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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1

소그룹을 통한 교회 갱신

LNCK 2011. 7. 8. 22:37

◈소그룹을 통한 교회 갱신                                               출처, 정리

                .. 필립 야곱 스페너를 중심으로


 

17세기에, 독일의 루터교회가 영적으로 잠들어 가자,

그런 상황을 타개하고, 개혁운동을 일으킨 주인공이 필립 스페너 인데,

그의 특징은.. 신앙적으로는 <경건주의>요,  말 그대로 경건하게 믿고 살자..

실제 행동적으로는 <소그룹, 작은교회 운동>이었습니다.

            오늘날 강조되는 구역/셀그룹/목장(교회)의 기원이 필립 스페너 이었군요.


오늘날 우리 상황에서, 많은 분들이 문제점을 지적하시지만,

실제로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그러나 필립 스페너는, 17세기 독일의 상황에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고, 실행에 옮겼던 위대한 분이군요.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정답'이란 뜻은 아닙니다.) /편



◑필립 스페너와 경건주의 운동의 태동   주1)

 

▲경건주의란? 敬虔主義, pietism 

17세기 말경 독일 루터파 교회의 정통주의적 형식화 경향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프로테스탄트적 종교운동.

 

필립 야곱 스페너 (1635~1705)와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가 주창하였다.

 

스페너는 영국의 퓨리턴(청교도)과 제네바 개혁파(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아

1675년에「Pia desideria 경건한 열망」을 저술,

그리스도교는 지성보다는 심정의 열정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당시 루터교회의 지성주의를 공격하였다.


경건주의는 교회에 전면적인 개혁을 가져오지 못하였으며

그 결점은 개인주의에 기울고, 조직을 키우지 않았는데 있었으나,

루터파 신학의 약점을 드러내고 18∼19세기 신학 부흥에의 길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성서주의, 엄격한 경건생활, 도덕의 실천 등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스페너는 1686년에 프랑크푸르트를 떠났다.

드레스덴의 궁중 수석 설교자로 청빙 받았던 것이다.


드레스덴은 작센주의 선제후 요한 게우르그 3세가 거주하는 도시, 곧 작센주의 수도였다.

당시의 독일 루터교 조직에서 작센주는 선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레스덴 궁의 수석 설교자 자리는, 루터교의 목사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그러나 이렇게 ‘영전‘하여 가면서도 스페너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한 경건주의 운동이 자신이 생각한 것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페너가 생각하기에 최악의 상태가

자신과 함께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했던 바로 그 사람들 가운데서 발생하였다.

그것은 교회에서 갈라져나간 ‘분파주의’였다.


스페너와 함께 1670년에 ‘경건의 모임’을 시작한 사람 가운데

요한 야콥 쉬츠는, 스페너와 함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었다.


이 쉬츠가 점점 루터교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1670년대 후반에 기성 교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1683년부터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스페너는 ‘경건의 모임’을 왜 중단 했는가?

평생 목회를 한 ‘교회의 사람‘이었던 스페너에게, 분리주의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었다.

1675년에 「경건한 열망」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불타올랐던 경건주의 운동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곧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1670년대 말기부터 스페너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는데,

스페너의 마음에 가장 큰 부담을 주었던 것은

바로 스페너 그룹에서 일기 시작한 ‘분파주의’(루터교 탈퇴)였다.


분파주의의 온상이 되었던 것이 ‘경건의 모임’이었다.

사람(아마 루터교회)들이 1670년에 시작된 ‘경건의 모임’을 공격한 가장 큰 이유도

분리의 위험 때문이었다.


‘경건의 모임’은 「경건한 열망」에서 교회를 갱신하기 위한 가장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안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분리주의로 인해, 스페너의 교회갱신론이 벽에 부딪혔다고 볼 수 있다.


스페너 자신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면서 했던 그의 고별설교에서

스페너는 자신이 20년 동안 일했던 프랑크푸르트 시절을 정리하였다.


‘경건의 모임’(소그룹)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는 ‘경건의 모임’이 좋은 결과도 가져왔지만,

이 모임 때문에 어려움도 있었음을 시인했다.


