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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의 묵상 3편

LNCK 2011. 6. 24. 09:49

◈일상 속의 묵상 3편                         출처보기

 

◑1. Jesus Discount                        마5:39~41

 

오래전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자동차에 작은 이상이 생겨서

교회에서 알게 된 한 집사님이 경영하는 카센터에 갔다.

교회 밖에서는 처음 뵙는데도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자동차의 문제도 잘 지적해 주셨다. 역시 크리스천이라 다르구나 싶었다.

자동차 수리가 다 끝난 후에 돈을 치르려고 하는데

저를 보고 ‘목사님이니까 디스카운트를 해드린다’고 했다.

 

이런데서 목사가 된 덕을 보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청구서를 받아 보았다.

거기에는 여러 조목과 함께 총액이 나와 있고

마지막에 디스카운트하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Jesus Discount".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풀어보면 예수님 때문에 할인해 주는 액수라는 것이다.

 

싸구려 부품을 넣었기 때문도 아니고, 정비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니고,

좋은 부품을 사용하고 최상의 서비스를 했지만

예수님 때문에 나에게 할인을 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받는 혜택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 표현이 인상적이어서, 좀 더 깊이 묵상을 하게 되었다.

 

그 분이 나에게 해 준 "Jesus Discount"는

사실 나를 크리스천의 한 사람으로서 대접해 주는 표현이었다.

그 분은 아마도 자기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와 비슷한 디스카운트를 해 줄 것이다.

 

그 분이 예수를 믿는 덕분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디스카운트의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문득 크리스천들이 이런 식의 디스카운트를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보여 줄 수 있다면

정말 우리 주님이 영광을 얻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상수훈의 Jesus Discount>

 

산상수훈은 바로 이런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보여줄 수 있는

Jesus Discount를 가르치고 있다.

이것을 직장생활에서 실천한다면 정말 멋진 크리스천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첫째, 대인관계에서의 Jesus Discount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5:39)"

 

오른편 뺨을 맞게 될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뺨을 때린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

왼 뺨을 돌려댄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내 잘못도 아닌데 큰 소리로 욕을 해대는 상관에게

왼편 뺨을 돌려대기가 쉽지 않다.

일은 제대로 못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동료를 보고 웃는 얼굴을 보여 줄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용납하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 직장인들이 보여주어야 할 Jesus Discount이다.

 

둘째, 물질문제에서의 Jesus Discount이다.

"또 너를 송사 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5:40)"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요즈음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다.

법을 이용하든지 아니면 다른 술수를 써서라도

내게 손해를 끼치려는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정말 어렵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라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Jesus Discount이다.

 

물론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주님이 강조하는 것은

물질 문제에서 자유로울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바울처럼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빈궁에 처할 줄도 알아

자족하는 비결을 배우게 될 때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이 가능해 진다.

 

셋째, 일 문제에서의 Jesus Discount이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1)"

 

직장생활에서 가장 짜증나는 일은

남보다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일을 하게 되는 경우이다.

다들 퇴근하는데 나만 남아서 일을 하게 될 때, 기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어떤 핑계를 대서든지 억울한 일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 일이 아닌 일도 기꺼이 떠맡으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직장에서 Jesus Discount를 실천하는 길이 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는데(고후3:3)

아마도 오늘날 우리들에게 빗대어 말한다면

오늘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계산서'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다양한 계산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우리들 생활 속에서 여러 종류의 계산을 보고 우리를 평가한다.

 

아무리 신앙인임을 자처해도, 우리의 삶이 이기적인 계산으로 가득 차 있으면

예수님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 계산서에 Jesus Discount난이 있고

그 난에 적어 놓은 액수가 풍성할 때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풍성한 삶이 된다.

 

직장은 우리가 Jesus Discount를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이다.

내 삶의 계산서의 Jesus Discount는 얼마나 될까?

 

 

 

◑2.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                      살전4:12

 

우리의 전통적인 말 중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다.

우리 옛사람들의 직업관과 재물 관을 보여주는 말이다.

지금도 종종 사용하는 말로서 얼핏 들으면 멋진 말인 것 같지만

성경적으로 따져 보면 양면성을 지닌다. 

