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15~20 11.03.06. 설교일부스크랩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15~20
◑사람에게도 덕을 끼치는 성령의 열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20
이 열매는.. 여러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갈5:22~23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는 이런 열매들을 통해서만
그가 참 하나님의 사람인지, 거짓된 사람인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말씀, 계시, 나타나는 신유의 은사만 가지고는 그를 알 수 없다.
그가 참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오직 열매를 통해서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열매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저는 평소에, 갈5장의 '성령의 9가지 열매'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위한 열매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열매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드시는 열매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과일들을 즐기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맺는 사랑/희락/화평/오래 참음과
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이런 열매들을 받으시고, 기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본문을 읽을 때, 문득 제게 강력한 마음의 확신이 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일 뿐 아니라, 그것은 사람들을 위한 열매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열매로.. 영적인 분별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씀, 계시, 은사가 있어도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성도들이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종들이 나타내는 말씀, 예언,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사랑/기쁨/화평/오래참음 등의 9가지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회나 예배에서
성도들에게 그런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고,
강사가 자기 혼자서.. 무슨 자랑을 하든지, 과거에 일어났던 큰 기적을 간증하든지..
그렇게 해서 자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을 하는데..
듣는 회중에게 허전함/공허함/괴로움이 있다면.. 아닌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을런지 모르나, 현재는 아닌 것입니다.)
성도들은 단순히 말씀, 예언, 치료의 역사만을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올바른 성령의 역사일 때는,
모든 회중에게 ‘성령의 9가지 열매’ 사랑/기쁨/화평/오래참음... 등이 맺어져서,
모두가 마음이 따뜻해지고, 훈훈해지는 것입니다.
-강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사심 없는 진정한 사랑,
-강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순결하고 그윽한 평화, 오래 참음, 자비, 선함,
-과장하지 않고, 충성되고, 믿음직스러운 것
-강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절제(그가 자기를 높이지 않는 것)
성도들이 그것을(성령의 열매들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성령의 9가지 열매)을 기뻐 받으실 뿐 아니라
집회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그 '성령의 열매'들을 나눠먹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두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를 하나님과 더불어 먹으면서,
그래서 교회는 자꾸 잔치 집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잔치하는 집(교회)요,
말씀의 떡과 성령의 포도주가 항상 준비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가 모일 때마다 성찬을 나누었던 것처럼,
우리도 말씀의 떡과 십자가 피의 포도주가 항상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예배로 모일 때마다 단순히 말씀, 계시, 치료의 은사를 먹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에는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반드시 나타나서, 그 열매를 모든 성도가 함께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마음에 훈훈함, 따뜻함, 은혜, 오래참음 (9가지 열매)
등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말씀을 잘 쪼개도..
아무리 신비한 비전과 환상을 위에서 받았다 할지라도..
아무리 놀라운 신유의 은사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지금 주제는.. '성령의 역사'를 우리가 분변하자는 것입니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우리 마음속에 기쁨, 평강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래 참고 온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것들을 생각하고 절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심, 이기적인 것, 정욕, 탐심, 명예욕 같은 것들을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강 같은 평화, 그윽한 평화가 우리 마음속에 깃드십니까?
그가 시행하는 사역은.. 참된 성령의 사역이 맞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영분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했을 때
하나님만 그 '성령의 열매'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회중들도 모두 그 '성령의 열매'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기쁨과/ 즐거움과/ 평화고,
-하나는 불안함과/ 두려움입니다.
▲2가지 상반된 측면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 평화, 기쁨, 즐거움이 느껴집니다.
-또 이사야가 느꼈던 것처럼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그분 앞에 합당하지 않고 교만한지,
얼마나 온유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고, 사랑이 부족한지,
우리가 얼마나 그분에 대해서 경외심이 부족한지를 느끼게 되어서 불안해집니다.
그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워집니다.
-제가 강단에 올라오기 전에
성령의 강력한 기름부음과 자유와 기쁨과 평화가 제게 임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단에 올라오니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교만하고 온유하지 못한가?
내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하고,
얼마나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부족한가?
내가 이 정도의 임재에도 불안을 느낀다면
정말 주님께서 내게 강력히 나타나시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주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앞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부흥이 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부흥이 올 때는..
사람들이 경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흥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사람들이 통곡하며 거꾸러져서 밤새도록 울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종 한쪽(경박한 기쁨, 웃음, 행복)만 강조하는 것은
그것 역시 ‘참된 하나님의 임재’가 아닌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임재에는.. 2가지 상반된 면이 같이 나타나야 합니다.
<기쁨>과 동시에 <경외함>입니다.
▲제가 주님의 새로운 임재를 느끼면서, 제 자신이 정말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내 자신이 정말 부적격하고 준비가 많이 되지 않았구나.’
저는 주님의 임재가 평화, 기쁨만 가져다준다고..
너무 한쪽 측면으로만 치우쳐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주님, 저의 겸손과 온유가 너무 천박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경건이 너무 깊지 못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제게 너무 부족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임재를 강력하게 느끼지만.. 불안감을 느낍니다.”
주님의 임재는 반드시.. <기쁨과 찬양>이..
<겸손과 경외심과 거룩>과 함께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는 반드시 <즐거움의 축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함께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2가지가 다 있습니다.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하실 때, 줄을 쳐놓고
모세 외에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돌격해서 그들이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합당한 사람으로,
정말 부흥이 오면, 부흥에 합당한 사람으로.. 우리가 준비되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제 자신이 부족하고, 부적격하다고 느낍니다.
‘주님의 임재 앞에 나는 얼마나 부족한 자인가?
그리고 주님 앞에 깊은 겸손, 사랑, 온유, 거룩,
아버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정말 깊이 구해야 하겠구나.
진짜로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가 내게 올 때
내가 거기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무조건 기쁘게, 즐겁게 신앙생활하다가 (경박하다는 뜻)
입술로 ‘주여 임재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임재가 여기에 나타났습니다.’ 하다가
진짜 임재가 나타나면.. 다 죽습니다. 임재가 없으니까, 다행인 것입니다.
(그게 진짜 다행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참된 임재가 나타나도, 우리가 무사할 수 있도록,
아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주님의 임재가 충만히 나타나시도록,
간절히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분류 없음 >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의 거울, 광야의 이스라엘 (0) | 2011.04.12 |
---|---|
사1:2~4 아버지의 탄식 소리가 들리는가? (0) | 2011.04.06 |
중심이 올바르면 (0) | 2011.04.02 |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눈 (0) | 2011.03.26 |
1907년도와 1970년대 기독교의 차이 (0) | 2011.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