프랑크푸르트를 떠난 다음부터 스페너 자신은 ‘경건의 모임’을 만들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건주의 연구에서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따르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경건한 열망」에서 스페너가 교회갱신의 방법으로서 그토록 중요하게 주장했던 것이

‘경건의 모임’(소그룹)이었는데,

 

‘경건의 모임’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스페너가 ‘작은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함으로써

교회를 갱신하려는 본래의 구도를 포기했다는 것인가?


지금까지의 <경건주의 연구>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 없었다.

 

‘경건의 모임’과, ‘교회 안의 작은 교회!’

 

결론부터 말하면, 교회를 갱신하려는 스페너의 본디 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스페너의 근본 구도는 ‘비제도적인 작은 성경공부 모임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전체(대중교회)를 갱신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즈음의 정통주의가 ‘제도적인 방법(교회 제도, 치리)을 통하여

일시에 대중 교회를 갱신하려고 한 것‘과 뚜렷이 구분된다.

‘경건의 모임’은, 스페너의 이런 갱신론을 관철시키는 핵심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제도적인 작은 성경공부 모임‘을 나타내는 스페너의 표현 가운데

‘경건의 모임’ 말고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는 표현이 있다.      *ecclesiola in ecclesia


흔히 스페너의 공동체 사상을 나타내는 이 두 가지 표현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두 개념은 서로 다르다.


스페너가, 교회갱신에 대한, 자신의 근본적인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면,

이 두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차이를 살피기 전에 두 사상이, 스페너의 목회사역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자.


①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는 표현은, 교회사에서 스페너가 처음 쓴 말이다.

스페너가 1675.07.23에 사무엘 가르프쪼프에게 보낸 편지에, 이 표현이 처음 나온다.


이후 스페너는 1675.09.08일자로 쓴 「경건한 열망」의 서문에서

이 사상이 교회 갱신론의 심장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드레스덴을 거쳐 베를린으로 옮겨 목회하면서

스페너는 죽을 때까지 이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


만년에 쓴 편지, 1701.01.25일자 편지에서 스페너는

‘교회 안에서 작은 교회를 모으는 것’을 통하여 교회를 갱신하는 방법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계속되는 자신의 ‘원리’라고 말하고 있다.


② ‘경건의 모임’에 대해서는 상황이 반대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스페너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면서

더 이상 ‘경건의 모임’을 만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걸맞게 스페너는, 드레스덴에서의 취임설교와 고별설교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취임 설교에서 더 이상 ‘경건의 모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취임과 고별 설교들에서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사상을 계속하여 자신의 사역 원리로 드러내고 있었다.


스페너는 그의 편지에서

‘경건의 모임’은 여건이 되는 곳에서만 제한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그 한계를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교회 안의 작은 교회’와 ‘경건의 모임’은 어떻게 다른가?

‘교회 안의 작은 교회’가 원리라면

‘경건의 모임’은 이 원리에서 끌어낸, 구체적인 한 가지 방법이다.

 

앞의 것은 상위 개념이며, 뒤의 것은 종속 개념인 셈이다.


‘경건의 모임’은 당시의 교회제도 안에서 충돌 가능성이 많은 것이었으며,

그 충돌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때문에 스페너는 드레스덴으로 가면서, 근본 원리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둘의 차이가, 위 글에서 아주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문맥에서 유추해 보면,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제도적 교회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며,

‘경건의 모임’은 .. 제도적 교회(당시 루터교회)를 벗어나는 모임으로서

둘은 「교회 정치적 구분」이 있는 것으로 보임. /편.



◑필립 스패너의 공적


▲1. 작은 교회(구역/셀그룹/목장) 의 도입

순수한 성도들만 모이자는 작은 교회 사상

교회 역사에서 아주 초기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모임은 대부분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분리되어 소종파를 이루게 되었다.


스페너의 경건주의가 끼친 공헌은

이러한 작은 교회 사상을 대중 교회 안에(in ecclesia) 정착시켰다는 데 있다.


‘작은 교회’ 사상/개념은, 스페너가

개혁교회의 탈교회적 경건주의자인 라바디(칼빈주의자)에게서 빌려온 것이었다.