 

“개 같이” 버는 것을 부정한 일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야기이다.

부정하게 번 돈은 아무리 좋은 일에 사용해도 깨끗해지지 않는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23:18)”

 

크리스천으로서 떳떳하지 않은 일을 해서 번 돈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해도

그 돈이 거룩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더구나 떳떳하지 않은 일을 포장하기 위한 헌금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다.

 

그러나 “개같이”버는 것을 우리 사회에서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 이른 바

“3D업종”에 종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dangerous, dirty, difficult

 

이 말은 아주 성경적인 말이 된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4:12)”

 

크리스천들이 경제적으로 무책임한 것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책임을 지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이 비록 사회에서 별로 존경이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라도 괜찮다는 말이다.

 

크리스천들에게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그런 일도 주께 하듯 성실하게 일해서 돈을 번다면

그 돈은 이미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한 돈이 된다.

 

물론 그 돈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면

당연히 정승같이 쓰는 것이 되겠다.

 

사실 할머니가 김밥을 팔아서 번 돈을 장학금으로 기탁했다는 신문기사를 접할 때마다

그 분이야 말로 정말 돈을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셨다고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요즈음 우리 사회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청년 실업”인데

엄밀히 따지면 이 말은 청년들이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안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들 돈 많이 버는 일, 사람들이 알아주는 일,

장래에 안정이 보장되는 직업들에 몰리다 보니까 할 일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돈을 덜 벌더라도, 조금 불안정하더라도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고,

경제적인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일에 일단 뛰어 들었으면 좋겠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크리스천들도 사회의 보편적인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크리스천 젊은이들에게

그런 의미에서 “개같이 벌라”는 도전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렇게 이 말의 양면성을 생각해보니 크리스천의 자세가 분명해진다.

도덕적인 면에서는 결코 개같이 벌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나 사회의 통념적인 면에서는 개같이 벌어야겠다.

 

 

 

◑3. 관심과 간섭

 

어린아이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기질에 따라 관심의 방향은 차이가 있지만, 모두가 다 사람들의 관심을 원한다.

 

어린아이뿐 아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관심을 써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이렇듯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복잡한 생활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웃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반면에 요즈음 사람들은 남의 간섭을 귀찮아한다.

특히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사사로운 일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요즈음 아이들도 어른들의 간섭을 귀찮아한다.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할 때 자기의 삶을 지키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쓸데없는 간섭을 하지 않는 것도 이웃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관심과 사람들이 귀찮아하는 간섭이 혼동될 때가 많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인관계의 갈등은

이 두 가지를 혼동하거나 둘 사이의 균형을 찾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잘 이해하고 적절하게 실천하는 것이

대인관계를 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우선 관심과 간섭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사막의 수도사에 관한 책을 읽다가 이 둘 사이를 아주 잘 구별해놓은 글을 보았다.

 

“관심과 간섭은 다르다.

관심은 남의 연약함과 상처를 치료하려는 마음에서 생긴 배려이지만

간섭은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배려에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간섭에는 아픈 상처와 갈등이 남겨진다.

수도사들은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간섭이 되지 않도록 특별히 경계하였다.”

 

이 정의에 따르면 관심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며

결과적으로 상대방에게 유익을 끼치는데 비해

간섭은 자기 욕심에서 나오며 결과적으로 상대방에게 해악을 끼치게 된다.

 

관심과 간섭은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은 비슷해 보이지만

동기나 결과가 정반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될 때

항상 사랑으로 하는 것인지,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에게 유익을 끼치게 될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원치 않는 간섭을 하지 않고 사랑의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관심과 간섭의 균형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사랑의 관심을 가지면서 그것이 간섭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반대로 간섭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아마도 크리스천의 이웃사랑은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된다.

 

부부간에 서로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자.

그러나 아무리 부부라 할지라도 개인의 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도록 하자.

 

자녀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자.

그러나 아무리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해서

지나친 간섭을 하지 않도록 하자.

 

교회 성도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자.

혹시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나 돌아보는 사랑의 관심을 갖자.

그러나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사람을 향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관심의 폭을 넓혀서

그들을 돕고 위해서 기도하자.

그렇지만 남의 사생활에 호기심을 가지고 쓸데없는 간섭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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