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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그 결과로 따라오는 것
◑천국이 신앙의 목적이 될 때 출처
오늘날 우리가 흔히 듣는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요약 된다.
이제 한국 사람이라면, 교회에서 전하는 메시지의 중심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익숙한 메시지가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핵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성경이 예수 믿는 자에게 '천국'을 약속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천국이 신앙의 목적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부분은
눈 씻고 찾아도 발견할 수 없다.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매우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성경은, 천국이 신앙의 결과이지, 신앙의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필자는 천국을 목적으로 여기느냐, 결과로 여기느냐는 따지는 것인지 아시겠는가?
말장난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신앙의 목적으로서 천국과 신앙의 결과로서 천국은
완전히 다른 종교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이 신앙의 목적이 되면, 목적론적 윤리체계가 자리를 잡게 된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 구원관이 아니라, 철학적 구원관이 된다는 것이다.
목적론적 윤리가 무엇인가?
행복이라는 최종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무엇인든지 선(善)이 된다는 논리 구조이다.
이런 논리 구조는 자동적으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
다시 말해서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 구조로 말미암아 18세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자기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정당성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어야 했고,
그 파장은 전 세계에 피의 혁명이라는 붉은 쓰나미를 일으켰다.
자기 행복을 위해서 남을 죽이거나 피해를 입히는 것은
목적론적 윤리주의자들에겐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 행복이 곧 최고의 선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목적론적 윤리가 종교 안에 들어오는 방식이
바로 천국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종교의 역사를 보면 천국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게 될 때
18세기 피의 혁명과 동일한 현상을 동반했다.
어떤 종교든지 천국이라는 행복(최고의 선)을 추구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첫 번째로 중세 로마 가톨릭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은 천국이라는 '상품'을 어느 종교보다 잘 활용한 대표적인 종교다
그들은 천국이라는 상품을 통해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남자와 어린 아이를 불문하고 전쟁에 동원하는데 최고의 수단이 됐다.
왜냐하면 가톨릭은 이 전쟁 참여하는 자들은 예외 없이
'모든 죄가 용서 받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은 연옥이라는 지옥(간이지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입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천국을 상품화 한 사기극의 극치가 바로 그 유명한 '면죄부'였다.
면죄부는 이 땅에서 불법과 죄악과 방탕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최고의 상품으로 추대를 받았다.
특히 당시 상당수의 사람들이 정부(情婦)를 두고 있었는데,
면죄부는 최고의 상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천국을 목적으로 여김으로써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또 하나의 종교를 소개하겠다.
그것은 바로 이슬람교이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이슬람의 자살 테러는
천국이 상품이 된 대표적인 또 다른 사례이다.
이슬람의 자살 테러는 자신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 하는 극치를 잘 보여준다.
이 모습은 어쩌면 중세 가톨릭의 십자군 전쟁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려면 이슬람의 구원관을 알아야 한다.
이슬람에서 천국은 7단계로 나눠진다.
부끄러운 구원은 가장 밑바닥 천국에서 영생하고,
가장 숭고한 구원은 최고층인 7단계의 천국에서 영생한다.
꾸란에 의하면 이 최고층의 천국에 들어간 남자들은
최고의 미녀 72인과 영원토록
최고의 음식을 먹으며 성적인 쾌락을 즐기며 산다고 한다(꾸란 56:35).
그러면 무슬림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알라의 명령을 철저히 복종하는 것이다.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기 가족들 가운데
꾸란의 명령을 어긴 사람에게 대하여
명예 살인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복종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복종을 한다고 해도, 천국에 간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 땅에서 아무리 선행을 하고 알라의 뜻에 복종을 했다고 하더라도
알라의 마음에 든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최고층의 천국에 갈 수 있는 확실한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꾸란3:158, 169을 보면 무슬림이 최고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하드(聖戰)에서 순교하는 것이다.
이 교리 때문에 많은 무슬림들이 자기 몸에 폭탄을 두르고 자살 테러를 감행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기독교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렇게 천국을 상품화 하는데
다른 어떤 종교 못지 않게 열을 올리고 있다.
천국이 목적이 된 교인들은 무모해지고, 몰상식해지며, 과격해진다.
이런 신자들에게 거룩함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천국(영원한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거액의 헌금과 광적인 헌신, 종교적 테러도 불사한다.