스페너는 이 사상에 ‘교회 안에’란 말을 더 붙였다.

이것은 단순한 더하기가 아니었다.


‘교회 안에’라는 말이 덧붙음으로써, ‘작은 교회’란 말은 질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즉 탈교회적이며 소종파적이며 분리주의적인 ‘작은 교회’가

‘교회 안에’를 통하여 세례받음으로써 교회화(Verkirchlichung)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스페너의 사상을 역사적인 상황에서 분석하였다.

이제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2. 교리문답을 넘어서, 성경읽기 강조

종교개혁이 일어난 다음 경건주의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독교에서

교리문답은 신자들에게 교파적 정체성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신앙교육 교재였다.


개혁자들이 성경을 쉬운 모국어로 번역하였으나

‘성경은 평범한 모든 성도들이 늘 읽어야 할 책’이라는 전반적 인식은 아직 없었다.


경건주의에 와서야 이것이 관철되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으로부터 경건주의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독교는

‘교리문답 중심의 기독교’라고 부를 수 있다.


경건주의에 와서야.. 성경은 기독교 신앙을 위한 가장 일상적인 책이 되었다.

스페너는 모든 사람이 성경의 모든 책을 읽어야 한다고 열망하였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인간의 책(신앙 서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기독교를 향하는 마당이었다.


▲3. 경건한 “삶” 강조

정통주의(루터교회)와 경건주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정통주의가 정통-교리(Ortho-doxie)를 강조한 데 반해서

경건주의는 강조점을 정통-실천(Ortho-praxis)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실천이었다.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이 정통교리를 확정하고 지키는 것보다 앞서게 되었다.


경건주의의 주된 흐름과 초기의 경건주의는

정통교리와 정통실천 가운데서 양자택일을 하지 않았다.

결코 교리가 필요 없다고 보지 않았다. 그러나 강조점은 삶의 변화에 두었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지적 훈련의 마당이 아니었다.

기독교적인 정보를 나누고 모으는 모임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살아 움직임으로써

전인격적인 삶의 변화가 있던 마당이었다.


▲4. 제도적 교회에서.. 개인적 신앙의 중요성 강조

중세적 신앙은 거대한 제도인 교회에 순응하고 소속하는 것에 그 중심이 있다.

구원이란 성례적 구조를 가진 교회에 소속되는 것이며,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의심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내가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그러하다고 인정된 것을

개인은 그저 동의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면서 사상적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나 개인이 어떻게 느끼고 체험하느냐가 중요하게 여겨졌다.

르네상스 운동이 이러한 사상전환의 원인이었다.


계몽주의에 와서 이러한 것이 아주 뚜렷해졌다.

이러한 변화를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중세의 신앙이 제도 중심적이라면, 근세의 신앙은 인격적인 만남의 신앙이다.

중세의 신앙이 자각 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순응의 신앙이라면

근세의 신앙은 나의 깊은 자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훈련의 신앙이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는 공간은 이런 인격적 만남과 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5. 결코 교회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회안의 작은 교회의 주소가 ‘교회 안‘이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라는 말은 좁게 물리적인 위치를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직접 일하시기도 하지만

여전히 교회를 통하여 가장 중심적으로 이시며,

현실 교회에 여러 가지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교회에는 희망이 있다고 믿는 태도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교회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신앙적 확신이

‘교회 안에‘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스페너는 ‘작은 모임’이, 어느 식으로든 목회적 관리와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목회적 관리에서 벗어날 때의 위험성을 스페너는 체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었다.


목회적 관리라는 점에서 보면 ‘교회 안에’라는 말은 ‘교회 옆에’도 될 수 있다.

혹은 교회의 목회적 지도와 연결되어 ‘세상 한 가운데서의 작은 교회 모임’도 될 수 있다.


오늘날 사회 안의 여러 가지 기독교적 모임이 경건주의의 공동체 사상에서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립 스패너의 고민과 대안 모색


소그룹 운동은, 결국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군요../편.


▲1. 교리문답교육

교리문답교육(Katechismus)이 그것이었다.

교리문답교육은 당시의 교회에서 제도적으로 인정된 모임이었다.

