보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그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중심이 뭡니까?

중심은 마음의 깊은 곳입니다. 마음의 속이요, 뿌리입니다.

그 마음의 뿌리는 하나님을 사랑,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게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겸손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바로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나가면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와 씨름해야 합니다.

단순히 화를 내지 않는 것, 덕을 끼치는 것보다,

(물론 그런 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야 하지만),

정말 하나님의 눈에 발견되고 쓰임 받으려면.. 근본적인 문제와 씨름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중심이 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살필 때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실천하나, 거룩하나, 순종했나? 이런 것만 살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높아졌나, 내가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 있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 교만한가, 겸손한가? .. 이것을 근본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에 있어서 깊은 회개를 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면서

“주님, 제 동기를 바로 잡아주시고, 제 동기를 깨끗하게 해주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양떼를 먹이는 목자가 되게 해주소서.

그 외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사랑이 있어도, 기름부음이 있어도,

은사가 있고 능력이 있어도, 열정이 있어도,

그 사람에게 깊은 주님을 의지하는 겸손이 없으면,

그가 설교할 때 실제적으로 주님이 같이 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임재가 있는 것이지, 실제적으로 주님이 같이 하지 않습니다.

치유사역을 하던지, 예언사역을 하던지, 무슨 사역을 하던지

실제적으로 주님이 같이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집회들을 참석해보면, 굉장히 말씀이 은혜로울 수도 있고,

굉장히 예언이 정확할 수도 있고, 굉장히 치유가 강력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

또는 굉장히 영적인 현상이 동반될 수도 있는데...

집회를 참석하면서 마음이 공허해집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사가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강사가 교만하면.. 주님의 임재가 없습니다.

아무리 은사가 뛰어나도.. 겸손이 빠져있으면.. 심령이 메말라집니다.


여러분이 집회를 참석할 때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정말 겸손하면

말씀이 단순히 빛과 같이 임하는 게 아니고,

모세가 말한 것처럼 가는 비와 같이 임하는 것입니다.

아침 이슬같이 심령을 촉촉하게 적시면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면서 비와 같이,

이슬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봄비같이 임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소낙비같이 임하실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실제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실제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성장할수록

점점 욕심이 없어지고 본질적인 것에 관심이 갔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겸손해지고, 정결해지고, 주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그것은 중심이 바른 사람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중심이 바른 사람이 되면,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다른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전에 구했던 것,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여전히 집중했습니다.


저는 교회가 성장할수록 점점 욕심이 없어지고, 점점 주님을 사모하게 되고,

더 겸손을 원하고, 주님께 더 인정받는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내게 남는 것은 주님의 인정뿐이다. 주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뿐,

내 속에서 이뤄지는 주님의 형상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자꾸 그런 마음으로 견고해지고, 더 순수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