이런 모습은 부메랑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교회 안에 가만히 침투한 이단이
기성 교회보다 더 확실하게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면
그 즉시 개종해 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타 종교와의 통합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떻게 믿든지 천국에 가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목적론적 종교관이
기독교 안에서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소교리문답 제1문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신앙의 목적이 여기에 초점이 맞춰질 때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사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2문에 해당하는 질문이다.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소교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할 것인지를 지시하는 유일한 규칙입니다.’
그렇다. 신앙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신앙은 자연스럽게 성경(진리)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 되는 것이다.
신앙의 목적이 성경적으로 규정될 때
기독교는 비로소 다른 타종교와 구분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과 소망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이 시대의 기독교가 가장 시급하게 개혁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것이다.
즉 신앙의 목적이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사고부터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회복하지 않으면, 어떤 개혁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가톨릭에도 구원이 있는가? 출처
▲가톨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람들에게 흔히 나오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가톨릭에도 구원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게 될 때, 사람들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우리가 이 질문을 받게 될 때마다 고민하게 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일차적으로는 가톨릭의 교리가 성경에 없는 미신적 교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교황 무오설, 마리아 숭배사상(마리아 원죄 없이 태어남,
마리아 승천설, 마리아의 중보설 등등),
성자들의 공덕을 힘입어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 등등
그 밖에 지적할 것들 투성이다.
이것들로만 봐서는 결코 구원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이유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것은 외면적으로 볼 때 가톨릭 안에서도 구원받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로 말미암아 제임스 패커 박사도 가톨릭과의 연합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톨릭 안에도 구원이 있느냐는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떤 대답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성경적 대답은 사실 너무도 명쾌하고 간단하다.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기 위해서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질문 자체가 옳지 못하다는 점이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참된 교회를 묻는 질문은
구원의 여부로 출발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구원 여부에 대한 질문은, 사실 하나님의 주권에 어느 정도 감춰진 영역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과 섭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잘 모른다는 뜻인 듯..
따라서 하나님은 미신적인 요소가 가득한 가톨릭에서 조차도
마틴 루터를 구원하신 것처럼, 구원하고자 하는 자를 주권적으로 구원하실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어떤 교회가 비성경적인 상태에 있을지라도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게 되는 것과 같다.
여기에는 사람이 잘 했다거나, 교회가 옳아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들에게 ‘가톨릭에도 구원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먼저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가톨릭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합당합니까?’
라고 질문해야 한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존재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방식에 불과하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표현처럼
구원은 ‘종속적(subordinate) 목적’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궁극적(ultimate) 목적’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다보면, 구원은 따라온다는 뜻인듯)
우리가 이 관점을 회복하지 않게 된다면
교회는 수없이 출몰하는 많은 이단에 대하여
자꾸 미묘한 구원의 여부를 가지고 논쟁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을 두고 본다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은, 객관적으로 측정이 가능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의 회복은, 순교의 문제에서도 명쾌한 대답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성도들이 순교의 순간에 있다고 하자.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려주고, 부인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이 구원의 여부 가지고 갈등을 하게 된다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한다고 해서
구원이 박탈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구원이 행위가 아닌 믿음에 있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의 관점에서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타협을 선택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외적으로는 예수님을 부인해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면 그만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가 바로 일본 제국주의 시대 당시,
신사참배 문제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하나님의 영광 문제로 해석하면 간단하다.
즉 구원 여부를 떠나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신사참배를 허용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라면 선택해야할 것은 분명해지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갈등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를 선택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믿음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의 문제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두 개의 딜레마는 다 해결된다.
▲교회사에, 교회가 타락하거나 '이단'(주요 교리를 부인하는 명백한 이단을 뜻함)이 득세 할 때의 특징이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개인의 구원에만 관심을 갖게 될 때
교회는 타락하고 이단은 득세했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든지 건강한 교회는 구원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갖게 될 때
교회는 자동적으로 부흥하고
구원받는 자의 수가 날마다 더해지게 되었다. 행2:43-47
여기엔 예외가 없었다.
모세나 바울은 이 사실을 아주 잘 말해준다.
그들은 분명히 구원을 열망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것도 불사했던 것이다. 출32:32, 롬9:3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간
그들의 구원 여부는 너무도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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