스페너는 「경건한 열망」에서 교리문답교육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스페너는 ‘경건의 모임’에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교리문답교육은 아직 그의 시야에 크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경건의 모임’이 갱신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벽에 부딪히자

교리문답교육이 스페너에게 그 대체 방법으로 다가왔다.


스페너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원리에 근거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서

교리문답교육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스페너는 전통적인 교리문답교육 방법을 자기 나름대로 바꾸었다.

곧 교리문답책에 나오는 항목을 단순히 암기하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어린이나 청소년이 주로 교육 대상이던 것을 어른들까지 포함시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교리문답책의 내용을 언제나 성경과 연관시켜서 가르쳤다.

교리문답교육에 성경을 가져오게 하여 교리문답을 가르치면서 성경을 찾아보게 하였고,

암기가 필요할 때는 교리문답 내용이 아니라 성경구절을 암송하게 하였다.


교회갱신은 하나님 말씀이 살아 움직일 때만 가능하며

하나님 말씀이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구체적인 마당으로써

‘경건의 모임’을 생각했던 스페너가


이제 교리문답교육을 그 마당으로 택하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하게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교리문답교육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교리문답 말고도 스페너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다른 방법들에 대해서도 말했다.


당시에 개혁교에서는 심방이 루터교에 비해서 많이 발달해 있었고

목회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스페너는 심방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론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


▲2. 가정예배

가정예배가 교회사에서 신앙훈련의 중요한 장으로 등장한 것은 경건주의에서이다.

가정에서 찬송 소리가 들리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은

전형적인 경건주의적 모습이다.


스페너는 가정예배도 교리문답 교육과 같은 부류로 보았다.

스페너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효과적인 방법을 추천하고 제안하기는 했지만

특정한 방법을 고정시키지는 않았다.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대중 교회 안에서 작은 만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분리주의를 배격하고,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웨슬리는 교회를 떠나서 따로 만들었다.)

스페너는 ‘교회의 사람‘이었다. 교회갱신을 위해 애쓰면서

스페너는 두 쪽에서 공격을 받았고, 또 그 둘과 싸웠다.

한 쪽으로는 정통주의였으며, 다른 한 쪽으로는 탈교회적 급진주의였다.


기존 교회가 철저하게 병들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근본적으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스페너는 정통주의와 충돌했다.


그런 한편 스페너는, 교회에는 새롭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굳게 믿음으로써

탈교회적 급진주의를 반대했다.


기존 교회(아마 루터교)는 벌써 개혁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바벨론이며

그러므로 기존 교회에서 떨어져나와야 한다는 것이 탈교회적 급진주의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스페너는 이 둘 사이의 길을 걸었다.

스페너 자신은 이 길을 ‘중용의 길‘, 또는 ‘황금같은 중용의 길‘이라고 불렸다.


그 길은 기존 교회의 타락을 보면서도 교회에 소망이 있다고 믿는 길이었다.

교회를 갱신하기 위하여 제도권 교회밖에 있던 원리(작은 교회. ecclesiola)를

교회에 정착시키려고(교회화) 애썼던 길이었다.  주2)

 

....................................


주1) 한 눈에 보는 개신교 교회사의 맥


위 글의 주인공, 필립 스페너는 어디쯤 위치하고 있나요?


16세기

종교개혁시대

루터, 칼빈,

17세기

독일 경건주의 운동*

영국 청교도*

스코틀랜드장로교*

모라비안 운동

필립 스페너,  어거스터 프랑케,

리처드 백스터, 존 오웬

 

진센돌프

18세기

감리교 운동

1차영적 대각성 운동*이성의 시대

웨슬리

휫필드, 에드워즈,

19세기

2차, 3차 대각성 운동

위대한(선교의) 세기

감리교 활발              

피니, 무디,

캐리, 테일러

스펄전*

20세기

오순절운동, 1906~

은사주의 운동의 시작  1960~

제3세계로 개신교확산 1950~

도시화에 따른 인구이동으로

메가 처치 등장  1950~

C. S. 루이스,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21세기

아마 영성운동으로 나아감

 


*표는 칼빈의 영향을 받은 운동

 

 

주2) 필립 스페너에 관한 자료 -클릭-